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리탄
5부 성령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

18장 부르심과 중생

헤르만 바빙크 『개혁파 교의학』 (새물결플러스, 단권 축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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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듭남은 누가, 어떻게 일으키는가?

  • 하나님은 자연과 역사로 모두를 붙드시고(율법의 외적 부르심), 복음은 택자·유기자가 아니라 죄인 모두에게 가리지 않고 전해야 한다. 결과와 보편적 제안을 맞추는 일은 하나님의 몫이다.
  • 죄로 죽은 사람은 말씀만으로 깨어나지 못한다. 성령의 내적 부르심이 선택을 실현한다.
  • 중생은 하나님이 마음에 새 생명을 심으시는 일로, 시간상은 몰라도 논리상 늘 믿음과 회개보다 앞선다. 세례는 중생의 인침이지 원인이 아니다.
  • 이 은혜는 직접적이고 막을 수 없지만 강제가 아니다. 죄의 강압에서 건져 내는 설득이다.
  • 중생은 새 실체 주입도 겉 고침도 아니고, 마음에서 시작해 몸까지 전인을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하는 성향의 갱신이다. 그 생명은 처음부터 교제의 생명이다.

1. 하나님의 부르심 원서 857–862쪽

삼위 하나님은 처음 창조에서 말씀과 영으로 일하셨고, 새 창조에서도 같은 방식으로 일하신다. 원칙은 은혜는 자연을 없애지 않고 회복한다는 것이다.

율법의 외적 부르심

  • 자연·역사·삶의 경험·양심을 통해 모든 사람에게 이른다.
  • 구원하지는 못한다.
  • 그러나 죄로 무너진 세상에서도 종교·도덕·가족·국가가 유지되는 뿌리다. 이 땅도 하나님께 가치 있다는 증거다.

복음의 부르심

  • 율법이 아니라 은혜에서 흘러나와 믿음으로 초청한다.
  • 늘 성령의 증언이 따른다.
  • 그리스도의 명령대로 모든 사람에게 무차별적으로 선포해야 한다.
반론바빙크의 답
선택과 제한 속죄는 보편적 부르심을 부정한다 (아르미니우스주의자·보편구원론자)사람은 택자나 유기자가 아니라 구속이 필요한 죄인으로서 복음을 듣는다.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상대 진영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수용을 조건으로 한 가능성만 말한다.
부름받은 모두가 믿지는 않는데 어떻게 조화되는가?결과와 보편적 제안의 조화는 우리 몫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임이다. 방편을 쓰기 전에 결과부터 확인하려는 유혹을 피해야 한다. 거부하는 자는 불신앙의 죄에 스스로 책임이 있다.
  • 예비적 은혜: 출생지·가족·교육·고난과 복 같은 자연적 환경은 올바른 의미의 예비적 은혜다. 하나님이 중생과 교회 직분을 위해 사람을 준비시키는 방편이다. 다만 인간 의지가 이를 구원 은혜로 키운다는 아르미니우스적 뜻은 아니다. 중생의 영적 생명은 앞선 자연적·도덕적 생명과 본질이 다르다.
  • 그래서 개혁파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외적 부르심과 내적 부르심을 구분한다. 죄가 보편적이라 말씀만으로는 부족하고, 믿음의 차이는 하나님의 긍휼로만 설명된다(고전 4:7; 롬 9:16).

2. 거듭남 원서 862쪽

하나님이 사람 안에 변화를 일으키는 행위를 성경은 거듭남이라 부른다. 열매는 새 마음, 새 창조,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 하나님의 집으로 묘사된다. 모두 사람의 성취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다.

반응 없는 부르심

완강히 저항하고 믿기를 거부한다. 복음은 이해할 수 없는 어리석은 것이 되고, 생명의 말씀이 아니라 심판의 말씀이 된다(마 22:14; 고후 2:15–16).

효력 있는 부르심

여기서 하나님의 선택이 실제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신약은 신자를 그냥 ‘부르심을 받은 자’라 부른다. 그리스도께 속해 그와의 교제 가운데 산다는 뜻이다(롬 8:30; 고전 1:24).

단서두 부르심의 내용은 다르지 않다. 차이는 말씀 자체가 아니라 성령의 효력에서 온다. 같은 복음이 어떤 이에게는 걸림돌이, 어떤 이에게는 능력이 된다.

