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무엇으로 전해지며, 누가 그것을 참으로 깨달을 수 있는가?
- 바울은 화려한 언변이나 철학적 논증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을 평이하게 전했다.
- 성령이 듣는 이의 마음에 역사하셔야 믿음이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서게 된다.
- 복음은 영원 전에 정해졌으나 감추어져 있던 하나님의 지혜이며, 성령만이 그것을 계시하신다.
- 육에 속한 사람은 복음을 어리석게 여기지만, 신령한 사람은 성령으로 분별하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다.
1. 바울의 전도: 말의 지혜가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1~5절
바울은 화려한 말솜씨로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
당시 고린도 사람들은 품위를 넘어 화려하게 꾸민 수사적 언변을 높이 샀다. 그래서 복음 사역자도 거룩한 일을 그렇게 멋지게 말해야 한다고 여겼다. 귀를 즐겁게 하지 않는 바울을 깎아내리고 헐뜯었던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이 점을 거듭 강조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바울은 이미 1:17에서 십자가가 헛되지 않도록 말의 지혜로 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같은 것을 여기서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 2:4에서는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 4:19에서는 자기 능력과 언변을 자랑하는 교만한 자의 말이라고 부른다.
바울이 하나님의 증거, 곧 복음을 전할 때 쓴 방식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복음을 전하는 데는 미사여구나 탁월한 웅변이 필요하지 않았다.
- 하나님의 증거바울이 전한 복음 자체를 가리킨다.
-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청중의 귀를 즐겁게 하려고 화려하게 꾸민 수사적 언변이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알지 않기로 했다
두 가지로 읽을 수 있다. 첫째, 바울은 그리스도와 십자가 외에는 자기가 가진 어떤 지식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둘째, 고린도에 갈 때 학문이나 언어를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다른 주제는 아예 꺼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바울은 유대교의 율법과 의식과 전통을 알았고, 이방 시인과 철학자도 알았다. 그러나 복음을 전할 때는 그런 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은 복음의 신비를 풀어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하는 것뿐이었다.
이것이 그의 목적이었다. 그는 이 목적에 맞는 수단만 사용했다.
바울은 약하고 두려워 떨며 복음을 전했다
'약하고'에 대한 풀이는 여럿이다. 감탄을 자아내는 언변 대신 누구나 알아듣는 평이한 말을 썼다는 뜻일 수 있다. 천막을 만들며 생계를 꾸리던 낮고 가난한 처지를 가리킬 수도 있다(행 18:2-3, 행 20:34). 몸이 약했다는 뜻이거나, 스스로 낮춘 겸손이 세상 눈에 나약함으로 비쳤다는 뜻일 수도 있다.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다'는 유대인에게서 오는 위험 때문일 수 있다. 또는 맡은 전도의 무게를 알기에, 사람들이 복음의 은혜를 받지 않을까 염려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요점은 이것이다. 가난하고 말솜씨도 변변찮고 떨면서 전한 바울은 자기 자질만 보면 멸시받을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고린도에서 일어난 복음의 열매는 모두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설득의 기술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내 말'과 '내 전도함'은 같은 것을 달리 표현한 말일 수 있다. 또는 사적인 대화와 공적인 설교를 구분한 말일 수도 있다. 사람을 설득하는 인간의 기술은 두 가지다. 감정에 호소하는 수사학, 그리고 자연적 원리에서 결론을 끌어내는 논리학이다. 바울은 어느 쪽에도 기대지 않았다.
어떤 가톨릭 학자는 사도 시대에는 평이한 말이 하나님의 뜻이었으나 지금은 다르다고 말했다. 풀은 이를 반박한다. 그 주장은 하나님의 뜻을 피해 가는 것이다. 또 수사와 논증은 그때도 흔한 설득 방식이었다. 오늘날에도 그것이 통하는 대상은 교육받은 소수뿐이다. 무엇보다 바울이 댄 이유, 곧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서지 않게 하려 함은 지금도 유효하다.
