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리탄
고린도전서 주석 · 매튜 풀

9장 복음을 위해 권리를 내려놓다

매튜 풀 『청교도성경주석: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박문재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 고린도전서 9장 1~2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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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기

그리스도인에게 정당한 자유와 권리가 있는데도, 왜 그것을 다 쓰지 말아야 하는가?

  • 바울은 주를 보았고 고린도 교회라는 열매가 있으므로 참 사도다.
  • 복음 사역자는 사람의 이치와 율법과 주의 명령에 따라 부양받을 권리가 있다.
  • 바울은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그 권리를 쓰지 않고, 값없이 전하는 것을 자랑으로 삼았다.
  •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 사람을 얻고, 경주자처럼 절제하며 자기 몸을 쳐 복종시켰다.

1.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다1~2절

1내가 자유인이 아니냐 사도가 아니냐 예수 우리 주를 보지 못하였느냐 주 안에서 행한 나의 일이 너희가 아니냐

바울은 자유인이자 주를 본 사도다

앞 장에서 우상 제물 문제를 다룬 바울은, 이 장에서 그것을 일반 원리로 넓힌다. 자유가 있어도 다른 신자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쓰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를 자기 본으로 설명한다. 그는 세 가지 자유를 쓰지 않았다. 먹고 마시는 일, 결혼, 교회에 부양을 요구하는 일이다.

자유인이 아니냐는 물음은 이런 뜻이다. 하나님의 법이 너희에게 허락한 자유는 내게도 똑같이 있다. 하나님이 너희에게만 따로 더 주신 자유는 없다.

바울은 부활하신 주를 여러 번 보았다. 다메섹 길에서, 삼층천에 이끌려 갔을 때, 감옥에서 보았다. 성경 기록으로 보면, 승천 후에 나타나신 그리스도를 본 사도는 바울 하나뿐이다.

고린도 교회 자체가 바울의 일이다. 그들의 믿음을 일으킨 근본 원인은 주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도구로 쓰셨다. 그러니 그 열매를 본 고린도 교인들은 그의 사도직을 부인할 수 없다.

함께 볼 말씀행 9:5 · 행 22:13-14 · 고후 12:2-4 · 행 23:11
2다른 사람들에게는 내가 사도가 아닐지라도 너희에게는 사도이니 나의 사도 됨을 주 안에서 인친 것이 너희라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 사도직의 인이다

다른 이들이 바울을 어떻게 보든, 고린도 교인들에게 바울은 그들의 영혼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도다.

사람은 자기 글에 도장을 찍어 자기 것임을 확증한다. 마찬가지로 고린도 교인들에게 나타난 열매가 바울의 사도직을 확증한다. 하나님이 보내지 않으셨다면 그들이 우상숭배와 방탕을 떠나 참 믿음과 거룩한 삶으로 돌아오는 일이 어떻게 일어났겠는가. 사역자가 보내심을 받았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는 그의 전도로 사람들이 회개하는 것이다.

그러나 열매가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참 사역자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영적인 씨앗은 한동안 땅속에 있으면서 마음을 서서히 바꾼다. 또 이사야의 경우처럼,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려고 사역자를 보내기도 하신다.

공공연한 악인이 회심의 도구로 쓰인 적이 있느냐고 의심하는 이들도 있다. 풀은 가룟 유다가 전혀 쓰임받지 않았다고 성급히 단정할 수 없다고 본다. 유다는 ‘멸망의 자식’이었지만, 추악한 죄는 마지막에 가서야 저질렀기 때문이다.

  • 인(印)자기 것임을 확증하는 도장. 고린도 교회의 회심이 바울 사도직을 확증한다.
함께 볼 말씀요 17:12

2. 교회로부터 부양받을 권리가 있다3~14절

3나를 비판하는 자들에게 변명할 것이 이것이니

비판하는 자들에게 주는 바울의 대답

이 절은 두 방향으로 읽어야 한다. 앞 내용과 이어 읽으면 이렇다. 사도직을 의심하는 자들에게 주는 대답은, 내가 주를 보았고 너희가 내 사도직의 인이라는 것이다.

뒤 내용과 이어 읽으면 이렇다. 남에게 가르친 대로 나 자신도 남의 유익을 위해 자유를 포기했느냐고 따지는 자들에게, 이제부터 하는 말이 내 대답이다.