3. 거듭남 용어와 신비종교 원서 863쪽

  • 효력 있는 부르심은 총체적이다. 말씀과 성령, 내적·외적, 직접·간접의 모든 일하심으로 죽었던 사람을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 팔링게네시아(παλιγγενεσια)는 신약에만 있는 말이 아니다. 거듭남 개념은 고대 근동, 특히 미트라교 같은 신비종교에서 두드러진다. 그래서 일부 학자는 기독교 중생을 죽었다 사는 신 숭배에서 빌려 왔다고 설명했다.
바빙크의 반박① 그 사상과 풍습은 전혀 다른 종교 환경과 세계관에서 나왔다. ② 초기 교회의 신앙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중심으로 삼았고 처음부터 이방 종교에 반대했다. ③ 신약은 당대 그리스어를 썼지만(복음을 듣게 하는 유일한 길) 더 깊은 의미를 부여했다. 소테리아(구원), 조에(생명), 아포뤼트로시스(구속)도 마찬가지다. 단어의 출처와 의미의 출처는 다르다.

4. 구약과 신약의 거듭남 원서 863–864쪽

구약에서 말씀은 먼저 언약 백성 전체를 향했다. 백성의 반역이 드러나자 예언자들은 개인의 마음에 내적 변화가 와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러나 표범이 얼룩을 바꿀 수 없듯(렘 13:23) 사람은 이 변화를 만들 수 없다. 하나님만이 마음의 할례와 새 마음, 새 영을 약속하신다.

증언거듭남의 표현
구약마음의 할례, 새 마음, 새 영 (신 30:6; 겔 36:25–26; 시 51:10–12)
요한의 세례·예수·사도한결같이 메타노이아(μετανοια, 급진적 돌이킴)를 요구
베드로새 생명의 내용 = 산 소망. 신자를 하늘 유업에 붙들고 거룩한 삶을 가능케 하는 살아 있는 힘
바울믿음에 의한 칭의와 양자 됨,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아나는 연합
요한위로부터, 물과 성령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남. 물은 성령의 깨끗케 하심의 상징
표현은 다르지만 모두 하나님의 일이며 사람의 내적 새로워짐이다. 이 변화는 세례로 드러나고 인쳐진다.
거듭남의 범위: 마음의 시작에서 만물의 회복까지
새 생명의 원리믿기 전에 성령이 심으신 것
도덕적 갱신거룩한 삶으로 드러나는 것
온 세상의 회복새 하늘과 새 땅의 완성. 신자는 하나님 나라의 첫 열매

거듭났다고 죄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요한은 죄가 신자에게 붙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하나님의 씨가 그 안에 머물기에(요일 3:9)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사랑을 드러내라고 권고한다.

5. 초기 교회의 세례와 중생 원서 866쪽

  1. 선교 상황세례로 상징된 거듭남은 유대교·이교와의 완전한 단절, 삶의 대전환. 세례와 중생은 자연스럽게 하나.
  2. 유아세례 보편화교회가 유아와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어 회원을 얻게 됨. 자녀는 교회의 신앙에 근거해 세례.
  3. 의미 변화세례 = 옛 삶과의 단절이 아니라 초자연적 능력의 주입. 중생 = 세례 때 성례적 은혜의 주입. 동방도 비슷(영혼에 새 자질을 심음).
  4. 결과중생이 교회의 중재를 거친 칭의로 변질. 평생 교회와 사제에 의존하고, 중생은 인간의 지속적 노력으로 유지되는 무엇이 됨.
갈림길개혁파는 중생을 하나님의 주권적 일로 보고, 로마 가톨릭은 성례적 주입과 인간 노력에 매어 둔다. 바빙크가 세례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다. 세례는 중생을 드러내고 인치는 표이지 중생을 만드는 원인이 아니다.

6. 종교개혁 이후 중생론 원서 867–871쪽

종교개혁은 영혼과 하나님 사이의 성례 체계를 걷어내고, 교회보다 성경에, 성례보다 말씀에 권위를 두었다. 그러나 곧 시험대에 올랐다.

