큐리탄
고린도전서 주석 · 매튜 풀

11장 예배의 질서와 합당한 성찬

매튜 풀 『청교도성경주석: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박문재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 고린도전서 11장 1~34절

글자100%
한눈에 보기

공적 예배에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지키고, 주의 만찬에 합당하게 참여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사역자는 자기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만큼만 따르라고 요구할 수 있다.
  • 하나님–그리스도–남자–여자의 질서는 본질의 차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직임과 위치의 문제다. 머리를 가리는 일은 당시 관습 속에서 그 질서를 드러내는 표였다.
  • 고린도 교회는 모임에서 분쟁하고, 성찬 전에 하던 애찬에서 가난한 형제를 소외시켜 교회를 업신여겼다.
  • 성찬은 주께서 제정하신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기념이다. 자기를 살피지 않고 합당하지 않게 참여하는 자는 징계를 받는다.

1. 그리스도를 본받는 바울을 본받으라1절

1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바울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만큼만 바울을 따르라

해석자들은 이 절이 10장 끝에 속한다고 본다. 바울이 앞에서 자기 모범을 설명한 뒤 이제 그 모범을 따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풀은 어느 장에 속하든 큰 문제는 아니라고 한다.

사도들의 모범은 우리 삶의 규범 가운데 하나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을 무조건 따르라고 하지 않는다. 자기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만큼만 따르라고 한다. 여기서 그의 겸손과 신중함이 드러난다. 어떤 사역자도 이 이상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2. 전해 준 규범을 지킨 것에 대한 칭찬2절

2너희가 모든 일에 나를 기억하고 또 내가 너희에게 전하여 준 대로 그 전통을 너희가 지키므로 너희를 칭찬하노라

바울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지킨 것을 칭찬하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이 준 가르침과 지시를 잊거나 흘려듣지 않고 기억했다.

‘전통’은 믿음이든 행실이든 가르침으로 전해진 모든 것을 뜻한다. 여기서는 교회 질서에 관한 가르침으로 보인다. 바로 뒤에서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 머리를 가리는 문제를 예로 들기 때문이다.

바울은 남에게서 받은 전통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전해 준 가르침을 잘 지킨 것을 칭찬할 뿐이다.

로마 교회는 성경에 없는 사도적 전통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도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는 데에는 개신교도 이견이 없다. 문제는 사도의 글 어디에도 없는 것을 무엇으로 사도의 전통이라 증명하느냐다. 성경이 요구하지도 않고 사도적 출처도 확인되지 않은 것을 애써 지키는 일은 지나치다.

  • 파라도세이스‘전해 준 것들’. 믿음이나 행실에 관해 가르침으로 전달된 모든 것

3. 머리를 가리는 문제와 복종의 질서3~16절

3그러나 나는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그리스도–남자–여자, 하나님–그리스도의 머리 질서

바울은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여자가 머리를 가려야 하는 까닭을 이치로 풀기 위해 먼저 머리의 질서를 세운다. 여자는 예배에서도 남편에게 순복하는 위치에 맞게 처신하고, 당시 옷차림과 관습에 따라 그 위치를 표로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신성으로는 모든 사람의 머리시다. 그러나 여기서는 중보자로서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각 남자’는 교회의 각 지체, 곧 모든 그리스도인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남자가 여자의 머리인 것은 하나님이 남편이 아내를 다스리게 하신 규례 때문이다. 남녀의 본질과 본성은 같다. 하나님이 남자에게 다스리는 위치와 직임을 맡기셨을 뿐이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머리이신 것도 신적 본질에서가 아니라 중보자 직임에서다. 오히려 이 절은 성부와 성자가 같은 본질임을 보여 준다. 머리와 지체는 본성이 같아야 하기 때문이다. 신하가 왕에게 복종한다고 본성이 다르지 않듯, 성자의 복종도 성부와의 동등함을 해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는 자들은 이 절 앞에서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다.