4우리가 먹고 마실 권리가 없겠느냐

우리에게도 먹고 마실 권리가 있다

한 가지 읽기는 이렇다. 나도 너희처럼 우상 제물을 먹을 자유와 지식이 있다. 몰라서가 아니라, 그 자유를 포기하고 먹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대다수 해석자는 다르게 본다. 바울이 여기서 짧게 말하고 뒤에서 자세히 풀어 간다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뜻은 이렇다. 나도 너희에게 나를 부양해 먹고 마시게 해 달라고 요구할 권리가 있지 않느냐.

5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리가 없겠느냐

나도 믿는 아내를 둘 권리가 있다

어떤 이들은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자기 재물로 사도를 섬긴 여자로 본다. 누가복음 8장의 여인들 같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풀은 이 해석을 여섯 가지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첫째, 바울은 교회에 짐이 되지 않으려고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후원하는 여자라면 오히려 교회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니 문맥이 맞지 않는다. 둘째, ‘데리고 다닌다’는 말은 부부로 함께 다닌다는 뜻이다. 셋째, 그런 여자라면 ‘믿음의 자매’라는 말을 덧붙일 필요가 없다. 넷째, 아내가 아닌 여자를 데리고 다녔다면 오히려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다섯째, 이 표현은 남자 신자를 ‘형제 된 남자’라 부르는 말과 짝을 이룬다. 여섯째, 그런 여자들이 여러 사도와 주의 형제들을 섬겼다는 기록이 신약에 없다. 그러므로 흠정역 번역이 옳다. 이 절의 뜻은 ‘나라고 결혼할 권리가 없겠느냐’이다.

이 절은 두 가지를 가르친다. 그리스도인의 아내는 주 안에서 자매, 곧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 또 남편과 아내는 떨어져 지내지 말고 함께 다녀야 한다.

게바(베드로)와 주의 형제들처럼 결혼한 사도들이 있었다. 그러므로 사역자의 결혼은 정당하다. 하나님의 법은 사역자에게 결혼과 관련해 더 엄한 제한을 두지 않았다. 혼인을 금하는 교황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바울은 귀신의 가르침이라 부른다.

  • 아델펜 귀나이카‘자매인 여자’. 풀은 믿는 아내로 번역한 흠정역이 옳다고 본다.
함께 볼 말씀눅 8:3 · 행 23:1 · 딤전 4:1-3
6어찌 나와 바나바만 일하지 아니할 권리가 없겠느냐

왜 바울과 바나바만 손수 일해야 하나

사도들 가운데 왜 우리 둘만 손으로 일해 생계를 꾸려야 하느냐는 물음이다. 바울은 아굴라 부부와 함께 천막을 만들며 살았다.

형제들 사정을 생각하지 않고 자유를 다 쓰려 했다면, 다른 사도들처럼 섬기는 곳의 신자들에게 부양받는 것이 마땅했을 것이다.

함께 볼 말씀행 18:2-3
7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군인·농부·목자도 수고한 데서 먹는다

복음 사역은 전쟁이다. 초대 사역자들이 유대인과 이방인에게서 받은 반대는 후대 누구보다 컸다. 그들은 전쟁터에 나가는 심정으로 섬겼다. 징집된 군인이 자기 돈으로 군복무를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성경은 교회를 포도원에 비유한다. 포도나무는 하나님의 것이지만, 하나님은 사역자의 손을 빌려 심으신다. 포도를 심고 열매를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일꾼을 부리면서 먹을 것을 주지 않는 사람도 없다.

교회는 양 떼에도 비유된다. 양 떼를 치는 자는 그 젖을 먹기를 기대한다. 이 잘 알려진 세 예는, 사역자가 수고한 곳에서 먹고 입는 것이 당연한 이치임을 보여 준다.

함께 볼 말씀사 5:1-2
8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사람의 이치만이 아니라 율법도 말한다

바울은 틀릴 수 있는 사람의 생각이나 흔한 예에만 기대어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말은 본성의 빛과 본성의 법에 맞는다. 그뿐 아니라 가장 높은 이치인 하나님의 뜻에도 맞는다.

