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리탄
2부 삼위일체 하나님과 창조

8장 살아 계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

헤르만 바빙크 『개혁파 교의학』 (새물결플러스, 단권 축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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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기

하나님의 이름과 속성은 그분을 어떻게 드러내는가?

  • 성경이 주는 하나님의 이름들은 모두 구체적이다. 하나님은 계시하시는 그대로 존재하시며, 속성과 무관한 숨은 본질은 없다.
  • 하나님은 부분의 합성이 아니라 단순하시다. 하나님은 자신이 소유하신 바로 그것이시므로 모든 속성이 곧 본질이다. 속성이 여럿인 것은 하나님이 나뉘어서가 아니라 우리 이해가 유한하기 때문이다.
  • 사랑 하나만 뿌리로 삼으면(리츨) 공의와 거룩이 흐려진다. 그래서 출 3:14의 야웨와 맺어진 자존성에서 출발한다.
  • 고유한 이름의 계시는 엘로힘 → 엘 샤다이 → 야웨 → 야웨 체바오트 → 아버지 → 성부·성자·성령으로 깊어진다.
  • 개혁파는 비공유적 속성(자존·불변·영원·편재·단일)으로 범신론을, 공유적 속성(영·지식·지혜·진실·선·거룩·의·뜻·전능)으로 이신론을 막는다. 모든 완전의 총체이신 하나님은 안으로 복되시고 밖으로 영광 가운데 나타나신다.

1. 하나님의 이름들 원서 311–314쪽

  • 성경은 추상적 정의가 아니라 행하신 일 속에 드러난 덕(벧전 2:9)으로 하나님을 알린다. 어느 한 속성을 부각하려고 다른 속성을 깎지 않고 모든 덕을 동등하게 드러낸다.
  • 그래서 계시 밖에서 캐낼 숨은 본질은 없다. 하나님의 존재론적 실재와 경륜적 자기계시는 분리되지도 대립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계시하시는 그대로 존재하신다.
  1. 교회 초기하나님의 이름 아래 속성과 세 위격을 함께 다룸. 이어 근본 속성을 찾기 시작
  2. 필론 · 중세필론은 야웨를 ‘존재하는 분’(ὁ ὤν)과 연결, 기독교 신학이 이어받음. 둔스 스코투스는 ‘본질’을 하나님과 인간에게 같은 뜻으로 쓰며 무한/유한만 구분
  3. 17–18세기소키누스주의·아르미니우스주의·이신론: 형이상학을 버리고 하나님의 의지만 남김 → 차갑고 멀어진 도덕적 존재
  4. 반작용스피노자(무한하고 필연적인 실체), 괴테·레싱·헤르더·헤겔·슐라이어마허 → 범신론. 유신론자들(야코비·로테·로체 등)도 하나님의 인격을 ‘존재’가 아닌 ‘생성’으로 보는 치명적 양보
  5. 19세기 신학형이상학에서 등을 돌려 종교를 도덕으로 축소. 리츨: 하나님은 주님이나 왕이 아닌 아버지, 절대적 존재가 아닌 사랑일 뿐
신학의 과제리츨의 반향에도 가치는 있으나 편파적이다. 신학의 과제는 성경에 계시된 모든 속성을 공정하게 다루는 것이다.

2. 하나님의 단순성: 본질과 속성들 원서 314쪽

단순성(simplicity): 하나님은 여러 부분으로 합성되지 않으셨다. 하나님께 ‘존재한다’는 말은 곧 지혜롭다, 선하다, 능력 있다는 말과 같다. 어떤 속성도 덧붙은 부가물이 아니라 본질 자체다.

본질과 속성을 가른 오류 ✕

  • 플라톤: 관념들에 하나님과 별개의 독립 존재 부여
  • 필론: 신적 작용들을 각각 실체(hypostasis)로
  • 길베르투스 포레타누스: 신성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형상일 뿐 그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다

왜 위험한가

  • 본질과 속성이 각각 독립 실재처럼 되어 다신론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
  • 사랑 같은 속성이 무한성이나 능력보다 덜 절대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 단순성 교리는 존재가 곧 사랑이고 능력이므로 어느 하나도 추상 속에 사라지지 않게 한다.

(1) 본질·속성 구분과 자존성 원서 315–316쪽

  • 구분을 거부한 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모든 속성에서 순수한 존재이심을 가장 강하게 표현한 것이다.
  • 그래서 하나님은 정의될 수 없다. 정의는 유개념 안에서 종차로 구별하는 일인데, 하나님을 담을 유개념은 없다. 피조물과 공유하는 듯한 ‘존재성’조차 유비적으로만 이해된다.
  • 하나님은 이름이 없으시면서(anonymous) 동시에 이름이 많으시다(polyonymous). 다 열거할 수 없으니 선택해야 하는데, 한 속성을 근본으로 택하면 그것이 전체 묘사를 좌우한다.
  • 그래서 기독교 신학은 출 3:14 야웨와 연관된 자존성을 주된 속성으로 내세웠다. ‘절대적’은 내용 없는 추상이 아니라 “다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않는다”는 종교적 확신이다(사 44:6; 요 5:26; 롬 11:36).