  • 머리본질의 우열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다스림의 직임과 질서
함께 볼 말씀엡 5:23 · 창 3:16
4무릇 남자로서 머리에 무엇을 쓰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요

남자가 머리를 가리고 기도·예언하면 머리를 욕되게 한다

베자 등은 이 말씀이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는 모든 남자에게 해당한다고 본다. 홀 주교는 이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고, 풀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본다. 대표 기도는 회중이 함께 드리는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설교를 들으면서 함께 예언한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여자는 평소 교회에서 가르치지 못했으나, 성령의 특별한 감동을 받은 여자는 그 원칙에 매이지 않았다.

‘무엇을 쓰고’는 그 나라에서 관례로 쓰던 모자처럼 꼭 쓰지 않아도 되는 장식물을 말한다. 머리털이나 건강을 위해 쓰는 것은 포함되지 않는다.

욕되게 하는 ‘머리’는 두 갈래로 읽힌다. 그가 대표하는 그리스도로 볼 수도 있고, 자기 머리로 볼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은 뒤의 해석을 따른다. 하나님이 기도하고 예언하는 자에게 입혀 주신 권위와 존귀를 복종의 표로 스스로 깎아내린다는 뜻이다.

이 본문은 당시 관습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 라이트푸트는 유대 제사장이 예배 때 머리를 가렸으므로 신앙의 유대교화를 막으려 한 것이라 본다. 로마인과 헬라인도 제사 때 머리를 가렸다. 풀은 고린도에서 머리를 드러내는 것이 권위의 표였기에, 하나님을 대표하는 자가 그 위치를 드러내야 했다고 본다. 관습은 지역마다 다르다. 서양에서는 맨머리가 복종의 표다. 프랑스 개혁파 사역자들은 기도할 때는 벗고 설교할 때는 쓴다. 결국 이 절이 요구하는 것은 사역자가 그 지역의 자연스러운 관례를 따라 그리스도의 대사다운 위엄을 지키는 것이다. 어색하고 별난 복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 예언공중 예배에서 성령의 감동을 따라 말씀을 풀어 전하는 일
함께 볼 말씀딤전 2:12 · 행 2:17 · 욜 2:28
5무릇 여자로서 머리에 쓴 것을 벗고 기도나 예언을 하는 자는 그 머리를 욕되게 하는 것이니 이는 머리를 민 것과 다름이 없음이라

여자가 머리를 드러내고 기도·예언하면 머리 민 것과 같다

여자는 조용히 배우라는 명령(딤전 2:11-12)은 평소의 일반적인 여자들에게 해당한다. 성령의 특별한 감동으로 예언하게 된 여자는 예외다. 성경에는 훌다, 안나, 빌립의 네 딸 같은 여선지자들이 있다.

‘머리에 쓴 것’은 모자나 두건, 너울처럼 일부러 쓰는 가리개다. 자연히 자란 머리털은 포함되지 않는다.

욕되게 하는 ‘머리’는 남편일 수도 있고 자기 머리일 수도 있다. 남편으로 보면, 순복의 표를 벗어 남편의 권위에 도전하는 셈이다. 자기 머리로 보면, 당시 맨머리는 단정치 못한 여자의 모습이었으므로 스스로를 욕되게 한다는 뜻이다. 리브가가 이삭을 만날 때 너울로 얼굴을 가린 일이 그 관습을 보여 준다.

‘머리를 민 것과 같다’는 말은 단지 가리개가 없다는 뜻에 그치지 않는다. 긴 머리를 단장하지 않고 풀어 헤친 모습까지 가리킨다고 풀은 본다. 바쿠스의 여사제들은 머리를 산발한 채 광인처럼 예식을 치렀다. 고린도의 일부 여자들이 그 모습을 흉내 내어 집회에 나왔고, 바울이 이를 책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함께 볼 말씀딤전 2:11-12 · 눅 2:36 · 행 21:9 · 창 24:65
6만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거든 깎을 것이요 만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움이 되거든 가릴지니라

가리지 않으려면 깎고, 깎는 게 부끄러우면 가려라

하나님의 뜻을 전한다는 여자가 머리를 산발한 흉한 모습으로 예언하는 것은 부끄러운 광경이다. 인간의 본성이 이를 가르쳐 준다. 그래서 바울은 머리를 단정히 묶거나 땋지 않을 바에는 차라리 밀거나 짧게 깎으라고 한다. 예언하는 여자는 잠잠하라는 규범에서는 예외지만, 본성의 빛과 그 지역의 통념에는 매인다.