9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소를 돌보시는 하나님은 사역자를 더 돌보신다

옛날 유대와 헬라에서는 소에게 곡식을 밟게 해서 타작했다. 풀의 시대에도 프랑스 일부 지역에서는 그렇게 했다고 한다. 탐욕스러운 자들은 소가 곡식을 먹지 못하게 입에 망을 씌웠다. 하나님은 이를 잔인한 일로 보시고 율법으로 금하셨다.

‘하나님께서 소를 염려하심이냐’는 말은 이런 뜻이다. 하나님이 소도 이렇게 염려하신다면, 사람과 자기 사역자들은 얼마나 더 염려하시겠느냐. 주님은 참새와 들풀까지 돌보신다고 가르치셨다. 그렇다면 소는 더욱 돌보신다. 그리고 하나님을 직접 섬기는 사람들은 그보다 더 돌보신다.

함께 볼 말씀신 25:4
10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그 율법의 이치는 일꾼에게 더 들어맞는다

신명기 25:4는 본래 사역자 부양을 정한 법이 아니다. 문자적으로는 일하는 짐승을 잔인하게 다루지 말라는 명령이다. 타작하는 소는 그동안 다른 것을 먹을 수 없으니, 곡식을 얼마쯤 먹게 하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 이치가 일하는 사람, 특히 영혼을 위해 수고하는 사람에게 더욱 적용된다고 말한다.

남의 밭을 가는 사람은 품삯으로 떡을 사리라는 소망을 품고 밭을 간다. 타작하는 사람은 곡식 얼마를 가져가리라는 소망을 품고 일한다. 사역자도 같다. 사역자는 주의 지시와 힘을 받아 사람들의 마음 밭을 갈고 의의 씨를 뿌린다. 또 권면으로 맺힌 선한 일의 곡식을 거두어 하나님께 드린다. 그러니 이 일로 먹고 입을 것을 얻으리라는 소망을 품는 것이 마땅하다.

함께 볼 말씀신 25:4
11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신령한 것을 주고 육적인 것을 받음은 정당

신령한 것은 복음의 가르침과 성례를 말한다. 이것들은 하늘에서 와서 마음을 감화한다. 사람을 신령하게 만들어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시킨다.

육적인 것은 몸에만 도움이 되는 것들이다. 신령한 것은 비교할 수 없이 귀하다. 그러니 사역자가 그 대가로 먹고 입을 것을 받는 것은 결코 과하지 않다. 오히려 훨씬 귀한 것을 주고 훨씬 하찮은 것을 받는 셈이다.

  • 신령한 것하늘에서 와서 사람을 천국에 합당하게 만드는 복음의 가르침과 성례
  • 육적인 것몸에만 도움이 되는 먹을 것, 입을 것
12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권리가 있으나 복음에 장애가 없도록 참았다

고린도에 들어온 거짓 사도와 교사들은 이 권리를 내세워 부양을 요구한 듯하다. 바울은 그들에게 그런 권리가 있다면 우리에게는 더욱 있지 않느냐고 묻는다.

고린도 교인들은 이렇게 반박할 수 있었다. 그 교사들은 늘 우리와 함께 있지만, 당신은 그렇지 않다. 풀은 이 대답을 제시한다. 초대 교회는 한곳에 정착한 사역자만이 아니라, 여러 교회를 돌며 섬기는 사역자도 부양할 의무가 있었다. 오늘의 신자도 먼저 자기 담임 사역자를 부양해야 한다. 나아가 자기에게 유익을 끼쳤거나 교회의 다른 곳에서 수고하는 사역자도 힘닿는 대로 도와야 한다.

그런데도 바울과 바나바는 이 권리를 쓰지 않았다. 굶주림과 목마름, 손수 일하는 수고를 견뎠다. 부양이 부담스러워 복음을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 생기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또 탐욕스럽다는 비난의 빌미를 주지 않으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복음의 진보를 막지 않으려 했다.

13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구약의 레위인도 성전과 제단으로 살았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보면, 신약에서의 뜻도 알 수 있다. 레위 지파는 하나님의 일을 맡았기에 따로 기업이 없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그들의 기업으로 주셨고, 여호와의 화제물을 먹게 하셨다.

그래서 레위인은 다른 지파처럼 자기 손으로 수고해 떡을 얻을 필요가 없었다.