(2) 속성의 다양성과 단순성 원서 317쪽

본질과 속성은 구분할 수 없지만 속성들끼리의 구별은 허용된다. 각 속성은 하나님에 관해 고유한 내용을 표현하기 때문이다. 다양성의 원인은 하나님 쪽의 합성이 아니라 유한한 피조물 쪽의 한계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빛

빛은 여러 색으로 나뉘어도 같은 빛이다.

마이모니데스의 불

불은 따뜻하게 하든 밝히든 태우든 그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영원히 동일하시고 우리의 관계가 다양하다. 하나님 안에서 거룩과 자비는 본질상 같다. 그러나 우리 이해에는 차이가 있다. 이 차이를 지우면 계시의 풍성함을, 하나님 안의 분열로 보면 단순성을 잃는다. 많은 이름은 결핍이 아니라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전달하는 통로다.

(3) 명명의 방법과 속성 분류 원서 319–322쪽

방법내용묶음
부정의 방법하나님이 무엇이 아닌지에서 출발부정의 신학 (apophatic)
탁월의 방법피조물의 완전함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려 돌림긍정의 신학 (kataphatic) — 둘은 사실 하나
인과율의 방법결과에서 원인이신 하나님께로 올라감
위 디오니시우스·다마스쿠스의 요한·에리우게나의 구분. 칸트~슐라이어마허는 아래에서 위로 가는 유비를 거부했다
  • 핵심: 인식의 순서와 존재의 순서를 혼동하지 말라. 실재에서는 하나님이 원형, 피조물이 모사다. 그러나 우리는 창조세계에 드러난 계시로만 알기에 지식은 유비적이고 간접적이지만 참되다.
  • 부정과 긍정은 서로 보완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불가해하며, 그렇기 때문에 알려질 수 있다고 고백한다.” 하나님은 모든 이름을 가지시며(panonymous) 아무 이름도 없으시다.

비공유적 속성

단일성·단순성·불변성·영원성 등. 초월성을 강조 → 범신론을 막는다.

공유적 속성

지성·의지·능력의 속성. 내재성을 강조 → 이신론을 막는다.

구분을 절대화하지 말 것이 구분이 하나님을 둘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주님’, ‘창조주’ 같은 상대적 이름도 하나님 안의 절대적인 것을 가리키고, 영원성 같은 부정적 속성도 긍정적 내용을 가진다. 각 속성은 어떤 의미에서 비공유적이고 어떤 의미에서 공유적이다.

3.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들 원서 324–325쪽

신적 존재를 가리키는 이름은 모든 언어에 있다(θεός, God/Gott, 天, 타엥그리, 아수라·아후라). 어원은 불확실하지만 흔히 ‘하늘’과 관련된다. 중요한 것은 어원이 아니라 모든 민족이 신에게 이름을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그 자체로 이름이 없으시지만 우리는 그분을 불러야 하고, 그러려면 이름 외에 다른 수단이 없다.

이름원서뜻드러내는 하나님
엘 · 엘로힘325–327쪽힘과 능력. 복수형은 장엄복수도 삼위일체 지시도 아닌 추상·수량·강조의 복수(능력의 충만)창조와 자연의 하나님, 세상과의 근원적 관계(절대적 초월)
엘룐 · 아도나이325–327쪽지극히 높으신 분(창 14:18) / 모든 사람을 종으로 삼는 통치자(창 18:27). ‘바알’은 우상 연상으로 사용 중지(호 2:16)엄밀한 고유명사가 아닌 셈족의 일반 이름. 하나님과 피조물의 관계를 부각
엘 샤다이325–327쪽아브라함과 언약을 할례로 인치실 때 주어짐(창 17:1). 신약 상응어 ‘전능하신 주’(고후 6:18)자연의 모든 힘을 은혜의 사역에 복종시키시는 전능자 → 능력이 공포가 아닌 위로의 원천
야웨327–329쪽“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 자존성이 바탕이나 전면에는 신실함약속에 신실하고 은혜에 변치 않는 언약의 하나님. 구약 최고의 계시, 하나님의 실제 이름
야웨 체바오트330–332쪽체바오트 = 보좌를 둘러싼 천사의 무리(전쟁·군대·별 해석은 용례를 설명 못함). 호전적 의미 없음천사에 둘러싸여 온 세상을 다스리는 영광의 왕
아버지 (Πατήρ)332–333쪽그리스도가 더하신 이름. 구약에서는 신정적 관계(사 63:16; 출 4:22), 신약에서는 그리스도를 통한 윤리적·인격적 관계하나님에 대한 최고의 계시. 신자는 자녀로 입양되고 성령으로 그것을 안다(롬 8:15)

(1) 야웨: 출애굽기 3:14와 6:3

  • 유대인은 이 네 글자 이름을 ‘영광스러운 이름’이라 높여 발음을 금했다(레 24:16; 출 3:15의 ‘영원한’을 같은 자음의 ‘감추다’로 읽음). 70인역은 ‘아도나이’로 읽어 퀴리오스(주)로 옮겼고 신약도 따랐다.
  • “나는 스스로 있는 자”는 자존성에 대한 추상적 설명이 아니라, 모세를 보내시는 분이 조상들에게 나타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라는 선언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모든 것이 되시고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사 41:4 “내가 곧 그니라”).
  • 출 6:3은 야웨라는 이름이 모세 이전에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창 15:7). 오랜 신실하심을 증명하신 뒤 그 이름의 의미를 처음 설명하신 사건이다. 그래서 야웨는 “애굽 땅에 있을 때부터”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다(호 12:9).