그렇다면 여자는 맨머리로 공중 집회에 와도 되는가? 풀은 이 본문이 그 질문을 다루지 않는다고 답한다. 이 본문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도하고 예언하는 여자의 모습을 말하는데, 지금은 그런 여선지자가 없다. 그 문제는 다른 본문과 정황으로 판단해야 한다. 풀 자신은 머리털이 가리개이자 장식으로 주어졌으므로 반드시 써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한다. 머리 단장이 교만이나 정욕의 도구가 되는 문제는 부수적인 일로 본다.

여자가 머리를 깎는 것이 부끄럽듯, 머리털이나 가리개로 가리지 않는 것도 부끄럽다고 본성이 가르친다. 신학자들은 ‘가릴지니라’를 머리털로 가려지지 않는 얼굴을 너울로 가리라는 뜻으로 이해한다.

  • 본성무엇이 부끄럽고 단정한지를 사람에게 가르치는 타고난 분별
7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이니 그 머리를 마땅히 가리지 않거니와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니라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 여자는 남자의 영광

당시 머리를 가리는 것은 복종의 표였다. 그래서 남자는 하나님이 주신 권위와 탁월함을 드러내기 위해 머리털 외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아야 했다.

바울은 남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을 두 근거를 든다. 첫째, 남자는 하나님께 직접 복종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섭리로 세워진 윗사람에게 하는 복종 외에는, 사람에게 복종한다는 표를 해서는 안 된다. 둘째,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으로서 하나님을 대표하고, 하나님은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신다.

‘영광’은 어떤 이로 인해 영광을 받는다는 뜻으로 쓰인다. 바울이 성도를 자기 영광이라 하고, 잠언이 아비를 자식의 영광이라 한 것과 같다.

여자는 남자를 돕기 위해 남자에게서 지음을 받았다. 아담이 하와를 자랑했듯 남자는 여자로 인해 영광을 받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야 하지만 남자의 영광은 가려져야 한다.

  • 영광그로 말미암아 다른 이가 영예를 얻는 존재
함께 볼 말씀살전 2:20 · 잠 17:6 · 창 2:23
8남자가 여자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났으며

여자가 남자에게서 지음을 받았다

앞 절의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는 말을 풀어 증명하는 절이다. 여자는 남자에게서 취한 갈비뼈로 지음을 받았고, 그 반대가 아니다.

바울은 이 창조 순서를 근거로,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이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임을 논증한다.

함께 볼 말씀창 2:21-22
9또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지 아니하고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음을 받은 것이니

여자가 남자를 돕기 위해 지음을 받았다

하나님은 먼저 남자를 지으신 뒤, 그를 돕는 배필로 여자를 지으셨다(창 2:18).

어떤 것을 위해 지어진 것은 그 대상보다 앞서지 않는다는 것이 변하지 않는 이치다. ‘남자를 위하여’는 남자를 섬기고 돕기 위하여라는 뜻이다.

함께 볼 말씀창 2:18
10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로 말미암아 권세 아래에 있는 표를 그 머리 위에 둘지니라

천사들 때문에 여자는 권세 아래 있는 표를 둔다

헬라어 본문에는 ‘권세’라는 말만 있다. 표가 실체를 나타내듯 실체로 표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남편의 권세 아래 있다는 표로 머리에 쓰는 것을 가리킨다. 법궤를 한 곳에서는 ‘권능의 궤’라 하고 다른 곳에서는 ‘능력’이라 부르는 것이 같은 표현법이다.

어떤 이들은 ‘머리’를 남편으로 본다. 여자가 남편 안에서 자기 권세를 행사한다는 뜻을 가리개로 증언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디모데전서 2:12이 이 절을 잘 설명해 준다고 본다.

‘천사들로 말미암아’에는 여러 해석이 있다. 하나님이 천사를 부려 이 질서를 정하셨다는 견해, 정혼을 위해 보낸 사자라는 견해(유대인의 관습), 교회 직분자라는 견해, 음욕을 부추기는 악한 천사라는 견해가 있다.

