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 수 없는 하나님을 어떻게 참되게 알 수 있나?
-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신학의 유일한 내용이며, 그 지식은 경배로 이어지는 생명이다.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하나님이 스스로를 계시하셨다는 사실이다.
- 교부·중세·종교개혁은 하나님 본질의 불가해성을 고백했다. 칸트 이후 근대 철학은 이를 불가지론으로 바꾸어 신학을 종교학으로 위축시켰다.
- 바빙크는 불가지론의 전제는 받아들이되 결론을 뒤집는다. 불가해성은 계시로 얻는 유비적 참 지식의 구성요소이며, 모순이 아니라 신비다.
- 절대적 무신론은 사실상 없다. 사람은 하나님을 알 능력과 성향(종교의 씨앗)을 갖고 태어나지만 내용은 계시와 양육으로 얻는다(본유관념 거부). 여섯 가지 신 존재 논증은 증명이 아니라 신앙을 강화하는 증언이다.
- 성경은 창조세계 전체에서 가져온 신인동형론적 이름으로 하나님을 부른다(적응). 우리 지식은 모사적·유비적이어서 제한적이지만 참되고 믿을 만하다.
1. 신적 신비와 불가해성 원서 265–267쪽
- 신학의 내용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다. 세상·인간·그리스도에 관한 교리도 이 중심 교의를 풀어 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지식은 자기 지식과 떨어지지 않는다(아우구스티누스, 칼뱅 『기독교강요』 첫머리, 제네바 교리문답).
- 신학은 불가해하신 분을 마주하므로 신비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호기심으로 끝나지 않고 흠모와 경배로 이어진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생명이다(요 17:3).
- 피조물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는 것은 대담하지만, 성경은 그 가능성을 한 번도 의심하지 않는다. 근거는 단 하나, 하나님의 자기계시다.
인격성
의식과 자유 의지를 가진 인격. 시온을 거처로 삼고 이스라엘을 택해 언약을 맺으신다. 그리스도와 교회와 신자 안에 거하신다(골 2:9; 요 14:23).
절대성
세상에 갇히지 않고 그 위에 높이 계신다. 범신론은 성경에 낯설다. 가까이 갈 수 없는 빛에 거하신다(딤전 6:16).
성경에는 인격성과 절대성이 함께 있다(사 57:15). 이스라엘의 선택은 제한이 아니라 자유로운 결정이므로, 이스라엘 종교가 단일신교에서 유일신교로 진화했다는 설명은 성경과 맞지 않는다. 뿌리는 아브라함의 소명과 하나님이 먼저 맺으신 언약이다.
불가해성 고백의 역사
- 플라톤 전통 · 영지주의 원서 268–269쪽계시 밖에서 통일이 깨짐. 플로티노스에게는 부정의 신학만 남고, 영지주의는 하나님을 영원한 침묵의 심연으로 만듦
- 교부유스티누스: ‘아버지’, ‘주님’은 참 이름이 아니라 사역에서 나온 호칭. 아타나시오스·오리게네스·에우세비오스도 하나님은 모든 존재와 이해를 초월. 그러나 알 수 없다는 고백은 경외이지 포기가 아니었음
- 아우구스티누스야웨(스스로 존재하시는 분)만이 하나님이 ‘원래’ 어떤 분인지 알려 주는 참 이름. “당신이 이해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알지 못함을 통해 더 잘 알려진다
- 중세 원서 270–273쪽위 디오니시우스·에리우게나: 하나님은 이름이 없으면서 많은 이름을 지니신 분. 부정의 신학이 긍정보다 낫다. 아퀴나스: 직접 봄은 천국에, 지상의 지식은 간접적. 후기 스콜라의 정밀한 분석에 대한 반응으로 오컴(유명론)·쿠자누스(신비주의). 라테란 공의회: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는 분
- 종교개혁루터: 감추어진 하나님과 계시된 하나님. 개혁파는 이 개념을 따르지 않되 하나님이 이해·상상·언어를 무한히 넘어서신다고 만장일치로 주장. 칼뱅: 하나님이 무엇인지 묻는 것은 헛된 사변. 그러나 점차 추상적 교리로만 남고, 소키누스·아르미니우스주의는 뜻을 행하는 데만 집중
- 근대 원서 274–275쪽칸트: 영혼·세계·하나님은 증명될 수 없고 하나님 개념은 윤리학에 속함. 슐라이어마허: 절대 의존 감정의 내용. 포이어바흐: 하나님은 인간의 투사. 콩트의 실증주의. 신학은 종교학으로 탈바꿈
(1) 불가지론의 논거와 이율배반 원서 276–277쪽
- 논거: 인간은 유한하고 모든 지식은 주관적·상대적이다(‘인간은 만물의 척도’). 답: 이 논증은 너무 많은 것을 증명한다. 그러면 모든 지식의 신빙성이 무너진다. 지식 일반에 참인 한계는 하나님 지식에도 참이고, 하나님 지식에는 신인동형론적이라는 점이 더해질 뿐이다.