  1. 재세례파교회와 성례를 은혜의 방편에서 아예 뺐다.
  2. 루터파반대로 중생을 다시 세례(사실상 교회)에 묶었다. 믿음 이전의 첫 중생과 그 뒤의 이차적 갱신이라는 이원론.
  3. 개혁파‘세례 전 중생’으로 답하려 했으나, 세례받고도 믿음에 이르지 못하는 이들이 걸렸다. 중생이 회개보다 논리적으로 앞선다고 하되 시간 순서는 못 박지 않았다. 중생은 세례 전에도, 중에도, 뒤에도 일어날 수 있다. 하나님의 자유를 지키는 겸손한 결론.
  4. 세속화 시기순서가 뒤집힘: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해야 한다’.
  5. 계몽주의거듭남 대신 계몽과 도덕적 개선.
  6. 칸트·피히테·헤겔말을 되살림. 근본악과 마음의 혁명은 전적 타락과 닿지만, 범신론 속에서 거듭남은 인간의 행위이자 ‘신적 변이’가 되었다.
  7. 슐라이어마허중생을 신학의 중심에 돌려놓았으나 객관적 칭의의 자리가 없다.
  8. 리츨·헤르만개인의 중생을 체험이나 믿음 자체로 줄였다. 언어는 기독교적이나 내용이 다르다.

7. 중생이 믿음보다 앞선다 원서 872쪽

선교 현장에서는 먼저 회개하고 믿으라고 외치는 것이 자연스럽다. 그러나 성경과 경험을 돌아보면 순서는 반대다.

논거 1: 언약의 자녀

회개가 중생보다 먼저라면 유아기에 죽은 신자의 자녀는 회심하지 못했으니 잃어버린 바 된다. 그러나 은혜언약 교리는 그들을 구원 안에 둔다.

논거 2: 하나님의 뜻

구원이 사람의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면 새 생명이 먼저 주어져야 회개가 나온다. 펠라기우스가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를 택해야 한다.

실천적 위험중생을 지나치게 앞세우면 어떤 이는 회개와 믿음의 필요를 가볍게 여기고, 어떤 이는 자기 중생이 확실치 않아 하나님만 기다리며 복음의 부름에 손을 놓는다.
  • 유아세례: 개혁파는 중생과 믿음을 구분하고 언약의 약속에 근거해 세례를 준다. 성령이 설교와 무관하게 자녀 마음에 주권적으로 일하실 수 있음도 인정한다.
  • 사랑의 판단: 신자의 자녀는 반대 증거가 나타나기까지 거듭난 자로 여긴다. 확정된 지식이 아니라 언약의 약속을 신뢰하는 너그러운 추정이다. 확신의 근거를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둔다.
결론어른이든 아이든, 엄밀한 의미의 중생은 시간적으로는 몰라도 논리적으로는 반드시 믿음과 회개보다 앞선다.

8. 중생의 본질과 범위 원서 873–876쪽

비교 대상왜 부족한가
불교·힌두교의 환생영혼이 변화 없이 여러 몸을 떠돎. 소망이 아니라 불안을 낳는다.
신비종교 입문, 유대교 개종비교로는 부족하다.
의식 변화·계몽·행동 개선중생에 포함되지만 중생은 그것을 넘어선다.
영지주의내적 자아가 육체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신비주의영혼이 신성과 실체적으로 하나 된다고 한다.
반대편 (비유적 이해)예수의 모범을 따르는 삶의 변화로 줄여 중생과 회심을 같게 본다.
  • 개혁파는 중생의 주체를 전 인격으로 본다. 영혼과 몸, 마음, 지성, 의지 전체가 새로워진다. 옛 사람에 대해 죽고 참된 의와 거룩함으로 지어진 새 사람으로 산다.
  • 중생이 행위 → 능력 → 영혼의 본질로 거슬러 올라간다면 그 시작은 무의식에서 일어난다. 그래서 개혁파는 자의식 이전의 자녀도 중생에서 빼지 않았고, 중생의 시기를 꼭 알아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 거듭남은 체험이 아니라 믿음의 문제다.

무의식 해석 ①

기억·숙련처럼 잠겼다 떠오르는 것 → 회심 = 충격으로 의식이 급변하는 사건. 옛 합리주의의 재판.

무의식 해석 ②

천재·예언자의 직관처럼 신비한 힘과 닿은 영역 → 회심 = ‘하나님’이라는 초자연적 요소와의 연합. 옛 신비주의의 재판.