대부분의 뛰어난 해석자들은 선한 천사로 본다. 바울이 귀신을 ‘천사’라 불렀을 리 없기 때문이다. 택함 받은 자들을 섬기는 선한 천사들이 예배 자리에 함께하며 지켜보니, 두려움으로 품위 없는 행동을 삼가라는 경고다.

  • 권세남편의 권세 아래 있음을 나타내는 머리의 표
함께 볼 말씀시 132:8 · 대상 16:11 · 딤전 2:12
11그러나 주 안에는 남자 없이 여자만 있지 않고 여자 없이 남자만 있지 아니하니라

주 안에서 남자와 여자는 서로 없이 있지 않다

남자가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는 말을 듣고 오만해질 수 있었다. 이를 막으려고 바울은 남녀가 하나님의 일에서나 세상일에서나 서로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서로 돕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질서다.

다르게는, 남녀가 ‘주 안에서’ 똑같이 은혜로 사는 존재라는 뜻일 수도 있다. 창조 질서에서는 남자에게 우선권이 있지만, 영적 상태와 영적인 일에서는 차이가 없다.

12이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난 것 같이 남자도 여자로 말미암아 났음이라 그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느니라

남자도 여자로 났고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났다

남자는 먼저 지음을 받았으니 우선권이 있다. 여자가 남자를 위해 지음을 받았으니 우월함도 남자에게 있다.

그러나 아담 외의 모든 남자는 여자에게서 잉태되고 젖을 먹고 양육을 받는다. 그러니 여자를 멸시할 이유가 없다. 여자도 이것을 내세워 남자를 깔볼 이유가 없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지혜로 정하신 질서다. 그러므로 각자 받은 특권을 하나님의 뜻대로 써야 한다. 여자는 복종을 인정하고 그 표를 드러내야 한다.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답게 합당한 권위로 처신해야 한다.

13너희는 스스로 판단하라 여자가 머리를 가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하냐

머리를 가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 마땅한지 스스로 판단하라

사람은 양심으로 깨닫기 전에는 잘못을 철저히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성경은 자주 사람의 이성과 양심에 호소해 스스로 판결하게 한다.

바울이 판단하라고 한 문제는 이것이다. 여자가 머리를 산발하거나, 머리나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 기도하는 것이 기도하는 자의 단정함과 품위에 맞느냐는 것이다.

14만일 남자에게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부끄러움이 되는 것을 본성이 너희에게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남자의 긴 머리가 부끄러움임을 본성이 가르친다

‘본성’을 두고 여러 해석이 있고, 풀은 대부분을 물리친다. 본성의 법으로 보면 긴 머리가 그 자체로 악이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나실인에게 머리를 기르게 하셨고, 건강을 위해 기르는 것도 불법이 아니다. 열방의 법으로 볼 수도 없다. 많은 나라 남자들이 머리를 길렀다. 타락 뒤에 남은 이성의 빛으로 보면 모든 사람이 같은 판단을 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제2의 본성인 관습으로 볼 수도 없다. 이런 뜻의 용례가 롬 11:24에 있으나, 남자의 긴 머리를 부끄럽게 여기는 보편적 관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타고난 성향으로 보는 것도 맞지 않는다. 머리를 기르고 싶어 하는 남자도 있다.

풀이 가장 유력하게 보는 해석은 로마서 1:26처럼 ‘본성’을 남녀의 성별 차이로 보는 것이다. 남녀가 옷차림으로 성별을 구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듯, 머리 모양으로 구별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남자가 여자 옷을 입는 것이 부끄럽듯, 여자처럼 머리를 기르는 것도 부끄럽다.

  • 본성여기서는 남녀의 성별 차이라는 순리
함께 볼 말씀롬 1:26 · 롬 11:24
15만일 여자가 긴 머리가 있으면 자기에게 영광이 되나니 긴 머리는 가리는 것을 대신하여 주셨기 때문이니라

여자의 긴 머리는 가리개 대신 주신 영광이다

하나님이 여자에게 긴 머리를 가리개 대신 주셨다. 그래서 긴 머리는 여자에게 아름다움과 장식이 된다.