- 피히테 이후: 하나님의 절대성과 인격성은 양립할 수 없다. 인격적 신은 유한한 신이며, 그런 신을 바라는 것은 행복주의다 → 비인격적 도덕 세계질서만 남는다.
- 기독교는 이 긴장을 부인하지 않지만, 계시로 주어진 유비적 지식을 고백한다. 이것은 신비이지 자기모순이 아니다.
이율배반의 첫째 길
절대자를 유한한 수준으로 끌어내려 인간을 확대한 존재로 만든다.
이율배반의 둘째 길
모든 유한한 유사성을 제거해 종교에 쓸모없는 텅 빈 추상으로 만든다.
(2) 불가해성과 유비적 지식 원서 278–279쪽
- 하나님을 온전히 담는 이름이나 정의는 없다. 그래서 기독교는 늘 얄팍한 합리주의에 맞섰다. 성경과 교회는 칸트나 스펜서보다 인간의 유한성을 더 깊이 확신했지만 전혀 다른 결론을 끌어냈다.
- 힐라리우스: 하나님을 알되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분으로 아는 것이 배움의 완성이다. 시간 안의 영원, 유한 안의 무한을 우리는 이해하지 못하고 감사함으로 받는다.
- 유비 없이는 하나님에 대해 침묵해야 하고 모든 종교가 무너진다. ‘인격’을 근대의 자아와 같은 뜻으로 쓰면 삼신론, 유비를 피하면 추상이나 공허한 상징이 된다. 근대 불가지론은 고대 영지주의와 같은 오류에 빠진다.
| 구분 | 기독교의 불가해성 | 근대 불가지론 |
|---|---|---|
| 전제 | 하나님은 유한한 이해를 무한히 넘어서신다 | 인간 지식은 유한하고 상대적이다 |
| 계시 | 전제한다 | 배제한다 |
| 결론 | 포괄적이지 않지만 상대적이고 유한한 참 지식을 가진다 | 하나님은 알 수 없다 → 신학은 윤리·감정·종교학으로 |
| 긴장의 성격 | 경탄할 신비 | 해결 불가능한 모순 |
2. 무신론의 문제점 원서 280–286쪽
- 핵심 전환: 불가해성(다 헤아릴 수 없음)은 가지성(알 수 있음)을 없애지 않고 전제하고 확증한다. 다 알 수 없다는 말 자체가 어느 정도 안다는 뜻이다.
- 온 우주가 창조물이므로 동시에 계시다. 그래서 절대적 무신론은 거의 상상할 수 없다. 불가지론조차 자기가 반대하는 것의 도움 없이는 서지 못한다.
- 실천적 무신론(하나님 없이 사는 삶, 시 14:1; 엡 2:12)은 분명 있다. 그러나 이론적 무신론은 드물고 신앙 공동체를 만들지도 못한다.
- 참 하나님을 부인하는 순간 거짓 신을 만든다. 유물론은 범신론으로 변해 간다.
종교적 충동은 왜 보편적인가: 본유관념 논쟁
본유관념 계보
- 플라톤: 배움은 선재한 영혼의 상기
- 아리스토텔레스: 공리 / 스토아: 공통 관념
- 키케로: 신이 심은 본유관념
- 근대: 데카르트, 칸트의 선험적 형식, 피히테·헤겔
경험론의 비판
- 소키누스파, 로크·홉스: 모든 지식은 감각에서
- 민족마다 도덕 원칙도 다르다
- 스펜서: 진화론으로 둘을 조화
기독교 신학
- 특별계시 없이 알려지는 자연적 진리는 인정
- 본유관념은 거부
- 본유적 지식 = 유한에서 무한으로 나아가도록 창조된 성향(habitus)
3. 자연신학 원서 286–292쪽
- 칼뱅은 이 능력을 신성에 대한 감각(sensus divinitatis), 종교의 씨앗이라 불렀다. 루터파 신앙고백은 자연신학에 부정적이었지만 개혁파는 일관되게 긍정했다. 인간 자신이 소우주로서 하나님의 작업실이다.