함께 볼 말씀민 18:21 · 신 18:1 · 신 10:9
14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주께서 복음 전하는 자가 복음으로 살게 하셨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뜻은 구약과 신약에서 같다. 사역자 부양은 성도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이 아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규례로서 반드시 행해야 하는 일이다.

세상일을 떠나 복음을 연구하고 전하는 데 전념하는 사람은 바로 그 일로 생계를 유지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3. 복음의 진보를 위해 권리를 포기하다15~18절

15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차라리 죽을지언정 이 자랑을 잃지 않겠다

바울에게는 결혼할 권리도, 부양을 요구할 권리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어느 것도 쓰지 않았다. 지금 이 글을 쓰는 것도 이제라도 부양을 받아내려는 것이 아니다.

그를 이득을 노리는 사람으로 헐뜯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자기 손으로 자신과 동행들의 필요를 채웠다. 값없이 전하는 이것을 큰 자랑으로 여겼기에, 그 자랑을 잃느니 차라리 굶어 죽는 편을 택하겠다고 말한다.

여기서 적용이 나온다. 바울이 너희 유익과 복음을 위해 자기 권리를 쓰지 않았다. 그렇다면 너희도 약한 형제가 너희 자유 때문에 죄짓고 망하지 않도록 자유를 내려놓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함께 볼 말씀행 20:33-34
16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복음 전파는 부득불 할 일, 안 하면 화

복음을 전하는 것 자체는 자랑거리가 아니다. 주의 종으로서 당연히 할 일이기 때문이다. 바울의 자랑은 거짓 교사들과 달리 복음을 값없이 전한다는 데 있다.

하나님이 명령하셨으니, 전하지 않으면 명령을 어기는 것이다. 그러면 무서운 벌과 화를 받는다. 그래서 복음 전파는 ‘부득불 할 일’이다.

어떤 이들은 오늘의 사역자도 같은 처지인지 의심한다. 풀은 의심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부모 공경 명령을 어기면 벌을 받듯, 전하라는 명령 아래 있는 사역자도 그렇다. 이를 부정하면 그 명령이 사도에게만 주어졌고 지금은 참 사역자가 없다고 말해야 한다. 실제로 소키누스주의자들이 그렇게 말한다. 온 세상을 다니며 전하라는 명령은 사도에게 특별히 주어졌다. 대부분의 사역자는 특정한 양 무리를 맡는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라는 명령 자체는 모든 사역자에게 있다. 그래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도자의 일을 하라고 했다.

성경은 전할 장소를 정해 두지 않았다. 청중의 형편에 따라 지혜롭게 정하도록 맡겼다. 사도들은 주인의 허락 없이 남의 처소에서 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두란노 서원이나 자기 셋집에서 가르쳤다. 부르심과 힘과 기회와 지혜를 받고도 전하지 않는 사역자에게는 화가 있다.

함께 볼 말씀딤후 4:5 · 행 19:9 · 행 28:30-31
17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자원해서 하면 상, 아니어도 사명은 받았다

바울에게는 부양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기꺼이 값없이 전한다면 상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자원하든 아니든, 그는 이미 사명을 받았기에 전할 수밖에 없다.

취지는 이렇다. 윗사람이 명령했고 안 하면 벌을 받는 일이라면, 해냈다고 감사나 큰 상을 기대할 이유가 없다. 바울은 복음 전파로 어떤 상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밝힌다. 만일 하나님이 상을 주신다면 그것은 오직 은혜라고 선언한다.

‘자의로’(헤콘)는 ‘타의로’(아콘)의 반대말이다. 풀은 여기에 값없이 전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본다. 값없이 전하는 것은 명령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을 자랑으로 삼을 수 있었다. 이것은 대가를 받고 전하는 자들보다 더 큰 상을 기대할 근거가 되었다.

  • 헤콘‘자의로, 기꺼이’. 반대말은 ‘타의로’를 뜻하는 아콘.
18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내 상은 값없이 전하고 권리를 남용 않는 것

복음 전파 자체는 부득불 할 일이니 상이나 자랑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상과 자랑의 근거는 값없이 전하는 데 있다.

그렇다고 이것이 바울의 공로가 되는 것도 아니다. 사역자가 신자의 도움이 필요하면 부양받는 것이 정당하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서는 값없이 전하는 것이 사역자의 의무다. 신자들이 가난하고 사역자가 스스로 생계를 꾸릴 수 있을 때가 그렇다. 부양받으면 원수들의 비방으로 복음이 막힐 때도 그렇다. 그런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충분히 부양받는 것이 합당하다.