남자 머리의 적절한 길이를 다룬 책은 많다. 풀은 이 절들에서 두 원칙을 끌어낸다. 첫째, 머리를 보고 성별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한다. 둘째, 남자는 여자가 하는 방식으로 머리를 기르거나 꾸미지 말아야 한다. 길게 풀어 늘이거나, 땋거나 곱슬거리게 하거나, 장식을 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더욱 맞지 않는다.

풀은 이와 관련해 남의 머리털로 만든 가발로 꾸미는 일이 합당한지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고 덧붙인다.

16논쟁하려는 생각을 가진 자가 있을지라도 우리에게나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이런 관례가 없느니라

논쟁하려 해도 하나님의 교회들에는 그런 관례가 없다

머리를 기른 남자나 자기 파당을 감싸려고 바울의 말에 맞서는 자가 있을 수 있다. 바울은 그런 자에게, 자기와 하나님의 모든 교회에는 그런 관례가 없다고 답한다. 맨머리 여자나 머리를 가린 남자가 기도하고 예언하는 관례도 없고, 이런 작은 일로 다투는 관례도 없다.

선한 그리스도인은 이런 일에서 자기 교회뿐 아니라 다른 교회들의 관례도 살펴야 한다.

바울은 이 말로 머리 문제를 마무리하고, 고린도 교회에 들어온 다른 폐단으로 넘어간다.

4. 모임의 폐단과 파벌 싸움에 대한 책망17~19절

17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너희 모임이 유익이 아니라 해가 되니 칭찬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제 더 크고 중요한 일을 다룬다. 이 일에서는 칭찬은커녕 호되게 꾸짖을 수밖에 없다.

교회로 모여 기도하고 말씀을 가르치고 듣고 성례에 참여하는 것은, 은혜를 깊게 하고 신앙이 자라게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의 모임은 그런 유익을 주기는커녕 더 많은 죄를 짓게 만들었다.

18먼저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어느 정도 믿거니와

교회로 모일 때 분쟁이 있다는 말을 어느 정도 믿는다

‘교회에 모일 때’는 신앙적인 모임을 갖는 때를 말한다. 당시에는 예배용 건물이 없었고 개인 집에서 모였다.

어떤 이들은 ‘교회’를 정해 둔 모임 장소로 본다. 풀은 이교도가 많은 환경에서 그렇게 안정된 장소를 두었을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본다.

분쟁의 내용은 뒤에서 드러난다. 먹고 마시는 일, 앉는 순서, 언제 먹기 시작할지, 모두가 오기를 기다리지 않는 일로 다투었다.

19너희 중에 파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파당이 있어야 옳다 인정받은 자들이 드러난다

파당은 절대적으로 필연인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부패한 뜻에서 생긴다. 그러나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일어난다. 하나님은 사탄이 악의로 일하게 두셔서 사람 마음의 욕심과 부패가 드러나게 하신다.

‘파당’으로 옮긴 헬라어는 원래 그릇된 교리를 퍼뜨리는 이단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나 늘 그런 뜻만은 아니다. 여기서는 앞 절의 분쟁을 가리킨다. 15장이 보여 주듯 고린도에 교리적 오류가 있었다. 하지만 이단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말이 분쟁 소문을 믿는 근거가 된다고 보면 말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이런 일을 허락하신 목적은 대비를 드러내는 데 있다. 하나님의 사랑에 다스림 받는 참된 그리스도인과, 사랑의 법을 짓밟으면서 그리스도인을 자처하는 자들이 뚜렷이 구별되게 하신다.

5. 주의 만찬을 모독함에 대한 책망20~22절

20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렇게 모여서는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다

흠정역의 ‘한 곳에’라는 번역이 적절하다고 풀은 본다. 성찬은 많은 신자가 한 몸임을 선언하는 자리다. 그러므로 가장 깊은 형제 사랑을 보여야 할 그 자리에서 분열하는 것은 가장 나쁜 일이다.