- 푸치우스는 자연신학을 강하게 변호하면서도 데카르트의 본유관념은 단호히 거부했다.
- 기독교 신학의 출발: 세계는 하나님의 창조이자 계시다. 하나님 지식은 간접적·유비적이며 감각, 언어와 상징, 부모와 타인을 통해 전달된다(그래서 하나님 표상이 그토록 다양하다).
- 언어 비유: 언어 능력은 타고나지만 구체적 언어는 배운다. 종교적 능력도 타고나되 내용은 습득된다. 그래서 구체적 형태의 ‘자연종교’는 없다.
- 사람은 백지로 태어나지만 강요가 아니라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알도록 지어졌다. 자연과 은혜는 한 분 하나님에게서 나오므로 대립하지 않는다.
| 심어진 지식 | 획득된 지식 |
|---|---|
| 계시가 의식에 작용해 낳는 인상과 직관 | 그것을 성찰·논증해 이르는 더 선명한 관념, 곧 신학 |
4. 신 존재 “증명” 원서 292–293쪽
성경은 하나님의 실재를 증명하지 않고 전제하며 권위를 가지고 말한다(사 40:26 “눈을 높이 들어 … 보라”). 논증은 신앙의 교리 안에 포함된 것이지 교리보다 앞서는 조항이 아니다.
정당한 자연신학 ✓
특별계시 없이도 알려지는 것에 대한 기독교적 확신.
부당한 자연신학 ✕
자립하여 자충족적·합리주의적으로 특별계시의 필요를 배제할 때 → 부당하고 불경하다.
| 출발점 | 논증 | 내용 | 반론 | 바빙크의 평가 |
|---|---|---|---|---|
| 세계 | 우주론적 293–294쪽 | 결과(세상)에서 원인을 추론. 원인의 무한연쇄는 생각할 수 없다 | 흄·칸트의 인과율 비판 | 자존적·절대적 세계 원인까지는 간다. 그러나 인격적인지, 초월적인지, 의식이 있는지는 모른다 |
| 목적론적 294–295쪽 | 질서·조화·아름다움·목적에서 지성적 원인을 추론 | 칸트(조성자일 뿐 창조자는 아님), 유물론(목적 없음), 범신론(무의식적 목적) | 반론도 신념일 뿐. 글자를 던져 『일리아스』가 나오지 않는다. 목적이 있다면 의식 있는 지고의 존재가 있다 | |
| 인간 본성 | 존재론적 295–296쪽 | 사유에서 존재를 추론(안셀무스 『모노로기온』·『프로스로기온』). 하나님께는 존재와 본질이 일치 | ‘하나님이 존재한다면’이라는 조건이 먼저 증명되어야 한다 | 엄밀한 증명은 아니다. 의식의 필연적 증언을 신뢰할지 버릴지 선택 앞에 세운다 |
| 도덕적 296–297쪽 | 양심·심판의 두려움·참회·상벌에서 지고의 입법자를 추론 | 진화론(생존 메커니즘), 악과 의인의 고난 | 증명은 아니나 양심은 우리를 결코 내버려두지 않는다. 무정한 자연이 최종 승리자가 아님을 증언 | |
| 역사 | 보편적 동의 297–298쪽 | 종교는 인류의 공동자산(키케로, 현대 종교학) | 보편적 병증·망상이라는 주장을 반증하지 못한다 | 거부하면 인류의 공통 인식 전체를 의심하는 더 깊은 회의주의에 빠진다 |
| 역사적-신학적 298–299쪽 | 역사의 흐름이 목적을 향하므로 지혜로운 통치자가 있다 | 증명하려는 것을 전제한다. 종교적·도덕적 진보는 확인할 수 없다 | 섭리냐 진보냐는 증명이 아니라 신앙의 문제. 최종 결정권은 마음에 있다. 유신론과 무신론 사이의 선택 |
5. 하나님의 이름: 적응과 신인동형론 원서 299–301쪽
- 성경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곧 그분의 자기계시다(레 24:11; 신 28:58).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이름을 붙이신다. 이스라엘에는 야웨로, 교회에는 아버지로.
- 이름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 드러난 하나님을 계시한다. 그러나 자의적이지 않다. 하나님이 그런 분이시기에 그렇게 계시하신다.