심리학은 현상을 기술할 수 있어도 내적 본성과 진리를 꿰뚫지 못한다. 회심·믿음·기도·칭의가 무엇인지는 성경만 말할 수 있다.

9. 넓은 중생과 좁은 중생 원서 876쪽

넓은 의미의 중생

한 사람의 전적 변화 전체.

좁은 의미의 중생

믿음과 회개에 앞서 심긴 새 생명. 이 생명은 성화로 이어진다.

  • 능동적인 하나님의 말씀(부르심)과, 그것을 수동적으로 받아 열매 맺는 쪽을 구분해야 한다.
  • 밖으로 선포된 말씀은 의식에 설득력 있게 다가오지만, 성령이 안에서 일하셔야 반응할 수 있다. 개혁파는 내적 부르심이 외적 부르심에 논리적으로 앞선다고 보았다.
  • 그러나 구분이 분리는 아니다. 개혁파는 부르심과 중생을 떼어 놓은 적이 없고 신앙고백·교리문답·교의 교본에서 순서를 지켰다. 신앙 공동체가 외적 부르심에 실제로 참여함도 인정했다.
  • 재세례파와 온갖 펠라기우스주의자에 맞서: 외적 부르심과 도덕적 권고만으로는 구원에 불충분하며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반드시 따라야 한다.

10. 불가항력적 은혜 원서 877쪽

성령의 중생시키는 역사는 직접적이고 불가항력적이다. 하나님은 먼저 지성을 밝혀 그 지성이 의지를 바꾸게 하는 간접 방식이 아니라, 친히 마음에 들어와 지성과 의지에 직접 일하신다. 인간의 협력이나 동의에 의존하지 않는다.

‘불가항력적’이라는 말반대자들이 붙인 표현이라 개혁파의 뜻을 다 담지 못한다. 뜻은 분명하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의 의지를 새롭게 하기로 자유롭게 정하시면 아무도 막을 수 없다. 내적 부르심은 항상 효력이 있다.
입장내용
트리엔트 공의회성령의 조명을 받은 사람이 거절할 수도 있다.
제1차 바티칸 공의회사람은 저항할 수 있으면서도 은혜에 동의하고 협력한다.
바빙크의 평가반(半)펠라기우스주의. 아우구스티누스와 토마스를 누르고 재세례파·소키누스주의자·후기 루터파·항변파에 받아들여졌다.
항변파충분한 외적 부르심과 효력 있는 내적 부르심, 기뻐하시는 뜻과 계시된 뜻의 구분을 흐려 ‘거부할 수 있다’고 답했다.

쟁점은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 외적 부르심을 거부하느냐가 아니다. 하나님이 효력 있는 은혜로 일하시는 바로 그 순간에 거부할 수 있느냐다. 개혁파의 답은 ‘아니오’다. 도르트가 확증한 본성의 부패·선택·속죄의 범위·성도의 견인이 모두 이 답을 중심으로 묶여 있다.

근거 ① 강력한 은혜의 표현

마음에 할례를 행하심(신 30:6), 새 마음을 주심(겔 36:26), 아버지가 이끄심(요 6:44), 죽은 자를 살리심(엡 2:1), 소원과 행함을 이루심(빌 2:13), 거듭나게 하심(벧전 1:3).

근거 ② 타락한 인류의 묘사

눈멀고 무능하며 죄로 죽음(렘 13:23; 롬 8:7; 고전 2:14; 고후 3:5). 죽은 자는 스스로 살아날 수 없으므로 은혜는 효력 있고 꺾이지 않아야 한다.