(2) 신약에서의 보존과 완성

엘·엘로힘은 θεός로, 엘룐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옮겨졌다. ‘조상의 하나님’은 대개 ‘나의’, ‘우리의’ 하나님이라는 소유격으로 바뀐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이다(히 8:10). 야웨는 ‘알파와 오메가’(계 1:8)로 풀이되거나 퀴리오스로 번역된다. 롬 9:29와 약 5:4에는 ‘체바오트’가 번역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이름은 삼위일체에서 완성된다이 아버지가 성령을 통해 예수로 말미암아 알려지셨으므로, 하나님 이름의 충만한 계시는 성부·성자·성령이라는 삼위일체적 이름으로 주어진다. 엘로힘에 담겨 있던 충만함이 여기서 가장 찬란하게 드러난다.

4. 하나님의 비공유적 속성들 원서 333–349쪽

다마스쿠스의 요한이나 보나벤투라는 삼위일체를 먼저 다루었지만, 바빙크는 성경의 계시 순서를 따른다. 성경은 일반 속성을 먼저 계시하고 삼위일체는 신약에서 선명하게 드러낸다. 출발점은 독립성이며, 자존성은 단지 스스로 있음이 아니라 다른 모든 완전성을 품은 존재의 충만이다. 원서 333쪽

속성원서뜻막는 오해·오류핵심 비유·논점성경
자존성 / 독립성334–335쪽아무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만물이 그분께 의존함. “무한하신 존재의 바다”범신론(피조물의 독자적 실존 부정)후대 개혁파는 ‘독립성’ 선호(실재뿐 아니라 완전성·작정·사역에서 자충족). 피조물의 자기 보존 욕구는 그 희미한 그림자행 17:25; 시 36:10; 계 1:8
불변성335–338쪽존재와 생각과 뜻이 언제나 동일함이신론·범신론, ‘생성’의 신. 반대로 경직된 부동성으로 오해모든 변화는 존재의 감소. 태양·동전(아우구스티누스), 기둥(아퀴나스), 예술가 → 본질은 그대로, 관계가 변함. 하나님 안에는 이전과 이후가 없음말 3:6; 약 1:17; 삼상 15:29; 히 13:8
무한성338쪽본질의 무한성 = 완전성크기의 무한, 수의 무한, 철학의 ‘끝없음’(신플라톤주의·스피노자·헤겔)질적·긍정적 무한이므로 별도 속성이 아니다. 내용은 영원성과 편재성에서—
영원성339–342쪽시간에 적용된 무한성. 과거·미래 없는 영원한 현재이신론(시간의 무한 연장), 범신론(시간의 본질), 칸트(주관적 지각 형식)시간은 피조된 존재의 지속 기간. 외적 시간/내적 시간. 영원은 멈춘 점이 아니라 존재의 충만 — 몰두한 일꾼의 삶. “매초마다 영원의 맥박이 고동친다”시 90:2, 4; 사 41:4; 요 8:58
편재성342–345쪽공간을 초월하시면서 존재와 능력으로 모든 곳을 채우심범신론(→ 초월), 이신론(→ 내재)영혼이 몸 전체와 각 부분에 있듯(아우구스티누스). 본질로·정의로·은혜나 영광으로 다양하게 거하심. 지옥에도 현존. 죄만이 영적으로 갈라놓음왕상 8:27; 시 139:7; 사 59:2
단일성: 단수성346–347쪽신적 본질은 오직 하나. 배타적·수적 단일성구약이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진화했다는 종교사학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일신적. 세상·인류의 통일성, 선택과 언약, 율법이 증거신 6:4; 출 20:3; 고전 8:5–6; 딤전 2:5
단일성: 단순성347–349쪽하나님 내부의 질적 단일성. 진리·의·사랑·지혜 자체단순성이 삼위일체와 충돌한다는 반론‘단순한’의 반대는 ‘셋’이 아니라 ‘복합적’. 유/종, 실체/우연, 질료/형상, 가능태/현실태, 본질/실존 구분을 하나님께 적용하지 않음. “모든 복합적인 것은 창조된 것이다”요일 4:8; 요일 1:5; 렘 23:6

(1) 불변성: 굳은 부동이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오고 가시고, 얼굴을 돌리고, 심지어 후회하신다(창 6:6)고 말한다. 동시에 하늘과 땅은 낡아도 하나님은 한결같으시고(시 102:26–28), 사람이 아니시므로 후회하지 않으신다(삼상 15:29)고 말한다. 둘 다 참이다.

살아 계신 불변성하나님은 자신을 조금도 잃지 않고 자신을 주실 수 있다. 자신의 불변성을 절대적으로 유지하면서도 피조물과 무한히 관계를 맺으신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 자체가 존재와 생성의 구분에 달려 있고, 우리의 의존도 하나님의 불변성에 근거한다.