그렇다고 준비 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하라는 뜻은 아니다. 무엇을 전할지 고민하는 일과 단어를 꾸미는 일은 다르다. 품위 있는 말을 고르는 일과 거창하게 보이려는 일도 다르다. 말은 모두가 알아듣기 쉽고 품위 있어야 한다. 이성도 써야 한다. 다만 자연·철학의 원리가 아니라 계시의 원리에서, 영적인 것을 영적인 것과 견주어 결론을 끌어내야 한다. 자연 원리로만 따지면 삼위일체와 부활은 부정될 수밖에 없다. 이성은 계시로 먼저 확증된 것을 돕는 보조 수단일 뿐이다.
'성령의 나타나심'을 그로티우스는 복음을 확증한 이적으로 본다. 보르스티우스와 많은 해석자는 성령이 마음에 강하게 역사해 말씀이 참되다고 깨닫게 하시는 일로 본다. 풀은 뒤쪽을 따른다. 바리새인들은 그리스도의 이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능력'도 이적의 능력보다 말씀이 양심을 찌르는 힘으로 보는 편이 낫다. 이 힘은 지금도 충성된 사역자에게 임한다. 다만 구원받는 자들에게만 그렇게 역사한다.
- 성령의 나타나심성령이 마음에 역사해 복음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확신시키는 일이다.
- 능력전해진 말씀이 듣는 이의 마음과 양심에 미치는 힘이다.
믿음이 사람의 지혜가 아닌 하나님의 능력에 서도록
믿음이란 누군가 말한 것에 동의하는 것이다. 사람에게서 나온 말을 믿으면 그것은 인간적 믿음이다. 하나님이 계시하셨기에 믿으면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믿음이다. 그러므로 신적 믿음은 사람의 지혜로 생길 수 없다.
감각이나 타고난 이성, 거기서 끌어낸 결론에 근거해 복음에 동의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식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한 믿음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사람들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기대지 않게 하는 데 가장 마음을 써야 한다. 성경으로 증명되지 않는 것을 전하면 쓸모없다. 그것은 설교자 자기 권위로 믿으라고 하는 것이다. 아테네 철학자가 자연의 원리를 늘어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믿음본래 누가 말한 것에 동의함을 뜻한다. 하나님의 계시에 근거할 때 신적 믿음이 된다.
2. 성령이 사도들에게 계시하신 하나님의 감추어진 지혜6~13절
온전한 자들에게는 참된 지혜를 말한다
바울은 앞의 말이 지혜 자체를 깎아내리는 말로 오해되기를 원치 않았다. 그렇게 되면 복음이 어리석다는 비난이 옳은 것처럼 보일 것이다. 그래서 그는 사도들이 전한 것이 온전한 자들에게는 지혜로 보인다고 해명한다.
여기서 '온전한 자들'은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온전한 사람이다. 곧 단련된 감각으로 선악을 분별하는 자, 참된 지혜를 알아보는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다(히 5:14).
지혜란 최고의 목적을 위해 최고의 수단을 쓰게 하는 것이다. 영혼 구원이 최고의 목적이고, 복음의 가르침이 최고의 수단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가장 순수하고 높은 지혜다.
이 지혜는 철학자, 세상의 영리한 자, 정치가가 말하는 지혜가 아니다. 그들의 지혜는 영혼 구원에 아무 소용이 없고, 결국 모두 사라진다.
- 온전한 자들상대적으로 성숙하여 참된 지혜를 분별할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 지혜최고의 목적을 이루려고 최고의 수단을 쓰게 하는 특질이다.
복음은 영원 전에 정해졌으나 감추어졌던 지혜다
복음 안에는 믿음으로 받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롬 1:17). 사람은 이 의를 믿음으로 붙잡을 때에만 마지막 심판 때 하나님 앞에 받아들여진다. 복음은 많은 사람에게 감추어진 거룩한 신비다. 동시에 인간의 최고 목적에 이르는 최고의 수단을 주는 하나님의 지혜다.
하나님은 사람이 구원받을 길로 복음을 창세 전부터 정해 두셨다. 그것은 우리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그 뒤를 이어 사역자들이 온 세상에 전하게 하시기까지, 이 복음은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
- 감추어진 지혜영원 전에 정해졌으나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전하기까지 숨겨져 있던 복음이다.