11. 효력 있는 은혜 반론 응답 원서 879–880쪽

반론바빙크의 응답
경고·권면 구절들이 자유와 책임을 증명한다 (항변파)자유의지에서 출발하면 효력 있는 은혜 본문을 다룰 수 없다. 하나님의 권리에서 출발하는 노선은 인간을 이성적·도덕적 존재로 대하는 구절에도 자리를 남긴다.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주권을 잃고, 의지가 홀로 동의할 수 있다면 중생은 불필요하며, 선행적 은혜가 필요하다면 중립적 의지는 허구다.
유아기에 죽는 아이들은 어떻게 되는가?스스로 선택한 것이 없으니 주권적 은혜로만 구원받거나, 아니면 모두 잃어버린 바 된다. 그래서 펠라기우스적·아르미니우스적 입장은 자비롭지 않다.
왜 모두에게 은혜를 주지 않으시는가?펠라기우스도 아우구스티누스도 답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에 만족해야 한다. 동시에 복음은 모든 피조물에게 전파되어야 하고, 외적 부르심은 인류에게 복이다.
너무 강압적이다죽음의 위기에서 구출된 사람이 선택권이 없었다고 불평할 수 있는가? 그러나 실제로는 하나님 편에서 어떤 강제도 없다. 타는 장작처럼 낚아챔을 당한 경건한 사람 중 강제를 불평한 이는 없다. 하나님은 강제하지 않고 설득하신다.

자연에서도 영적 영역에서도 배분은 균등하지 않다. 이를 보응(카르마)이나 행위의 보상으로 설명하는 것은 복음과 맞지 않는다. 예수는 심령이 가난한 자를 복되다 하시고 잃어버린 자를 찾으러 오셨다. 값없고 전능한 은혜가 복음의 중심이다.

12. 중생의 목적: 영적인 사람 원서 882쪽

  • 목적은 성령을 따라 행하고 사는 ‘영적인 사람’이다. 홀로 선 종교 체험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나누는 교제의 일부다.
  • 성경의 이름들: 할례받은 마음, 부드러운 마음, 새 피조물, 새 사람, 새 생명. 거듭난 사람은 만물을 분별하고 영적 제사를 드리며, 생명을 주는 영이 되신 둘째 아담의 형상을 지니고, 장차 영적인 몸을 받는다.
  • 여기서 영은 막연한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시다. 그리스도가 영을 온전히 받으셨기에 친히 ‘생명을 주는 영’이라 불리시고, 하나님의 영은 이제 그리스도의 영이다.
  • 특별 은사가 줄어든 뒤 성령은 예수를 주로 고백하게 하고, 자녀 됨을 확신시키며, 사랑을 부어 주고, 거룩하게 하시며, 열매를 맺게 하고, 신자를 인치시는 분으로 받아들여졌다.

거듭난 생명: 주관적으로

믿음의 생명이라 할 수 있다(갈 2:20).

거듭난 생명: 객관적으로

영의 생명, 그리스도의 생명, 신자 안의 하나님의 생명. 기원과 본질이 초자연적·기적적이다. 바람처럼 출처를 설명할 수 없다(요 3:8).

교제의 생명영의 생명은 개인에게 주어진 선물이지만 처음부터 교제의 생명이다. 신자는 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되고(고전 12:13), 한 성령으로 아버지께 나아가며(엡 2:18), 함께 하나님의 처소로 지어진다. 거듭남은 고립된 개인의 사건이 아니다.

13. 중생의 본질: 본성의 회복 원서 883–885쪽

  • 중생은 인간의 성취도, 도덕적 개선도, 생리적 변화에 따르는 정신 현상도 아니다. 사람이 생명 자체를 못 만들듯 자기 중생도 부분적으로조차 못 만든다. 오직 하나님의 창조적 행위이며 성령의 초자연적 활동의 열매다.
  • 필요한 이유: 선하게 지어진 인간이 죄로 전적으로 부패해 하나님과 사귈 능력을 잃었다. 그래서 존재 전체에 미치는 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두 번째 창조는 아니다

  • 신자는 여전히 온전한 사람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다. 자아의 연속성이 유지된다.
  • 재창조는 세상을 파괴하고 무에서 다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허무에 굴복한 피조물을 해방하는 일이다.
  • 죄는 창조의 본질이 아니라 뒤틀림이고, 그리스도는 둘째 창조자가 아니라 구속자이시다.

그러면 무엇인가

  • 실체의 주입도 외적 개선도 아니므로 ‘성향’·‘자질’(habits, qualities)의 영적 갱신이다.
  • 생명의 근원인 마음에서 시작한다(잠 4:23). 모든 악이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 몸을 포함한 전인에 미쳐 지체가 의의 도구가 되고 몸의 부활로 이어진다.

「도르트 신조」는 이를 닫힌 마음을 열고 굳은 마음을 부드럽게 하는 일로 말한다. 강제가 아니라 죄의 강압에서 건져 내는 구출이다. 이 생명은 불멸의 씨앗으로서, 때가 되어야 믿음과 회심의 행위로 드러난다(19장으로 이어짐).