-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말하므로 신적 적응(divine accommodation)이 있다. 성경은 철저히 신인동형론적이며, 재료는 하나님이 내재하시는 창조세계 전체에서 온다.
- 그래서 하나님을 창조된 실재에서 비워 내는 모든 이원론(근대 이원론 포함)에 반대한다. 하나님을 그분의 작품에서 볼 수 없다면 알 가능성 자체가 사라진다.
- 비공유적 속성(불변성·영원성·편재성)조차 유한한 세계에서 도출되어 부정의 방식으로 진술된다. 영원은 시간성의 부정으로만 정의된다.
(1) 모든 피조물이 주는 이름 원서 302–304쪽
- 하나님은 본래 이름이 없으시지만 자신을 계시하실 때 많은 이름을 가지신다. 아우구스티누스: 만물이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으나 어느 것도 합당하게 표현하지 못한다. 배고프면 빵, 목마르면 물, 어두우면 빛이 되시는 분이다.
- 보나벤투라: 언어의 결핍 때문에 하나님이 찬양을 덜 받으시지 않도록 무수한 피조물의 이름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칼뱅: 우주에 하나님 영광의 불꽃이 없는 티끌은 없다(범신론에 위험할 만큼 가까운 표현임을 그도 인정).
- 그러나 창조세계의 위계는 지켜진다. 오직 인간만 하나님의 형상이며 소생이다(행 17:28). 어떤 피조물도 하나님과 동등하거나 대립하지 않는다(영지주의·마니교·신플라톤주의의 이원론 거부).
(2) 모사적·유비적 신 지식 원서 305–309쪽
플라톤·헤겔은 ‘절대자’, ‘일자’ 같은 추상적 이름으로 긴장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추상어도 유한한 개념을 부정해 무한에 이르려는 시도이므로 여전히 신인동형론이다. 남는 길은 우리 이해가 제한적이지만 덜 참된 것은 아니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은유도 사물 사이의 닮음에 기초해 진리를 말한다.
원형적 지식 (archetypal)
하나님의 자기지식. 본래의 원본이며 파생되지 않았다.
모사적 지식 (ectypal)
원형을 본떠 피조물에게 주어진 우리의 지식. 희미하지만 참되고 순수하며 충분하다.
| 구분 | 유비적(바빙크) | 상징적(근대 신학) |
|---|---|---|
| 주장의 성격 | 참과 거짓을 묻는 진리 주장 | 가치를 매기는 심미적 주장 |
| 하나님의 이름 | 하나님이 우리 이해력에 맞추어 주신 자기계시 | 내면의 반영, 인간의 투사 |
| 결과 | 신앙의 확신에 근거가 있다 | 종교는 주관적 예술이 되고 인간이 종교의 척도가 된다 |
이 짐에서 우리를 풀어 주는 것은 창조 선언이다. 만물은 하나님의 생각 안에 먼저 있었기에 하나님의 덕을 드러낼 수 있다. 특히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인간의 말로 하나님을 부를 권리를 받았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먼저 하나님께 알려졌기 때문이다.
- 계시에서 온다지식의 원천은 하나님의 계시
- 적응이다하나님이 우리 이해력에 자신을 맞추신다
- 희미한 형상이다포괄적이지 않고 제한적이다
- 참되고 믿을 만하다상징이 아니라 모사적·유비적
구조도
| 입장 | 그 입장의 주장 | 바빙크의 답 |
|---|---|---|
| 근대 불가지론(칸트·스펜서) | 하나님은 알 수 없으니 신학은 윤리나 종교감정으로 줄여야 한다 | 전제는 받아들이되 결론은 다르다. 유비 없이는 침묵뿐이며, 하나님은 계시로 참되게 알려진다 |
| 피히테 이후 근대사상 | 절대성과 인격성은 양립 불가, 인격적 신은 유한한 신이다 | 긴장은 인정하나 모순이 아닌 신비다 |
| 데카르트·본유관념론 | 하나님 관념은 태어날 때부터 명석하게 주어져 있다 | 그러면 인간은 계시가 필요 없는 자충족 존재가 된다. 성향과 능력만 타고난다 |
| 루터파 | 자연신학에 부정적, 감추어진 하나님과 계시된 하나님 구별 | 개혁파는 감추어진 하나님 개념은 따르지 않되 자연신학을 긍정한다 |
| 근대 신학의 ‘상징적’ 지식 | 하나님의 이름은 내적 삶의 반영이자 심미적 상징이다 | 그러면 인간이 척도가 된다. 우리 지식은 모사적이지만 참되다 |
| 소키누스·아르미니우스주의 | 하나님 지식 논의는 한가한 사변, 뜻을 행하는 것이 전부다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 자체가 생명이다 |
오해와 바른 이해
오해 ✕
- 하나님은 알 수 없으니 말도 못 한다(불가해성 = 불가지론).