헬라어에는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다’만 있다. ‘이것은’을 보충해 읽어야 한다. 합당하지 않게 먹는다면 실제로는 주의 만찬을 먹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주의 만찬’이라 부르는 것은 주께서 제정하셨고, 주의 죽으심을 기념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들은 이 만찬을 성찬으로 보고, 어떤 이들은 성찬 직전의 애찬으로 본다. 애찬으로 보는 이들은 먼저 먹거나 배불리 먹는 일이 성찬에서는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헬라에는 부자가 우상 제사 뒤 잔치를 열던 관습이 있었다. 이를 본떠 주일에 부자들이 음식을 가져와 함께 먹었는데, 고린도에서는 이것이 부패해 가난한 자들이 소외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애찬이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이라거나 그분의 죽음을 기념하는 것이라는 증거는 없다. 바울의 뜻은 이렇다. 애찬에서 그렇게 행하면 성찬에서 주님과 바르게 교통할 수 없다. 따라서 ‘주의 만찬’은 오직 성찬을 가리킨다.

  • 애찬성찬 전후에 함께 먹던 식사.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것은 아님
함께 볼 말씀고전 11:26 · 눅 22:19
21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각자 먼저 먹어 어떤 이는 굶고 어떤 이는 넉넉히 마신다

당시 교회에는 유대교에서 개종한 이들이 있었다. 그리스도께서 유월절 식사 직후 성찬을 제정하셨기에, 그들은 성찬을 유월절 식사에 딸린 것쯤으로 여겼다. 그래서 유월절이 폐해졌는데도 집에서 음식을 가져와 성찬 전에 함께 먹었다.

가난한 형제들은 음식을 가져올 형편이 안 되었다. 그런데 음식을 가져온 이들은 기다리지 않고 먼저 먹었다. 그 결과 부자는 배불렀고 가난한 이는 굶주렸다.

흠정역이 ‘취하였다’로 옮긴 것은 지나치고 가혹하다고 풀은 본다. 이 말은 필요한 양을 조금 넘겨 넉넉히 마신 것도 뜻할 수 있다. 가나 혼인 잔치에서 쓰인 같은 단어가 그 예다. 고린도 교인들이 술에 잔뜩 취해 성찬에 참여한 것처럼 그려서는 안 된다.

  • 메튀에이만취만이 아니라 넉넉히 마신 것도 뜻할 수 있는 말
함께 볼 말씀요 2:10
22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난한 자를 부끄럽게 하느냐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는 말에서, 애찬이 공적 예배 장소에서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먹을 것이라면 집에서 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애찬의 남용만이 아니라, 그런 식사를 경건한 예식인 양 교회에서 행해 모임 자체를 욕되게 한 것도 책망한다.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일이었다. 모이는 곳, 모인 사람들, 특히 그리스도의 피로 속량받은 가난한 형제들을 멸시한 것이다. 음식을 가져올 형편이 안 되는 가난한 이들이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돌아가는 상황을 바울은 염두에 두고 있다.

6. 성찬의 제정과 합당하지 않은 참여의 위험23~34절

23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내가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 잡히시던 밤의 성찬이다

성찬 전의 애찬은 바울이 주께 받은 것이 아니다. 유대인이나 이교도의 관습을 들여온 것이다. 교회 밖이나 집에서 먹는 것은 바울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만, 주의 상 직전에 애찬을 하라는 지시는 받은 적이 없다. 바울이 주께 받아 전한 것은 주께서 잡히시던 밤에 행하신 성찬뿐이다.

떡을 가지신 일에 대해서는 마태·마가·누가복음의 해설을 보라고 한다.

바울이 이것을 어떻게 받았는지는 여러 견해가 있다. 모세가 창세기 내용을 계시로 알았듯 직접 계시로 받았다는 견해, 표현이 같으므로 누가복음에서 알았다는 견해, 다른 사도에게서 들었다는 견해다. 주께 받은 것은 확실하지만 그 방법은 확실하지 않다.

함께 볼 말씀마 26:26 · 막 14:22 · 눅 22:19
24-2524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25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떡은 내 몸,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기념하라

이 말씀은 복음서의 성찬 제정 기사에 이미 나왔다. 풀은 자세한 내용을 누가복음 22:19-20 해설로 미룬다.