통치자들은 몰랐기에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가야바든 빌라도든,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이 세대의 통치자 누구도 이 지혜를 듣기는 했으나 깨닫지 못했다. 그들이 이 지혜를 알고 믿었다면, 그 지혜의 중심이요 원천이신 분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영광의 주'이신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신성으로는 영원히 찬송받으실 하나님이시다. 중보자로서는 믿는 자들이 받을 영광의 근원이시다.
그러나 이 무지는 변명이 되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를 알아볼 방편이 충분히 주어져 있었다. 그들이 알아보지 못한 것은 피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스스로 원하고 즐겨 택한 결과였다.
- 영광의 주신성으로 찬송받으실 하나님이시며, 믿는 자가 받을 영광의 원천인 중보자이신 그리스도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은 감각과 이성으로 알 수 없다
모든 해석자는 이 인용이 사 64:4에서 왔다는 데 동의한다. 성경 기자들은 구약을 글자 그대로보다 뜻을 살려 인용하는 일이 흔하다. 그러므로 바울이 외경에서 가져왔다는 주장은 헛되다.
가장 큰 차이는 이것이다. 이사야는 '앙망하는 자', 바울은 '사랑하는 자'라고 했다. 그러나 앙망함은 사랑의 열매이므로 뜻은 같다.
이사야의 이 부분은 그리스도를 다룬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것은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는 모든 은택이다. 하나님이 독생자를 주어 우리 본성을 입히시고 십자가에서 죽게 하실 것을 사람의 눈과 귀와 이성은 결코 짐작할 수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순종하시리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하나님은 성령으로 우리의 지각을 여셨다. 그리하여 성경과 그 안의 그리스도에 관한 모형과 예언,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인격과 직분에 대해 말한 것을 깨닫게 하셨다.
성령은 삼위일체의 제3위로서 성부·성자와 동등하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모든 계획, 곧 그리스도에 관해 사람이 알기를 원하시는 모든 것을 계시하실 수 있다.
하나님의 깊은 것을 살피고 계시하여 사람이 깨닫고 믿게 하시므로, 이 절은 성령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보여 주는 본문이다.
- 하나님의 깊은 것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계획과 신비다. 성령의 계시 없이는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영만 아신다
사람의 속생각과 계획은 그 사람 안의 영만 안다. 남은 그가 입으로 말해 준 만큼만 알 수 있다. 말하지 않은 생각까지 아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일도 그렇다. 사람은 하나님이 말씀에서 분명히 드러내신 것만 알 수 있다. 성경에는 성령이 밝혀 주시기 전까지 사람이 깨닫지 못한 깊은 신비가 있다. 그것을 다 헤아리시는 성령 외에는 아무도 그 신비를 알 수 없다.
하나님의 영을 받아 은혜로 주신 것을 안다
'세상의 영'을 어떤 이들은 세상적이고 육신적인 사람을 지배하는 악한 영, 곧 마귀로 본다. 다른 이들은 세상일을 알게 하는 인간의 영으로 본다.
어느 쪽이든 요점은 이것이다. 사도들은 세상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성령의 가르침을 받은 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 곧 하나님의 신비와 은택,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또 우리 안에서 하신 일을 알게 되었다.
- 세상의 영마귀로 보는 견해와 세상일을 아는 인간의 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성령이 가르치신 말로 영적인 것을 전한다
이성과 경험이 가르치듯, 말이나 글은 주제에 맞는 문체로 해야 한다. 바울이 다룬 주제는 지극히 높고 영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웅변가의 화려한 말이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하지 않았다(고전 2:1, 4). 성령이 성경을 통해, 사도들의 경우에는 마음의 감화를 통해 가르치신 말로 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는 영적인 내용을 영적인 언어로 풀어 영적인 사람이 깨닫게 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듯 말하라는 권면과 같다(벧전 4:11). 바울은 꾸밈없이 평이하고 친숙한 말로 진리를 있는 그대로 전했다. 웅변가처럼 열변을 토하거나 아테네 철학자처럼 논증을 펴지 않았다.