(2) 편재성: 하나님께 피하라

하나님은 ‘어딘가에’ 계시지 않고 스스로 자기 자신의 장소가 되신다. 공간도 칸트의 지각 형식이 아니라 피조된 존재의 실존 양식이다.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이 없으니 숨을 수 없다. 우리를 하나님과 떼어 놓는 것은 오직 죄이며, 그것도 공간적으로가 아니라 영적으로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길은 성지순례가 아니라 자기를 낮추고 회개하는 일이다.

“사람은 공간적으로가 아니라 부조화라는 측면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하나님에게서 도망치려 하지 말고 차라리 하나님께 피하라. — 아우구스티누스(바빙크 인용)

(3) 단일성의 두 겹

단수성의 통일성

바깥을 향해: “다른 신은 없다.” 기독교는 로마의 다신교와 맞서 성경뿐 아니라 영혼의 증언, 철학자·시인의 발언, 진리와 도덕의 하나됨에 호소했다. 이 고백이 약해지면 세계·종교·도덕·진리의 통일성이 무너지고 미신과 귀신 숭배가 돌아온다.

단순성의 통일성

안을 향해: “하나님은 부분들로 조립되지 않았다.” 복합적이라면 단일성·독립성·불변성을 지킬 수 없다. 하나님은 세 위격으로 존재하시는 하나의 비복합적 존재시다. 다양성 안에서 단순하시고 단순성 가운데 다양하시다.

5. 영성과 불가시성 원서 349–355쪽

(1) 영성 원서 349–352쪽

  • 물질은 모두 복합체이므로 단순하신 하나님은 물질일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께 눈·귀를 돌리지만 먹고 소화하고 생식하는 기관은 결코 돌리지 않고, 어디서도 하나님께 육체가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 구약은 자존·영원·편재·비교 불가·불가시성·무형상성(신 4:12)으로 영성을 전제하고, 신약은 예수께서 하나님을 영이라 부르심으로 명시한다(요 4:24).
  • 헤겔의 ‘영’(Geist)은 관념이 자연을 거쳐 인간 안에서 비로소 도달하는 단계로, 기독교 고백과 일치점이 없다.
  • ‘영’은 하나님·천사·영혼에 일의적이 아니라 유비적으로 쓴다. 하나님은 ‘영들의 아버지’시다(히 12:9).
예배의 뿌리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는 하나님의 영성에 기초한다. 오직 이것만이 원칙적으로 영원히 모든 형상 숭배를 배제한다.

(2) 불가시성 원서 352–355쪽

  1. 교부하나님이 특별한 은혜로 모세·이사야·바울에게 일시적으로 자신을 보이심. 대다수는 본질을 보는 일에 부정적
  2. 신플라톤주의 · 위 디오니시우스영혼이 초자연적 은혜로 고양되어 하나님의 본질을 볼 수 있다는 믿음
  3. 중세프로스페루스, 베르나르두스(삼위일체 자체를 봄), 피렌체 공의회(공로의 차이에 따라 실제 모습대로 봄). 성인 기원 정당화에도 쓰임 → 인간의 신격화
  4. 종교개혁일부는 가능하다고 보았으나 대부분의 개혁파는 거부하거나 스콜라적 사변을 무시. 바빙크: 이 조심성이 성경과 일치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인간은 영화된 뒤에도 유한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봄은 언제나 신적 겸손(συγκατάβασις, 하나님이 내려오심)의 계시를 요구한다. 지복직관은 참되지만 인간 본성에 맞게 주어지며, 디오니시우스적 신성화(θέωσις)는 성경의 지지가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우리 안에 가지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자신을 우리에게 보이실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 바빙크

6. 지적 속성: 지식·지혜·진실성 원서 355–364쪽

(1) 지식, 예지, 중간지식 원서 355–358쪽

  • 성경은 하나님의 지식을 빛에 비유한다(요일 1:5). 범신론은 무의식을 만물의 통일성으로 보지만, 결과가 원인보다 클 수 없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시 94:9).
  • 하나님 안에서는 존재와 지식이 일치한다. 그분의 지식은 관찰에 기초한 후험적 지식이 아니라 선험적이고 영원히 현재하며 증가할 수 없다. 그래서 엄밀히 ‘예지’라는 말은 부적절하다.
  • 예지와 자유의지: 오리게네스는 하나님이 자유로운 행위를 단지 아신다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작정하셨기에 아신다고 했다. 바빙크는 후자를 따르되 자유와 전지를 함께 신앙 조항으로 고백한다.