함께 볼 말씀눅 22:19-20
26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떡과 잔으로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한다

이 절은 떡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실제 살과 피로 바뀐다는 로마 교회의 화체설이 옳지 않음을 보여 준다. 바울은 여전히 ‘이 떡’, ‘이 잔’이라 부른다. 떡과 잔은 다른 것으로 바뀌지 않는다. 성찬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고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심판하러 다시 오실 때까지 이 성례를 지키며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변함없는 의무다.

어떤 이들은 ‘전하는 것이니라’를 명령문 ‘전하라’로 읽는다. 그렇게 보면 바울의 말은 이렇다. 성찬으로 주의 죽으심을 나타내는 것이 너희 본분이니, 그에 걸맞게 처신하라.

  • 화체설떡과 포도주가 실제 살과 피로 변한다는 로마 교회의 교리. 풀은 이 절을 근거로 반박함
27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면 주의 몸과 피에 죄를 짓는다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합당하지 않게’를 참여하는 사람의 자격이 아니라 받는 태도의 문제로 본다. 그러므로 참여할 자격이 있는 사람도 합당하지 않게 참여할 수 있다.

합당하지 않은 참여의 예로는 이런 것들이 있다. 바른 믿음과 공경하는 마음이 없는 것, 믿음과 사랑이 없는 것, 성찬의 목적을 모르는 것, 알고 있는 죄를 회개하지 않은 채 나아오는 것.

그렇게 참여하는 자는 주께서 제정하신 성례를 더럽히는 죄를 짓는다. 주의 몸과 피를 나타내는 표를 모독하면, 그 표가 가리키는 주의 몸과 피를 모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왕의 인장이나 초상을 모독하는 것이 왕을 모독하는 것과 같다.

어떤 이들은 이 죄가 그리스도를 못 박은 자들과 같은 벌을 받는다고까지 말한다.

  • 합당하지 않게참여자의 자격보다 성찬을 받는 태도의 문제
28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자기를 살핀 뒤에야 떡을 먹고 잔을 마셔라

성찬에 나아갈 자는 먼저 살펴야 한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성례가 무엇인지, 거기 참여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아는가? 자신의 믿음, 사랑, 회개, 새로운 순종은 어떠한가? 하나님이 차리신 상에 앉기에 합당한가? 이 상은 개가 아니라 자녀를 위한 것이고, 원수가 아니라 친구를 위해 베푸신 것이다.

자기를 살피지 않고는 참여해서는 안 된다. 이는 성찬을 이해하지 못하는 어린아이, 분별하지 못하는 사람, 불신자, 죄를 알고도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는 참여 자격이 없다는 뜻이다. 초대 교회와 바른 개혁 교회들은 실제로 그렇게 해 왔다.

그런 이들을 누가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함께 상에 앉아도 되는지, 성찬 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이 본문이 다루지 않는다고 풀은 선을 긋는다.

  • 살피다성찬 전에 자기 지식과 믿음, 사랑, 회개를 점검하는 일
29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면 심판을 먹고 마신다

합당하지 않게 먹는 자는 불신자, 회개하지 않은 자, 성찬의 뜻을 모르는 자, 불경한 자처럼 처음부터 혹은 지금 자격이 없는 자를 말한다.

그는 ‘크리마’, 곧 심판을 먹고 마신다. 이 땅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끝내 회개하지 않으면 영원한 벌을 받는다.

그 심판은 합당하지 않게 참여한 당사자에게 임한다. 함께 상에 앉은 사람에게 임하지 않는다. 다만 그를 상에 앉게 한 책임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죄가 있다.

그의 죄책은 일반 떡과 주의 몸을 나타내는 떡을 구별하지 못한 데 있다. 자신을 살피고 준비하지 않은 채 아무렇게나 나아와 주의 몸을 모독했다.

  • 크리마‘정죄’ 또는 ‘심판’. 어느 쪽으로 옮겨도 무방
30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그래서 약한 자, 병든 자, 잠자는 자가 많다

고린도 교인들은 그들 가운데 약하고 병들고 일찍 죽는 이가 많은 이유를 다른 데서 찾았다. 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도로서, 성찬을 불경하게 더럽힌 것이 그 큰 원인 가운데 하나라고 분명히 말한다.