- 하나님 지식은 머릿속에 완성된 채 타고난다.
- 신 존재 증명이 믿음의 토대다.
- 하나님 이름은 인간 감정의 투사일 뿐이다.
- 신인동형론보다 추상적 이름이 더 정확하다.
- 무신론은 증명된 이론적 입장이다.
바른 이해 ✓
- 불가해성은 가지성을 전제하며, 계시에 기대어 참되게 안다.
- 알 능력은 타고나나 내용은 계시와 양육으로 얻는다.
- 논증은 믿음의 근거가 아니라 믿음을 돕는 증언이다.
- 하나님이 사람 말에 맞춰 스스로를 알리신 것이다.
- 추상적 이름도 신인동형론이며, 적응은 하나님의 방식이다.
- 증명하려면 전지·편재해야 하며, 결국 거짓 신을 만든다.
핵심 용어
- 불가해성
- 하나님은 이해·상상·언어를 무한히 초월하여 다 파악될 수 없음. 불가지론과 다르다.
- 불가지론 (agnosticism)
- 인간 지식의 한계로 하나님은 알 수 없다며 지식 자체를 포기하는 근대 입장.
- 부정의 신학
- 하나님이 무엇이 아니신지만 말할 수 있다는 접근.
- 유비적 지식
- 자신을 계시하신 하나님에 대한, 닮음을 통해 얻는 유한하지만 참된 지식.
- 본유관념
- 태어날 때 완성된 형태로 영혼에 심겨 있다는 관념. 기독교 신학은 거부한다.
- 신성에 대한 감각 (sensus divinitatis) · 종교의 씨앗
- 칼뱅의 용어. 하나님을 아는 창조된 성향과 능력.
- 심어진 지식 / 획득된 지식
- 계시가 남기는 인상·직관 / 그것을 성찰·논증해 얻는 더 선명한 관념(신학).
- 자연신학
- 하나님을 아는 창조된 성향에 근거해, 특별계시 없이 알려지는 것에 대한 확신. 특별계시를 배제하면 불경하다.
- 신인동형론
- 인간의 모습·감정·행위로 하나님을 묘사하는 언어.
- 신적 적응 (divine accommodation)
- 하나님이 인간의 언어와 이해력에 맞추어 자신을 계시하심.
- 원형적 / 모사적 지식 (archetypal / ectypal)
- 하나님의 자기지식 / 그것에서 파생된, 유한하나 참된 우리의 지식.
성경 근거
| 구절 | 이 장에서의 쓰임 |
|---|---|
| 요 17:3 |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 |
| 롬 1:19–20 | 창조세계가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모두에게 보여 줌 |
| 사 57:15 |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이 겸손한 자와 함께하심(초월과 내재) |
| 딤전 6:16 |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보지 못한 분 |
| 마 11:27 | 아들 외에는 아버지를 온전히 아는 자가 없다 |
| 행 17:23–28 | 온 우주가 창조이자 계시, 사람이 하나님을 더듬어 찾음, 우리는 그의 소생 |
| 시 14:1 | 하나님 없이 사는 실천적 무신론의 실재 |
| 롬 2:15 | 마음에 새긴 율법 → 하나님을 아는 창조된 능력 |
| 사 40:26 | 성경은 증명 대신 창조주를 보라고 촉구 |
| 창 6:6; 시 23:1; 신 32:4 | 감정·직업·피조물 이미지로 하나님을 부르는 신인동형론 |
복습 문제
기독교의 불가해성 교리와 근대 불가지론은 어떻게 다른가?
“무신론자는 없다”는 말의 뜻과 근거는?
개혁파는 왜 자연신학은 긍정하면서 본유관념은 거부하는가?
여섯 가지 신 존재 논증을 출발점에 따라 세 쌍으로 분류하라.
바빙크는 신 존재 논증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나님 지식을 ‘상징적’이 아니라 ‘모사적·유비적’이라고 불러야 하는 이유는?
책의 저작권은 저자와 출판사에 있습니다. 빛다방 학습·심화 노트를 바탕으로 한 개인 학습용 정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