구조도

밖에서 부르시는 말씀 율법의 외적 부르심 자연·역사로 모두에게 복음 선포 은혜에서 나와 믿음 초청 내적 부르심 성령이 선택을 실현 안에서 낳으시는 성령 중생 마음에 새 생명 (무의식) 믿음·회심 심긴 생명이 때가 되어 드러남 영적인 사람 하나님 형상 회복·교제 논리적 선행 직접적·불가항력적이나 강제가 아닌 설득 · 새 실체 주입이 아닌 성향의 갱신 마음에서 시작해 몸까지 · 세례는 인침이지 원인이 아님
말씀은 밖에서 부르고 성령은 안에서 낳는다. 중생은 믿음·회심보다 논리적으로 앞선다
입장그 입장의 주장바빙크의 답
로마 가톨릭(트리엔트·바티칸)사람은 은혜에 협력하며 거절할 수도 있다효력 있는 은혜가 역사하는 순간에는 거부할 수 없다. 거부 가능한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을 빼앗는다.
루터파중생은 세례와 함께 주어지고 세례에 묶인다중생은 세례 전·중·후 어느 때든 일어날 수 있다. 성령은 주권적으로 역사하신다.
재세례파개인의 신앙고백이 있어야 세례를 줄 수 있다외적 부르심과 권고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의식 이전 자녀도 중생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항변파경고와 권면 구절들이 자유의지와 책임을 증명한다하나님의 권리에서 출발해도 책임의 여지가 남지만, 자유의지에서 출발하면 은혜 본문을 설명할 수 없다.
계몽주의·헤르만거듭남은 도덕적 개선이거나 신앙 체험이다중생은 체험이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며, 존재의 중심을 새롭게 하는 성령의 창조 행위다.
신비주의·신지학중생은 영혼이 신성과 실체적으로 하나 되는 것새 실체의 주입이 아니라 창조된 본성의 회복이다. 자아의 연속성은 유지된다.

오해와 바른 이해

오해 ✕

  • 선택 교리는 복음의 보편 선포를 막는다.
  •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끝내 거절할 수 있다.
  • 불가항력적 은혜는 사람을 꼭두각시로 만든다.
  • 중생은 세례 때 주입되는 성례적 은혜다.
  • 중생은 내가 믿은 결과로 얻는 것이다.
  • 거듭난 사람은 그 시점을 반드시 안다.
  • 거듭남은 도덕적 개선이나 신앙 체험이다.
  • 중생은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바른 이해 ✓

  • 복음은 죄인 모두에게 가리지 않고 전하라는 명령이며 결과는 하나님께 맡긴다.
  • 하나님이 뜻하시면 막을 수 없다.
  • 강제가 아니라 죄의 강압에서 풀어내는 하나님의 설득이다.
  • 말씀과 성령의 일이며 세례 전·중·후 어느 때든 가능하다.
  • 시간은 몰라도 논리적으로는 늘 믿음과 회개에 앞선다.
  • 중생은 무의식에서 일어나며 보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 마음 깊은 곳의 성향을 새롭게 해 전인을 바꾸는 하나님의 일이다.
  • 본성은 그대로 두고 죄로 뒤틀린 것을 하나님 형상으로 회복한다.

핵심 용어

외적 부르심
자연·역사·경험과 말씀 선포로 모든 사람에게 이르는 하나님의 부르심.
내적 부르심
선택을 실현하며 구원에 항상 효력을 내는 성령의 부르심. 논리적으로 외적 부르심에 앞선다.
예비적 은혜
출생·가족·교육 등 자연적 환경으로 거듭남과 직분을 준비시키시는 섭리. 의지가 구원 은혜로 키운다는 뜻은 아니다.
팔링게네시아 (παλιγγενεσια)
거듭남·재생을 뜻하는 그리스어. 성경에 두 번 나온다(마 19:28; 딛 3:5).
메타노이아 (μετανοια)
천국에 들어가려는 자에게 요구되는 급진적 돌이킴.
중생 (regeneration)
넓게는 인간의 전적 변화, 좁게는 믿음·회개에 앞서 심긴 새 생명.
불가항력적 은혜 (효력 있는 은혜)
하나님이 의지를 새롭게 하기로 하시면 아무도 거스를 수 없음. 강제가 아닌 설득.
신적 변이 (divine transmutation)
관념주의가 말한, 인간의 행위이자 하나님의 일인 거듭남.
성향 (habitus) · 자질
행위 이전에 사람 안에 자리한 내적 경향성. 중생이 영적으로 새롭게 하는 대상.
사랑의 판단
반대 증거가 없는 한 신자의 자녀를 거듭난 자로 여기는, 언약의 약속에 근거한 너그러운 추정.
항변파
효력 있는 은혜를 거부할 수 있다고 본 아르미니우스파.