‘다 쓰지 아니한다’는 말을 어떤 이들은 고린도전서 7:31과 같은 뜻으로 본다. 풀은 이 말의 통상적인 뜻이 ‘남용하다’라며 흠정역을 따른다. 여기서 교훈이 나온다. 하나님이 주신 자유는 그분의 영광과 이웃의 유익을 위해 쓰라고 주신 것이다. 그것을 가리고 해치면서 자유를 쓴다면 그것은 남용이다.

  • 남용하다‘다 쓰다’로 번역된 말의 통상적 뜻. 영광과 유익을 해치며 자유를 쓰는 것.
함께 볼 말씀고전 7:31

4. 자유롭지만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다19~23절

19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자유롭지만 사람을 얻으려 모두의 종이 되었다

‘모든 사람’의 ‘사람’은 헬라어 본문에 없다. 번역자들이 뜻을 살리려고 보충한 말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예식법 같은 ‘모든 것’으로 읽는다. 풀은 사람과 일 둘 다로 읽을 수 있다고 본다. 바울은 누구의 종으로 태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법으로 종이 된 것도 아니다. 교회에 부양을 받지도 않았으니 여러 면에서 자유로웠다.

‘사람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을 회심시켜 천국 길에 들어서게 하는 것이다. 다니엘서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사람을 얻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이득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정욕과 부패의 종이 되는 것은 사람을 얻는 길이 아니다. 오히려 영혼을 망치는 길이다. 바울이 된 종은 죄가 아닌 연약함을 받아 주는 종이다. 그는 자기 권리를 쓰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더 사랑하게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하며 섬겼다.

  • 사람을 얻다사람을 회심시켜 복음을 받고 천국 길에 들어서게 하는 것
함께 볼 말씀단 12:3
20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유대인을 얻으려 율법 아래 있는 자처럼 되었다

예식법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 그래서 주의 죽으심 이후 그리스도인은 예식법을 지킬 의무가 없다. 그러나 유대인 신자들은 여전히 율법 아래 있고자 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이 자유를 확신하기까지 한동안 예식법을 지키도록 허락하셨다.

바울은 예식법에서 자유로웠다. 그래도 유대인을 그리스도께 돌아오게 하려고, 또 이미 믿은 유대인의 유익을 위해 그들의 예식을 지켰다. 서원한 네 사람과 함께 결례를 행한 일이 그 예다. 또 그 지역 유대인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어머니가 유대인인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했다.

이 모든 일에서 바울은 죄를 짓지 않았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사람을 얻는 데 가장 유익한 쪽을 골랐을 뿐이다.

함께 볼 말씀엡 2:15-16 · 갈 4:21 · 행 21:23-26 · 행 16:3
21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이방인을 얻으려 율법 없는 자처럼 되었다

‘율법 없는 자’는 앞 절의 ‘율법 아래 있는 자’와 반대다. 곧 예식법이나 소송법을 지킬 의무가 없던 이방인을 가리킨다. 예식법은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 유대인 예배의 지침이었다. 소송법은 범죄와 분쟁을 다루는 지침이었다.

‘아노모이’는 보통 하나님과 사람의 법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사는 자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유대인에게 주신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는 사람을 뜻한다. 바울이 바로 이어 자신은 하나님께 율법 없는 자가 아니라고 밝히는 데서 그 뜻이 분명해진다.

바울은 이방인을 대할 때 그들처럼 레위기의 예식법과 소송법을 지키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 자체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그 율법 아래 있었다. 다만 하나님이 자유에 맡기신 일에서만 권리를 고집하지 않았다. 그리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얻는 데 더 도움이 되는 쪽으로 행했다.

  • 아노모이‘율법 없는 자들’. 여기서는 불법한 자가 아니라 유대 율법의 의무가 없는 이방인.
함께 볼 말씀막 15:28 · 딤전 1:9
22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 여러 모습이 되었다

약한 자는 지식과 믿음이 약한 사람이다. 그들은 할례나 결례 같은 예식법에서 자유롭다는 확신이 없다. 바울은 예식법을 지키지 않아도 죄가 아님을 알았다. 그러나 그들은 지키지 않으면 죄라고 믿었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의 양심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자유를 누리는 쪽을 버렸다. 그들이 믿는 대로 예식을 지켜 주었다. 그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였다.

