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세계를 어떻게, 왜 지으셨는가?
-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이 참된 종교의 출발점이다. 삼위 하나님은 재료 없이 뜻과 말씀만으로 세계를 무로부터 지으셨다. ‘무로부터’는 무가 재료라는 뜻이 아니라 질료인을 배제한다는 뜻이다.
- 창조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나온다. 성자의 영원한 나심이 없었다면 창조도 불가능했다. 그리스도는 재창조뿐 아니라 창조의 중보자이자 세상의 목적인이다.
- 세상은 시간 안에서가 아니라 시간과 함께 지어졌다. 하나님은 필요가 아니라 기쁨으로 자기 영광을 위해 지으셨다.
- 천사는 몸 없는 섬기는 영이다. 그 존재의 근거는 경험이 아니라 오직 성경이며, 하나님의 형상은 오직 사람에게만 있다. 수호천사론·천사 중보기도·천사 숭배는 거부된다.
- 창세기 1장은 신화가 아닌 역사이며, 신학과 과학은 같은 세계를 보기에 갈라놓을 수 없다. 하나님은 지으신 뒤에도 매 순간 보존·협력·통치하시니, 신자는 감사와 인내와 소망을 얻는다.
1. 창조와 그에 대한 종교적 경쟁자들 원서 465–471쪽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은 창조와 함께 실현되기 시작한다. 창조는 “하나님은 지으신 분, 우리는 지어진 존재”라는 구별을 세운다. 성경의 창조 교리는 존재 문제에 대한 철학 이론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종교적·윤리적 가르침이다. 찬양(시 19)과 겸손(롬 9:20)과 위로(시 121:2)를 낳는다.
| 입장 | 세계의 기원 | 바빙크의 비판 |
|---|---|---|
| 이교 우주생성론 | 신들의 계보학. 원시 물질 전제 → 유출·진화·이원론. 바빌론: 벨이 혼돈 티아마트로 세계를 만듦 | 신들보다 먼저 물질이 있음 |
| 그리스 철학 | 퓌시스(자연)·코스모스(세계)는 알았으나 크티시스(창조)는 몰랐다. 신은 있는 재료로 빚는 데미우르고스 | 창조 개념 부재 |
| 범신론·유출설 | 위 디오니시우스·에리우게나 → 스피노자·셸링·헤겔. 피히테·슐라이어마허는 창조 교리를 거부하거나 무의미하게 함 | 하나에서 여럿이 나오는 과정을 말로만 꾸밈(말놀이). 그 절대자는 결국 내용 없는 무 |
| 유물론 | 영원한 물질 원자의 운동 | 과학이 아니라 과학을 빙자한 종교적 세계관. 처음과 끝은 관찰 밖. 물질을 신격화하는 자기모순 → 결국 범신론으로 |
| 기독교 | 교회는 단순히 “천지의 창조주”를 고백한다(롬 11:36; 계 4:11) | |
2. 삼위일체 하나님에 의한 무로부터의 창조 원서 471–477쪽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는 두 가지를 지킨다: 창조주와 세계의 본질적 구별, 그리고 세계가 하나님께 의존해서만 있다는 우연성.
- 단어 하나로 증명할 수는 없다. ‘바라’, ‘크티제인’은 사람의 행위에도 쓰이고, ‘무로부터’라는 문구는 정경이 아닌 마카베오하 7:28에 나온다. 그래도 성경은 내용상 분명히 가르친다.
- 창 1:1–3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땅은 혼돈했고…”로 읽어 혼돈한 땅을 선재 재료로 만드는 번역은 거부한다. 엘로힘은 재료로 작품을 빚는 조각가가 아니라 말씀으로 불러내시는 분이다.
- 하나님만 영원하시다(시 90:2).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고(롬 4:17),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되지 않았다(히 11:3).
(1) 무로부터와 유출·나심 원서 473쪽
‘무’는 어떤 실체가 아니다(에리우게나는 하나님을 ‘무’라 불렀고, 헤겔은 무를 ‘존재이자 비존재’로 정의). ‘-로부터’(ex)는 원인을 가리키지 않고 질료인만 배제한다. 세계의 원인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다. 이 표현은 영원한 물질, 무형의 물질, 존재론적 유출을 뿌리에서 자른다.