중간지식론 몰리나·수아레즈

  • 하나님의 작정에 논리적으로 앞서는 우연사의 지식
  • 펠라기우스적 무차별적 자유의지와 전지를 조화하려 함
  • 예수회는 수용

바빙크의 비판 개혁파

  • 하나님이 지식을 피조물의 의지에서 얻게 됨 → 종속자들의 종
  • “하나님은 지켜보고, 결정은 사람이 한다. 그러면 은혜는 공로에 따라 분배되고, 예정은 선행에 의존한다.”
  • 해법은 무차별성이 아니라 합리적 기쁨. 인간 의지는 확실한 원인들의 질서에 통합되어 있다

(2) 지혜 원서 359–361쪽

  • 지식이 추론적·이론적이라면 지혜는 관조적·실천적·목적지향적이다. 참 지혜의 뿌리는 야웨 경외(잠 9:10). 세상의 조성(시 104:24), 십자가와 그리스도(고전 1:24), 교회(엡 3:10)에 드러난다.
  • 아우구스티누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를 자율적 실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종속된 하나님의 생각으로 수정했다. 하나님은 아시기 때문에 만드시지, 만든 뒤에 아시는 것이 아니다.
  • 하나님은 최고의 예술가이고 세상은 그 예술 작품이다. 피조물은 자기 안에 드러난 신적 지혜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존재에 참여한다.
  • 죄는 지혜의 실현이 아니라 존재의 축소·결핍·왜곡이다. 죄도 하나님의 지식의 대상이지만 하나님의 이데아는 아니다.

(3) 진실성 원서 361–364쪽

히브리어 에메트(אֱמֶת)는 ‘아만’(확고히 하다)에서 왔다. 주관적으로는 붙잡는 신앙, 객관적으로는 대상의 확고함과 신뢰성이다. 그래서 진실성은 지적이면서 의지적인 속성이고, 진리와 신실함은 분리되지 않는다.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된다(고후 1:20).

진리의 의미내용반대하나님께
존재론적 진리본질의 참됨(진짜 금)우상, 헛것진리를 가지신 것이 아니라 진리 자체
윤리적 진리존재와 자기계시의 일치거짓말존재와 계시가 완전히 일치
논리적 진리사고와 실재의 일치오류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대로 만물이 존재
세 의미는 모두 생각과 존재의 일치라는 점에서 하나다. 하나님은 제1의 진리, 모든 진리의 원천

7. 도덕적 속성: 선하심·거룩·의 원서 364–371쪽

(1) 선하심 원서 364–366쪽

선하심은 ‘우리에게 쓸모 있다’는 공리적 뜻이 아니라 모든 선의 총체라는 절대적 뜻이다(막 10:18). 하나님은 자기 밖에 목적을 두지 않는 자충족적인 분, 곧 복되신 분이다. 복됨의 자리는 스코투스처럼 의지의 우위가 아니라, 보나벤투라를 따라 지성과 의지가 함께 이룬다.

넘쳐 흐르는 선하심
인자 (חֶסֶד)택하신 백성을 향한 특별한 호의
자비비참한 자를 향할 때. 상냥하고 크고 풍성함
오래 참으심심판받아 마땅한 자를 그냥 두심(출 34:6)
은혜자격 없는 죄인에게 값없이. 처음 온전히 세운 이는 아우구스티누스
사랑유익만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주심. 구약은 언약적 부부의 사랑, 신약은 아가페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의 배타적 해석 금지모든 속성을 사랑에서 끌어내면 안 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라고 말하는 것도 동일하게 진리다.

(2) 거룩 원서 366–368쪽

  • 어간 카다쉬(קדשׁ)는 ‘자르다, 분리하다’에서 왔다. 창조세계가 악하다는 뜻이 아니다. 창조세계는 선하되 ‘일반적인 것’(חֹל)이어서 하나님을 섬기기에 부적합할 뿐이다.
  • 오직 하나님만 거룩하게 하신다(출 31:13). 부정적으로는 선택·구별, 긍정적으로는 씻음·기름 부음·희생·피 뿌림을 통한 성별이다. 거룩하게 함은 구별 이상이다.
  1. 이스라엘에게: 구원거룩하신 분은 창조주·구원자·왕. 기도 응답과 위로(사 43:14–15)
  2. 언약 파기 시: 심판그러나 징계 중에도 거룩은 구원의 원인으로 남음(호 11:8–9)
  3. 그리스도 안에서자신을 하나님께 성별하신 거룩하신 분(요 17:19). 더 이상 심판의 원리가 아님
  4. 성령과 교회교회는 거룩한 나라(벧전 2:9). 목표는 영혼과 몸이 영원히 성별됨(엡 5:27)

(3) 의(정의) 원서 368–371쪽

  • ‘차디크·체데크·체다카’의 일차적 의미는 법정적이다. 재판관 앞에서 무죄로 판명될 사람의 상태다.
  • 진노는 두렵고 언약 백성도 그 대상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보복적 정의보다 보상적 정의가 두드러진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은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는 것이다.”
  • 구원은 번영의 회복 이상이다. 핵심은 죄 용서와 성령으로 새 마음을 주심(렘 31:33–34). 메시아를 통해 이방에 미치고(사 42:1)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된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속죄의 수단을 주어 자신의 의를 증명하신다.
  • 교의학에서 ‘의’는 모든 신적 미덕의 총체로도 쓰여, 하나님을 사랑으로만 보는 영지주의·마르키온·근대 신학에 맞선다.
모든 법의 근거하나님 위에 따라야 할 법은 없고 피조물도 하나님 앞에서 권리를 내세울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자의적이지 않다. 하나님은 거룩과 은혜로 스스로를 묶으시고 언약적으로 행하신다. 모든 법과 권리의 근거는 사회 계약·자연법·역사가 아니라 선하고 은혜로운 하나님의 뜻이다.