성경 근거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3:5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한복음 3:8
구절이 장에서의 쓰임
마 28:19모든 사람에게 선포하라는 명령. 복음의 무차별적 선포.
마 22:14부름받은 많은 이들 중 오지 않는 이도 있음. 반응 없는 부르심.
롬 9:16; 고전 4:7구원은 긍휼 베푸시는 하나님께 달림. 믿음의 차이는 은혜로만 설명.
롬 8:30선택이 실현되는 효력 있는 부르심.
렘 13:23스스로 변할 수 없는 인간.
겔 36:26돌 같은 마음 대신 새 마음을 주시는 하나님.
요 3:5, 8물과 성령으로 남. 성령으로 난 자는 바람처럼 출처를 알 수 없음.
엡 2:1, 5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 은혜는 효력 있어야 한다.
고전 12:13한 성령으로 한 몸이 된 공동체의 생명.
잠 4:23생명의 근원은 마음. 중생은 마음에서 시작한다.

복습 문제

율법의 외적 부르심은 구원하지 못하는데도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죄로 무너진 세상에서도 종교·도덕·가족·국가가 유지되는 뿌리이며 복음의 길을 닦는다. 하나님이 아무것에도 무관심하지 않으시고 이 땅도 그분께 가치 있다는 증거다.
선택 교리가 보편적 복음 선포를 막는다는 비판에 바빙크는 어떻게 답하는가?
사람은 택자나 유기자가 아니라 구속이 필요한 죄인으로서 복음을 듣는다.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가 당신을 위해 죽으셨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은 상대 진영도 같다. 결과와 보편적 제안의 조화는 하나님의 책임이며, 거부자는 불신앙에 스스로 책임이 있다.
중생이 믿음과 회개보다 앞선다는 두 논거는?
① 회개가 먼저라면 유아기에 죽은 신자의 자녀는 잃어버린 바 되지만 은혜언약은 그들을 구원 안에 둔다. ② 구원이 하나님의 뜻에 달렸다면 새 생명이 먼저 주어져야 회개가 나온다(아우구스티누스를 택함). 단, 시간상이 아니라 논리상의 선행이다.
‘불가항력적 은혜’ 논쟁의 정확한 쟁점은 무엇인가?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 외적 부르심을 거부하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효력 있는 은혜로 마음에 일하시는 바로 그 순간에 거부할 수 있느냐다. 개혁파는 ‘아니오’라고 답하며, 그 은혜는 강제가 아니라 설득이다.
초기 교회 이후 세례와 중생의 관계는 어떻게 변질되었는가?
선교 상황에서 세례는 옛 삶과의 단절이었으나, 유아세례가 보편화되자 세례가 초자연적 능력의 주입이 되고 중생은 세례 때 주입되는 성례적 은혜가 되었다. 결국 중생은 교회 중재를 거친 칭의로 변질되고 인간의 지속적 노력으로 유지되는 것이 되었다.
중생이 ‘두 번째 창조’가 아니라 ‘회복’인 이유는?
죄는 창조의 본질이 아니라 뒤틀림이고 그리스도는 둘째 창조자가 아니라 구속자이시기 때문이다. 신자는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온전한 사람이며 자아의 연속성이 유지된다. 중생은 새 실체 주입이 아니라 마음에서 시작해 전인에 미치는 성향의 영적 갱신이다.
한 줄부르심은 하나님의 일이며, 중생은 죽은 마음에 심긴 새 생명이다.

책의 저작권은 저자와 출판사에 있습니다. 빛다방 학습·심화 노트를 바탕으로 한 개인 학습용 정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