영지주의 유출만
창조를 부정하고 유출만 인정 → 세계를 신격화.
기독교 이중 전달
- 나심: 영원 전, 성자에게 완전한 형상을 전함
- 창조: 시간 안, 피조물에게 희미한 형상을 전함
아리우스주의 창조만
유출을 부정하고 창조만 인정 → 성자를 피조물로, 세계를 현세적인 것으로.
(2) 삼위일체 하나님이 창조 주체 원서 474쪽
창조의 주체는 중간 존재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이다(이레나이우스: 천사를 포함한 어떤 외적 수단도 필요 없으셨다). 아우구스티누스: 창조세계는 삼위일체의 흔적(vestigium trinitatis)을 지닌다. 외향적 사역은 나뉘지 않지만 직무의 구별은 있다.
| 위격 | 창조에서의 역할 |
|---|---|
| 성부 | 창조의 주도권. 경륜적 의미에서 창조는 특히 성부께 돌려짐 |
| 성자 |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격적 지혜인 로고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일관성을 얻고(골 1:17), 그를 위해 창조됨(골 1:16) |
| 성령 | 밖에서 작동하는 힘이 아니라 내재하는 인격적 원인. 만물이 하나님 안에서 살고 형태를 받고 목적으로 인도됨 |
(3) 창조 중보자 성자 로고스 원서 476–477쪽
- 구약: 말씀으로 창조(시 33:6), 지혜로 땅의 터를 놓으심(잠 3:19). 신약: 그리스도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 알파와 오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재창조의 중보자이실 뿐 아니라 창조의 중보자시다.
- 창조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해 성령 안에서 나오고, 다시 성령 안에서 성자를 통해 성부께 돌아간다.
- 성자는 세상의 목적인(causa finalis)이다(히 1:2). 세상은 성자를 위해 지어졌고 머리이신 성자 안에서 성부께 돌아간다.
3. 창조의 시간과 목적: 기독교 세계관 원서 478–480쪽
- 범신론: 세계는 하나님의 영원한 자기계시, 창조도 영원하다. 오리게네스: 영원한 물질 대신 영원한 창조(우리 세계 전후의 무수한 세계) → 니케아 때 정죄.
- 바빙크: 영원하신 분은 하나님뿐이다. 시간은 유한한 피조물의 존재 방식이므로, 아무리 뒤로 늘려도 영원이 되지 않는다. 영원에는 이전과 이후가 없으니 ‘영원한 창조’는 성립하지 않는다.
- “창조 전에 하나님은 무엇을 하셨나?”는 하나님을 시간 안에 두고 일을 고된 것으로 가정하는 어리석은 질문이다(아우구스티누스·루터·칼뱅은 잠 26:5로 응답). 하나님은 순수 현실태로서 쉬면서 일하시고 일하면서 쉬신다.
- 창조는 하나님께 변화를 가져오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원한 뜻은 하나님 안에 변화 없이 시간 안에 결과를 낳는다. 이 뜻은 이슬람교·유명론·소키누스주의·데카르트주의의 변덕스러운 의지가 아니라 거룩한 목적과 동기를 지닌다.
(1) 창조의 동인과 목적: 영광 원서 481–482쪽
성경은 창조의 이유를 한결같이 하나님의 뜻(계 4:11)으로 돌리고,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사 43:7)으로 제시한다. 넘치는 풍성함이 흘러나왔다는 유출론도,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 되려면 세상이 필요하다는 ‘빈 가능태’ 이론도 거부한다. 세상은 우리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강조는 테르툴리아누스·안셀무스를 거쳐 개혁주의에서 모든 교리와 실천의 근본 원리가 되었다.