3. 자연인은 멸시하나 신령한 자는 분별하는 복음14~16절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어리석게 여긴다
'육에 속한 사람'(프쉬키코스 안트로포스, 흠정역은 '자연적인 사람')이 누구냐를 두고 논란이 크다. 어떤 이들은 타고난 혼의 지배를 받아 정욕과 부패의 종이 된 육신적인 사람으로 본다. 고전 15:44의 '육의 몸'과 '영의 몸' 대비를 근거로 든다. 다른 이들은 젖을 먹어야 하는 믿음이 어린 신자로 본다(고전 3:4 참고).
풀은 이 말이 온전하지도 영적이지도 않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고 본다. 곧 성령으로 하나님의 깊은 것을 계시받지 못하고(10절), 세상의 영만 받아 은혜로 주신 것을 모르는 모든 자들이다(12절).
이런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마음이 세상 지식과 지혜로 꽉 차 있다. 그래서 계시로만 알 수 있는 하나님의 신비를 귀로 들어도 마음으로 받아 믿지 못한다. 감각과 이성으로 헤아려지지 않으니 어리석다고 여긴다.
성령의 일은 하나님의 영이 비추시는 영적 빛 안에서만 분별된다. 지혜와 계시의 영이신 성령이 마음의 눈을 밝혀 주셔야 알 수 있다(엡 1:17-19). 바울은 여기서 8절에 말한 통치자들의 무지의 이유를 밝힌다.
- 프쉬키코스 안트로포스'육에 속한 사람', 곧 성령의 계시를 받지 못한 자연인이다.
신령한 자는 분별하되 누구에게도 판단받지 않는다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는 앞 절의 육에 속한 사람과 반대되는 말이다. 성령의 가르침을 받고 구원에 이르게 하는 특별한 빛을 받은 사람이다. 그가 '모든 것을 판단한다'는 말은 영생과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신비를 분별한다는 뜻이다. 다만 분별의 정도는 각 사람이 성령께 받은 빛의 분량에 따라 다르다.
'아무에게도'는 '아무것에 대해서도'로 옮길 수 있다. '판단하다'는 행 4:9, 12:19, 17:11, 24:8의 용례처럼 심문하다, 샅샅이 살피다, 정죄하다로 옮길 수도 있다.
신령한 사람이 고백하는 진리는 오직 하나님과 그 말씀에 기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의 권위나 이성의 명령 아래 놓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영적인 일에서 그는 누구에게도, 무엇에 의해서도 판단받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자기'를 성령으로 보아 성령이 판단받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한다. 풀은 이 해석이 훨씬 억지스럽다고 본다.
- 프뉴마티코스'신령한 자', 곧 성령의 가르침과 구원의 빛을 받은 사람이다.
- 판단하다심문하다, 살피다, 정죄하다의 뜻으로도 쓰인다.
자연인은 주의 마음을 모르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이 있다
이 물음은 사 40:13에서 온 것이다. 바울은 롬 11:34에서도 이 구절을 인용했다. 여기서 뜻은 이렇다. 성령의 가르침이나 빛을 받은 적 없는 자연인이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은밀한 계획과 신비를 어떻게 알겠는가. 그런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쳐 줄 수 있는 이도 없다.
어떤 이들은 '가르치다'로 옮긴 쉼비바세이가 논증으로 남에게 자기 생각을 알리고 동의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고 지적한다. 이것도 일종의 가르침이다.
반면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주어져 우리 안에 거하며 역사하고 가르치신다. 그리스도의 영은 그리스도의 생각을 아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드러내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
- 쉼비바세이논증을 통해 남이 자기 생각을 알고 동의하게 하다라는 뜻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 그리스도의 마음우리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의 영이 알려 주시는 그리스도의 생각이다.
복습 문제
풀은 4절의 '성령의 나타나심'을 이적으로 보는 견해를 왜 받아들이지 않는가?
풀은 복음이 왜 최고의 지혜라고 말하는가(6절)?
14절의 '육에 속한 사람'을 풀은 누구로 보는가?
매튜 풀 『청교도성경주석: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박문재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의 고린도전서 2장 해설을 절별로 간추려 우리말로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본문은 개역개정.
Claude 정리 · 원문 대조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