신자마다 지식과 믿음의 정도가 다르다. 바울은 각 사람의 구원에 도움이 되도록 그 수준에 맞춰 처신했다. 그렇다고 죄 되는 일을 해서 비위를 맞춘 것은 아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일에서만, 구원에 조금이라도 유익하면 하고 유익하지 않으면 하지 않았다.

영적인 일에서 바울보다 뛰어난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그가 이렇게 낮아졌다는 데서 그의 놀라운 겸손과 사랑이 보인다. 그는 모두의 본이 되기에 충분하다.

  • 약한 자지식과 믿음이 약해 예식법에서 자유롭다는 확신이 없는 신자
23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복음을 위해, 복음에 함께 참여하려 함이다

바울이 이렇게 자기를 부인한 데는 두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영혼에 유익을 끼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영광이다. ‘복음을 위하여’는 12절의 ‘복음에 장애가 없게’와 같은 뜻이다.

바울이 자기 자유와 취향만 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원수의 비방을 부르고 약한 신자들의 마음을 멀어지게 했을 것이다. 약한 자는 그 일을 죄라고 믿으면서도 바울을 보고 담력을 얻어 양심을 거슬러 행했을 것이다. 결국 바울이 걸림돌을 놓은 셈이 되어 복음을 막았을 것이다.

‘복음에 참여한다’를 어떤 이들은 복음의 상에 참여하는 것으로 읽는다. 풀은 신자들과 함께 복음의 교제에 참여하는 것으로 읽는 편이 낫다고 본다. 바울은 교회의 가장 낮은 지체와도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하찮게 여기지 않았다. 주께서 형제라 부르신 이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여기서 그의 겸손이 드러난다.

  • 쉰코이노노스‘함께 참여하는 자’. 성도들과 더불어 복음에 참여하는 사람.
함께 볼 말씀고전 9:12

5. 썩을 관을 위해서도 절제하는 경주자들24~25절

24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바울은 천국에 이르는 일이 쉽지 않음을 일깨운다. 이 영적 경주에서 앞서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한 말을 힘써 실천하라고 재촉한다. 이를 위해 고린도 사람들이 늘 보던 달리기 경기에 빗댄다.

당시에는 올림피아, 피티아, 네메아, 이스트미아 같은 경기가 있었다. 이스트미아는 고린도 지협에서 열렸다. 달리기, 말 달리기, 격투기가 주 종목이었고 우승자는 관을 받았다. 옛 기록에 따르면 관은 결승점에 걸려 있어서, 먼저 도착한 한 사람만 차지했다.

관을 얻는 것은 천국에 이르는 것의 비유다. 주님도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셨다. 바울도 법대로 경기해야 관을 얻는다고 했다. ‘이와 같이 달리라’는 말은 그 자체로 합법적이거나 선한 일에 머무르지 말라는 뜻이다.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이웃의 영적 유익에 가장 좋은 일을 하도록 온 힘을 다하라는 것이다.

함께 볼 말씀눅 13:24 · 딤후 2:5
25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썩을 관을 위해서도 절제하는데 하물며

천국에 가려는 사람은 자유를 남용해 하나님을 욕되게 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기려고 다투는 선수처럼 모든 일에 절제해야 한다.

최고가 되려는 격투기 선수는 경기에 필요한 힘을 기르는 방식으로 먹고 마신다. 몸을 굼뜨게 하는 방식으로는 먹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도 천국에 이르는 데 가장 잘 맞도록 먹고 마시고 입고 행해야 한다.

선수들은 기껏해야 썩을 관을 위해서도 자기를 부인하고 절제한다. 우리에게는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않을 유업이 예비되어 있다. 그런데도 제멋대로 산다면 우리는 그 선수들보다 못하다. 그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것이다.