8. 주권적 속성: 뜻과 전능 원서 371–381쪽

(1)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원서 371–377쪽

창조와 보존, 역사의 통치, 그리스도의 고난, 선택과 유기, 중생과 성화, 참새 한 마리의 일까지(마 10:29) 모두 하나님의 뜻에서 나온다. 하나님의 뜻은 결핍이 아니라 자충족에서 나온다.

입장주장바빙크의 평가
헤겔순수한 사고를 절대화, 존재를 생성으로개념을 가지고 노는 속임수. 의지 없는 사고에서 존재가 나올 수 없다
셸링의지를 지성보다 앞세움. 의지는 무의식적 욕망·맹목적 충동안식은 의지가 사라질 때만 → 불교의 열반, 범신론적 신비주의의 결론
스코투스·유명론무차별적 의지의 자유를 하나님께 적용. 십계명 둘째 돌판, 성육신, 구원 방식도 달라질 수 있었다(오컴·예수회·소키누스파·항변파·데카르트도)형식적 자의성의 길. 하나님의 의지를 본성에서 떼어 냄
기독교 신학출발점은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본질사물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의지에, 무엇인가는 하나님의 마음에 달림. 범신론의 필연과 이신론의 우연을 모두 거부

삼위일체 하나님은 신적 사랑으로 영원히 자신을 사랑하신다. 이 필연적 자기사랑과 피조물을 향한 자유로운 뜻은 구분된다. 피조물에 대해 하나님은 기뻐하시는 대로 행하시고 해명하실 필요가 없다(시 115:3; 사 45:9; 롬 9:20–21). 그러나 그 뜻은 존재·지혜·선함과 하나이므로 우리는 그 안에서 안식한다. 하나님은 왕이신 동시에 아버지시다.

(2) 악의 문제: 계시된 뜻과 감춰진 뜻 원서 377–379쪽

윤리적 악(죄)과 물리적 악(고통)은 모두 하나님의 통제 아래 있지만, 악이 선과 같은 의미로 하나님 뜻의 대상일 수는 없다. 성경 자체가 두 뜻을 구별한다.

감춰진 뜻 작정

  • 선하신 기쁨의 뜻, 하나님의 실제 뜻
  •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실지 말함. 반드시 이루어짐(엡 1:11; 단 4:35)
  • 겟세마네의 기도: “아버지의 뜻대로”(마 26:42) — 맡김의 자리
  • 부인하면 → 주권 신앙이 약해져 어두운 냉소주의

계시된 뜻 교훈

  •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지 규정하는 규범(신 29:29; 마 7:21)
  • 은유적 의미에서만 하나님의 뜻. 감춰진 뜻이 실현되는 수단
  • 주기도문: “뜻이 … 이루어지이다”(마 6:10) — 순종의 자리
  • 부인하면 → 죄를 진지하게 보지 못하는 얄팍한 낙관주의
구분을 놓치면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거나 인간의 도덕적 책임이 무너진다. 또 하나님의 의도와 역사의 결과 사이에 이원론이 생겨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하고 사탄이 이기는 결론에 이른다. 인간은 계명을 어기는 순간에도 하나님에게서 독립하지 못하고 그분 영광의 도구가 된다.

(3) 전능 원서 379–381쪽

이름(엘, 엘로힘, 엘 샤다이, 아도나이)과 칭호(크고 두려운 하나님, 이스라엘의 전능자, 만왕의 왕, 전능하신 주 παντοκράτωρ)와 사역(창조, 섭리, 출애굽, 기적)이 전능을 선포한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창 18:14; 마 19:26). 이 능력은 무엇보다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드러난다(롬 1:4; 엡 1:20).

극단 ① 유명론

전능 = 무엇이든 원하고 행할 능력. ‘절대적 능력’으로 죄짓고, 죽고, 모순을 행하고, 참을 거짓으로 만들 수도 있다 → 내용 없는 자의성. 칼뱅: 신성모독적 허구.

정통 교리

하나님은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고(딤후 2:13) 그 뜻과 존재는 하나다. 그러면서도 가능한 것은 실재보다 크다. 하나님의 존재는 세계로 소진되지 않으므로 전능은 세계에 드러난 능력조차 무한히 초월한다.

극단 ② 플라톤 등

지금 세계가 유일하게 가능한 세계다.

9. 완전함, 복됨, 영광 원서 381–386쪽

하나님은 모든 완전성의 총체로, 생각 속에서도 실제로도 그보다 크고 나은 존재는 없다. 우리 마음의 하나님 개념도 하나님이 심어 주신 것이다.

안으로: 복됨 (딤전 1:11; 6:15)

  1. 절대적 완전함의 충만
  2. 그 완전함을 아시고 사랑하심(지식과 사랑은 어느 쪽도 앞서지 않음)
  3. 자기 안에서 누리시는 방해받지 않는 안식과 영원한 평화

범신론의 신은 생성·진화·갈망의 과정에 있지만 성경의 하나님은 자충족적이시다.