| 반론 | 바빙크의 답 |
|---|---|
| 하나님을 자기중심적 존재로 만든다 | 사람도 합당한 영예를 요구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더욱 그렇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합당한 영광 외에 다른 것을 추구하실 수 없다. 그 영광은 사람을 깎지 않고 높인다(이레나이우스: 하나님의 영광이 사람을 살게 한다) |
| 창조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운다 | 의무로 하는 과업과 자유로운 창조력의 예술 활동은 다르다. 하나님은 필요해서가 아니라 창조하려는 뜻과 창조 행위 자체를 기뻐하셔서 지으셨다. 그래서 창조주께 ‘예술가’ 범주가 합당하다 |
(2) 창조와 기독교 세계관 원서 483–485쪽
- 범신론은 세계를 신격화하고, 유물론은 맹목적 힘으로 환원한다. 둘 다 풍성한 구분을 지루한 균일함으로 녹이고 의식적 목적을 부인한다. 창조 교리는 깊은 통일성과 피조물의 다양성을 함께 인정한다.
- 세상을 부르는 말: 올람·아이오네스(시대·역사·지향점), 코스모스·문두스(아름다움·조화). 그래서 세상은 역사이자 예술 작품, 성장하는 몸이자 세워지는 건물이다(엡 2:21; 벧전 2:5).
- 아우구스티누스(『하나님의 도성』): 통일성은 획일성이 아니라 존재의 위계에 따른 다채로운 다양성. 칼뱅: 우주에 하나님 영광의 불꽃이 없는 티끌은 없다. 세상은 신적 영광의 거울이자 극장이다.
- 기독교는 자연을 경멸하지도 신격화하지도 않는다. 창조주 고백은 거짓 낙관과 오만, 절망을 함께 몰아낸다. 락탄티우스: 만사의 요약은 하나님을 알고 경배하며 영원히 섬기는 것이다.
4. 천상: 영적 세계 원서 486–489쪽
근대에 천사 믿음은 쇠퇴했다. 18세기 학자들은 천사와 인간의 경계를 지웠고, 스베덴보리는 천사가 본래 사람이라 했으며, 슐라이어마허는 예수와 사도들의 천사 가르침을 대중 상상에 맞춘 동화로 보았다. 19세기 중반에는 강신론자들이 나타났다.
거부할 시도들 ✕
- 천사를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의 필수 중재자로 증명 → 영지주의적 범신론
- 천사·귀신을 내면 갈등의 투사로 보는 환원주의
- 강신술: 입증 불가, 속임수와 폭로의 역사, 건강에 해롭고 성경이 금함(신 18:11)
- 다른 행성의 이성적 생물: 사변
바른 근거 ✓
- 영적 세계에 대한 믿음은 철학적이 아니라 종교적이다. 초월·기적·계시에 대한 확신의 표현
- 과학·철학은 영적 실체를 부정할 정당한 논증이 없다
- 근거는 경험이 아니라 오직 성경. 예수와 사도들이 공개적으로 말함(마 18:10; 고전 6:3; 히 12:22)
- 신앙의 대상은 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의 은혜
(1) 성경의 천사 원서 489–491쪽
“‘천사’라는 이름은 그들의 본성이 아니라 직무에서 유래한 것이다.” 말르아크·앙겔로스는 사람 사신에게도 쓰인다(말 3:1). 영적 존재들은 하나님의 아들들, 영, 거룩한 자들, 순찰자들로도 불린다. 영적 세계도 물질 세계처럼 다채로워 등급·지위·직무의 차이가 있다.
| 천사 | 성경의 모습 | 성격 |
|---|---|---|
| 그룹들 | 에덴을 지킴(창 3:24), 속죄소를 날개로 덮음, 하나님이 그 사이에 좌정·그룹을 타고 오심, 계시록의 네 생물(계 4:6). 소·사자·독수리·사람은 능력의 상징 | 하나님의 거룩을 지키는 능력 있는 인격적 천사 |
| 스랍들 | 여섯 날개로 보좌 주위에서 섬기며 영광을 칭송(사 6), 제단에서 섬기고 속죄를 가져다줌 | 고귀한 천사 |
| 가브리엘 · 미가엘 | 다니엘서의 고유한 이름(단 10:13), 신약도 이어받음 | 이름을 가진 천사 |
| 천사 계급 | 통치자들·권세들·주관자들·보좌들·능력들. 만군·군대·군단·천천만만(단 7:10) | 수가 매우 많음 |
(2) 천사의 창조와 영적 본성 원서 492–493쪽
- 천사는 피조물이다(골 1:16). 시기는 성경이 침묵하지만 일곱째 날 이전임은 분명하다(창 2:1–2). 창 1:1의 ‘하늘’은 예기적 용어이며, 천사의 거처도 점진적으로 형성되었을 수 있다.