함께 볼 말씀벧전 1:4

6. 썩지 않을 관을 위해 달리고 싸우는 바울26~27절

26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향방 없이 달리지 않고 허공을 치지 않는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에게 가르친 것을 자신이 어떻게 실천하는지 보여 준다. 하인에게 밭일만 시키고 자기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는 주인은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않은 것이다. 강단에서 의무만 지시하고 스스로 행하지 않는 설교자도 그렇다. 사람들은 ‘의사여, 네 자신을 고치라’는 속담을 떠올리며 따르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과 같은 경주를 하며 같은 결승점과 상을 향해 달린다. 명령만 하고 뒷짐 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천국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쪽을 택한다. 또 그리스도의 군사로서 죄와 싸운다.

이 싸움은 매우 중요하다. 그래서 그는 바람에 돌을 던지거나 막대로 허공을 치듯 열매 없이 싸우지 않는다. 무작정 달리고 싸운다고 천국에 가까워지지 않는다. 결승점에 이를 때까지 온 힘으로 달려야 한다. 모든 죄와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싸워야 한다.

27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전파한 뒤 버림받지 않으려 몸을 쳐 복종시킨다

여기서 ‘몸’은 단지 육체나 거친 욕심만 가리키지 않는다. 바울이 다른 곳에서 ‘옛사람’이라 부른 것 전체를 가리킨다. 타락 이후 생긴 죄악 된 의지의 성향과 부패한 이성의 요구까지 포함한다. 성경은 이것을 ‘육’이나 ‘땅에 있는 지체’라고 부른다. 로마서에서는 ‘사망의 몸’이라 부른다.

바울은 두 단어를 쓴다. ‘휘포피아조’는 격투기에서 상대를 거의 죽을 만큼 쳐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다. ‘둘라고게오’는 종으로 삼아 무슨 명령이든 따르게 하는 것이다. 바울은 달음질과 싸움이 헛되지 않도록 이렇게 자기 ‘몸’을 죽이며 살았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금식이나 금욕 같은 외적 훈련으로만 본다. 풀은 이를 짧은 생각이라 한다. 그런 훈련은 좋은 수단일 수 있으나, 부패한 마음과 욕심을 죽이지는 못한다. 바울은 자기 의지와 이성의 요구가 하나님 뜻에 어긋날 때마다 하나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 목적에 도움이 되는 금식과 기도도 지혜롭게 사용했다.

평생 남에게 복음을 전하고도 끝내 자신은 버림받을 수 있다. 바울은 그렇게 생각했다. 주님은 주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권능을 행한 자들에게도 ‘나는 너희를 모른다’고 하시겠다고 하셨다. 복음을 전하던 유다도 멸망의 자식이 되었다. 그래서 크리소스토모스는 목회자 가운데 구원받을 자가 적다고 말했다. 겉으로는 먹고 입고 즐기는 데 자유를 마음껏 쓰고, 속으로는 죄악 된 생각에 빠진 사역자가 있다. 그는 천국과 반대 길을 가면서도 바울보다 더 큰 자유를 누린다고 착각한다.

  • 휘포피아조격투기에서 상대를 거의 죽을 만큼 쳐서 항복받는 것
  • 둘라고게오종으로 삼아 무슨 명령이든 따르게 하는 것
함께 볼 말씀골 3:5 · 롬 7:24 · 마 7:22-23 · 요 17:12

복습 문제

5절의 ‘믿음의 자매 된 아내’를 풀은 무엇으로 보며, 그 근거 하나는?
사도를 후원하는 여자가 아니라 믿는 아내다. 바울은 교회에 짐이 되지 않으려 데리고 다니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후원하는 여자라면 오히려 교회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니 문맥이 맞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절은 결혼할 권리를 말한다.
바울은 왜 부양받을 권리를 쓰지 않았는가?
부양이 부담스러워 복음을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 생기지 않게 하려 했다. 또 탐욕스럽다는 비난의 빌미를 막으려 했다. 그렇게 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려 했다(12절).
27절의 ‘몸’은 무엇을 가리키며, 외적 금욕만으로 충분하지 않은 이유는?
육체만이 아니라 옛사람 전체, 곧 죄악 된 의지의 성향과 부패한 이성의 요구까지 가리킨다. 금식 같은 훈련은 좋은 수단일 수 있다. 그러나 부패한 마음과 욕심을 죽이지는 못한다.

매튜 풀 『청교도성경주석: 고린도전후서·갈라디아서』 (박문재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의 고린도전서 9장 해설을 절별로 간추려 우리말로 다시 정리한 것입니다. 본문은 개역개정.
Claude 정리 · 원문 대조 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