어떤 이들은 ‘잠자는 자’라는 표현에 주목한다. 성경은 악인의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지 않으므로, 이들은 참믿음이 있는 성도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받은 신자도 성찬 같은 규례를 범하면 이 땅에서 징계를 받을 수 있다.

  • 잠자는 자죽은 자. 성경에서 주로 신자의 죽음에 쓰는 표현
31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스스로 살피면 판단을 받지 않는다

성경에서 ‘판단하다’는 심문, 고소, 정죄 같은 심판의 모든 요소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고소당하고 정죄받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스스로를 살피고 판단해 회개로 믿음을 새롭게 하면, 불신자나 회개하지 않는 자, 불경한 자가 되지 않는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고소하거나 정죄하지 않으신다.

32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세상과 함께 정죄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판단은 세상과 함께 정죄받지 않게 하시는 주의 징계다

고린도 교인들이 겁에 질려, 자신들의 환난을 하나님이 더 이상 자녀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표로 오해할 수 있었다. 바울은 이를 막으려고 이 말을 덧붙인다.

하나님의 백성이 병이나 죽음 같은 고난을 당할 때, 하나님은 재판관으로서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로서 자녀를 징계하시는 것이다. 이 땅에서 쓴맛을 보게 하셔서, 회개하지 않는 세상과 함께 영원한 멸망에 이르지 않게 하시려는 선한 목적이 있다.

풀은 주께서 사랑하는 자를 징계하시고, 징계가 없으면 친아들이 아니라는 히브리서 말씀으로 이를 뒷받침한다.

  • 징계재판관의 정죄가 아니라 아버지가 자녀를 바로잡는 교정
함께 볼 말씀히 12:6-8
33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

먹으러 모일 때 서로 기다리라

바울은 앞으로 불경하고 합당하지 않은 행동을 삼가라고 권하며 이 문제를 마무리한다.

온 교회가 모이기 전에 애찬을 시작해서는 안 된다. 부자들이 가난한 이를 기다리지 않고 먼저 먹어서도 안 된다. 한 떡을 먹는 한 몸으로서, 모든 지체가 모였을 때 함께해야 한다.

34만일 누구든지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이는 너희의 모임이 판단 받는 모임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밖의 일들은 내가 언제든지 갈 때에 바로잡으리라

시장하면 집에서 먹고, 나머지는 가서 바로잡겠다

애찬에서 굶주리는 형제가 생길 바에는, 예배로 모인 곳에서 하지 말고 각자 집에서 배불리 먹는 편이 낫다. 그러면 모임에서 불경하게 행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부르는 일이 없을 것이다.

끝으로 바울은 아직 말하지 않은 일들이 남아 있다면 곧 직접 가서 지시하고 바로잡겠다고 일깨운다.

복습 문제

풀은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라는 말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지 않고 오히려 뒷받침한다고 본다. 왜 그런가?
머리 됨은 본질이 아니라 중보자 직임에 관한 것이다. 또 머리와 지체는 본성이 같아야 하므로 성부와 성자는 같은 본질이다. 신하가 왕에게 복종해도 본성이 다르지 않듯, 성자의 복종도 성부와의 동등함을 해치지 않는다.
풀은 6절을 근거로 여자가 공중 집회에 늘 머리를 가려야 한다고 보는가?
아니다. 이 본문은 성령의 특별한 감동으로 기도·예언하는 여자의 모습을 다루며, 지금은 그런 여선지자가 없다. 그 문제는 다른 본문과 정황으로 판단해야 한다. 머리털이 가리개로 주어졌으니 반드시 써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고 풀은 말한다.
30절의 병과 죽음, 32절의 ‘판단’은 신자에게 어떤 의미인가?
합당하지 않은 성찬 참여에 대한 이 땅의 징계다. 하나님이 재판관이 아니라 아버지로서 자녀를 바로잡으시는 것이다. 그 목적은 세상과 함께 영원히 정죄받지 않게 하시는 데 있다(히 12:6-8).

매튜 풀 『청교도성경주석: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박문재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의 고린도전서 11장 해설을 절별로 간추려 우리말로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본문은 개역개정.
Claude 정리 · 원문 대조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