밖으로: 영광

  • 카보드(כָּבוֹד): ‘무겁다’ → 비중 있고 중요한 존재
  • 독사(δόξα): 명성·존경 / 공개된 광채
  • 창조세계 전체(시 8; 사 6:3), 성막과 성전(출 40:34), 무엇보다 그리스도(요 1:14)와 교회(고후 3:18)에 드러남
  • 불과 구름은 임재를 알리는 피조물 형태, 빛은 하나님 자신을 표현하는 이미지

영광은 공유적이어서 피조물에 희미하게 반영되지만 유비이지 동일성이 아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가 즐겨 쓴 ‘하나님의 아름다움’(바빙크는 신플라톤주의의 잔재로 봄)보다 개신교 신학자들은 성경 용어인 ‘영광’과 ‘위엄’을 선호했다. 영광은 피조물 안에 감사와 찬양을, 위엄은 복종을 불러일으킨다.

구조도

하나님은 계시하신 그대로 존재하신다 단순성: 본질 = 속성 · 출발점은 자존성(야웨) 고유한 이름 엘로힘 창조·능력 엘 샤다이 은혜의 전능 야웨 언약의 신실 야웨 체바오트 영광의 왕 아버지 최고의 계시 성부·성자·성령 이름의 충만 비공유적 속성 (초월 · 반범신론) 자존성 / 독립성 불변성 무한성 → 영원성(시간) · 편재성(공간) 단일성: 단수성 · 단순성 “무한하신 존재의 바다” 공유적 속성 (내재 · 반이신론) 영성 · 불가시성 지적: 지식 · 지혜 · 진실성 도덕적: 선하심 · 거룩 · 의 주권적: 뜻(감춰진/계시된) · 전능 각 속성은 비공유적이자 공유적 모든 완전성의 총체 안으로 복됨 · 밖으로 영광
이름의 점진적 계시와 두 묶음의 속성이 모두 한 분 단순하신 하나님의 충만을 드러낸다
입장그 입장의 주장바빙크의 답
리츨(근대 신학)하나님은 절대 존재가 아니라 사랑이요 아버지일 뿐이다사랑만 근본으로 삼으면 공의와 거룩이 덜 실제가 된다. 모든 속성을 공정히 다뤄야 한다
길베르투스 포레타누스하나님은 신성 덕분에 존재하지만 신성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다본질과 속성을 가르면 다신론에 문이 열린다. 하나님은 자신이 소유하신 바로 그것이다
칸트~슐라이어마허아래로부터 하나님께 오르는 유비적 사고는 불가능하다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왔기에 유비가 가능하다. 그 지식은 불완전해도 참되다
생성의 신 개념하나님의 인격은 존재가 아니라 생성으로 보아야 한다모든 변화는 존재의 감소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이 존재와 생성의 구분에 달렸다
이신론영원은 시간의 끝없는 연장이고 하나님은 세계 밖에 계신다영원은 시간과 질적으로 다르면서도 매 순간에 내재한다
중간지식론하나님은 피조물의 자유로운 선택을 보고서 아신다하나님의 지식은 선험적이며 영원한 현재다. 피조물의 결정에 의존할 수 없다

오해와 바른 이해

오해 ✕

  • 하나님은 결국 ‘사랑’ 하나로 다 설명된다.
  • 후회하시는 하나님은 변하시는 분이다. / 불변은 꿈쩍도 않으신다는 뜻이다.
  • 엘로힘 복수형은 삼위일체를 가리킨다.
  • 출 6:3은 야웨 이름이 그때 처음 생겼다는 뜻이다.
  • 야웨 체바오트는 전쟁의 신을 뜻한다.
  • 구약은 다신교에서 유일신교로 진화했다.
  • 하나님께 가까워지려면 거룩한 장소로 가야 한다.

바른 이해 ✓

  • 모든 속성을 공정하게 다뤄야 한다. 공의·거룩도 똑같이 실제다.
  • 본질은 그대로, 관계만 달라진다. 태양처럼 동일하시면서 피조물과 살아 관계하신다.
  • 능력의 충만을 나타내는 강조의 복수다.
  • 옛 이름에 신실함이라는 새 의미를 주신 사건이다.
  • 천사 무리에 둘러싸인 영광의 왕을 뜻한다.
  •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일신적이다.
  • 분리는 공간이 아니라 죄이며, 길은 겸손과 회개다.

핵심 용어

단순성 (simplicity)
하나님은 합성되지 않으셨고 모든 속성이 본질과 일치함. 반대말은 ‘셋’이 아니라 ‘복합적’.
무명 / 다명 (anonymous / polyonymous)
하나님은 이름이 없으시면서 많은 이름을 가지신다.
부정의 방법 / 긍정의 방법
피조물의 한계를 부정하는 길 / 완전함을 탁월하게, 원인으로 돌리는 길. 상호보완적.
원형 / 모사
실재에서는 하나님이 원형, 피조물이 모사. 우리의 지식은 유비적이지만 참되다.
비공유적 / 공유적 속성
하나님의 초월성 / 내재성을 강조하는 개혁파의 분류. 범신론과 이신론을 함께 막는다.
야웨 (YHWH)
은혜와 신실하심에서 변치 않는 언약의 하나님의 실제 이름. 70인역은 퀴리오스.
자존성 (aseity) / 독립성
하나님이 실재·완전성·작정·사역에서 자충족적이심. 존재의 충만.
영원한 현재
과거·미래가 없으나 멈춘 점이 아닌, 존재의 충만으로서의 영원.
신적 겸손 (συγκατάβασις)
하나님이 스스로 내려오셔서 자신을 보이고 알게 하시는 계시.
중간지식 (middle knowledge)
하나님의 작정에 논리적으로 앞선다는 우연사의 지식. 몰리나·수아레즈, 바빙크는 거부.
에메트 (אֱמֶת)
주관적으로 신앙, 객관적으로 확고함·신뢰성·참됨.
감춰진 뜻 / 계시된 뜻
하나님의 작정인 실제 뜻 / 우리 행위의 규범으로 주신 교훈적 뜻.
카보드 / 독사 (כָּבוֹד / δόξα)
무게·중요성 / 명성과 공개된 광채. 하나님의 영광.

성경 근거

구절이 장에서의 쓰임
출 3:14스스로 있는 자, 조상들의 하나님과 동일하신 야웨 → 자존성과 신실함
출 6:3야웨 이름의 뜻을 처음 알려 주신 사건
창 17:1언약을 인치시며 엘 샤다이로 나타나심
롬 8:15성령으로 자녀 됨을 알고 아버지라 부름
약 1:17; 말 3:6변함도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 → 불변성
시 90:2영원부터 영원까지 하나님이심 → 영원성
시 139:7; 사 59:2하나님의 임재를 피할 곳이 없음, 죄만이 영적으로 분리함 → 편재성
신 6:4야웨는 유일한 주님 → 단수성
요 4: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영과 진리로 예배 → 영성
시 94:9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않으시랴 → 하나님의 지식
신 29:29나타난 일은 우리에게 속함 → 계시된 뜻은 행위의 규범
딤전 6:15복되시고 유일하신 주권자 → 복됨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출애굽기 3:14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신명기 29:29

복습 문제

단순성 교리란 무엇이며, 본질과 속성을 분리하면 왜 위험한가?
하나님은 부분으로 합성되지 않으셨고 자신이 소유하신 바로 그것이시므로 모든 속성이 곧 본질이라는 교리다. 속성 뒤에 별도의 신적 본질을 세우면 본질과 속성이 각각 독립 실재처럼 되어 다신론으로 가는 문이 열리고, 사랑 같은 속성이 덜 절대적이라는 인상을 주어 하나님 이해가 빈곤해진다.
단순성과 속성의 다양성은 어떻게 양립하는가?
다양성의 원인은 하나님 쪽의 합성이 아니라 유한한 피조물 쪽의 한계에 있다. 신적 본질이 너무 풍성해 한꺼번에 이해할 수 없으므로 여러 이름으로 계시하신다. 빛이 여러 색으로 나뉘어도 같은 빛이듯(아우구스티누스), 하나님은 동일하시고 우리의 관계가 다양하다.
엘로힘, 엘 샤다이, 야웨, 야웨 체바오트는 각각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묘사하는가?
엘로힘은 창조주와 보존자(능력의 충만), 엘 샤다이는 자연의 힘을 은혜에 봉사하게 하는 전능자, 야웨는 은혜에 영원히 신실한 언약의 하나님, 야웨 체바오트는 천사 무리에 둘러싸여 온 세상을 다스리는 영광의 왕이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아버지’를 더하시고, 이름의 계시는 성부·성자·성령에서 충만해진다.
불변성이 ‘경직된 부동성’이 아니라는 말의 뜻은? 창 6:6의 ‘후회’는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나님은 본질·생각·뜻이 변하지 않으시지만 피조물과 다채롭게 살아 관계하신다. 자신을 조금도 잃지 않고 자신을 주실 수 있다. 태양이 태우든 따뜻하게 하든 같은 태양이듯, 본질의 변화 없이 관계의 변화가 가능하다. 후회 같은 표현은 이 생동적 관계를 묘사하며, 성경은 동시에 하나님이 후회하지 않으신다고 증언한다(삼상 15:29).
바빙크가 중간지식론을 거부하는 이유는?
중간지식론은 하나님이 작정에 앞서 피조물의 자유로운 선택을 보고 아신다고 하여, 하나님의 지식을 피조물의 의지에 의존하게 만든다. 그러면 하나님은 종속자들의 종이 되고 약속의 확실성이 사라지며, 은혜는 공로를 따르고 예정은 선행에 의존하게 된다. 하나님의 지식은 선험적이며 영원히 현재한다.
감춰진 뜻과 계시된 뜻을 구분해야 하는 이유와, 둘 중 하나를 부인할 때의 결과는?
구분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죄의 조성자가 되거나 인간의 도덕적 책임이 무너지고, 하나님의 의도와 역사의 결과 사이에 이원론이 생긴다. 계시된 뜻을 부인하면 죄를 진지하게 보지 못하는 얄팍한 낙관주의에, 감춰진 뜻을 부인하면 하나님의 주권을 의심하는 어두운 냉소주의에 빠진다.
한 줄하나님은 이름으로 자신을 보이시며 모든 속성에서 한결같이 살아 계신다.

책의 저작권은 저자와 출판사에 있습니다. 빛다방 학습·심화 노트를 바탕으로 한 개인 학습용 정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