- 천사는 하나님처럼 단순·편재·영원하지 않아 미세한 육체를 돌리는 이들이 있었다. 바빙크는 거부한다: 결혼하지 않고(마 22:30), 영은 살과 뼈가 없고(눅 24:39), 한 사람 안에 ‘군대’가 거할 수 있다.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도 천사의 본성을 영적이라 했다.
- 창 6:2의 ‘하나님의 아들들’은 천사가 아니다(형벌이 사람에게만 내려짐). 가시적 현현은 육체성을 증명하지 않는다(사 6). 시 104:4는 하나님이 바람과 불처럼 천사를 사역자로 쓰신다는 뜻이다.
- 깊은 이유는 세계관이다. 영과 물질, 하늘과 땅의 경계를 지우면 범신론적 동일철학에 이른다. 천사는 사람보다 시공간에서 자유롭지만 하나님처럼 초월하지는 않는다.
(3) 천사의 지성과 도덕성 원서 494–495쪽
로마 가톨릭 스콜라
- 천사는 창조 때 받은 본유관념으로 직관적으로 안다
- 하나님 안에서 모든 것을 보므로 우리 필요를 안다 → 천사·성인에게 기도하는 관행 변호
개신교(바빙크)
- 세 통로: 자신의 본성, 하나님의 사역을 상고함, 계시
- 마음의 은밀한 생각(왕상 8:39)과 미래(막 13:32)는 모름
- 지식은 제한적이며 자라남(엡 3:10)
천사는 모두 도덕적 존재다. 마귀가 본래 자리를 지키지 않았다는 말씀(요 8:44; 유 1:6)은 모든 천사가 처음에는 선했음을 전제하므로 마니교적 이원론이 배제된다. 선한 천사도 죄지을 수 있다는 오리게네스·항변파에 맞서, 바빙크는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선한 천사가 은혜로 보존된다고 본다(딤전 5:21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4) 천사와 인간: 형상은 인간만 원서 495쪽
| 구분 | 천사 | 인간 |
|---|---|---|
| 공통점 | 피조된 영적·이성적·도덕적 존재. 본래 지식·의·거룩. 하나님의 아들들로 불림(욥 1:6; 눅 3:38) | |
| 하나님의 형상 | 없음. 순수한 영이라 하나님께 더 가깝다는 생각은 거부 | 오직 인간만. 몸을 지닌 감각적 존재, 땅에 대한 통치권(창 1:26) |
| 지위 | 왕이 아니라 종, 섬기는 영(히 1:14) | 예언자·제사장·왕의 직분 회복 |
| 관계 | 혈연 없음 → ‘천사성’ 없음. 아담 안의 유기적 타락도, 그리스도 몸의 구속적 일치도 없음 | 관계에서 훨씬 풍성. 형상의 충만은 인간성 안에서만 펼쳐짐 |
| 그리스도 | 창조주이자 머리이나 화해자·구원자는 아님. 구원의 신비를 보기 원함(벧전 1:12) | 교회를 이룸: 그리스도의 신부, 성령의 전 |
5. 천사의 사역과 천사 숭배 원서 496–500쪽
(1) 천사의 사역과 수호천사론 원서 496–499쪽
특별한 사역
- 구속사의 결정적 순간에 참여: 에덴, 족장 계시, 율법 수여(갈 3:19), 예언자
- 예수의 탄생·시험(마 4:11)·수난·부활·승천(행 1:10)
- 사도 시대 이후 중단, 재림 때 재개(마 24:31; 25:31)
- 천사는 구원을 성취하지 않는다. 계시 전달·보호·싸움으로 섬길 뿐
일반적 사역
- 밤낮 하나님을 찬미(시 103:20)
- 죄인의 회개를 기뻐함(눅 15:10)
- 신자와 작은 자를 지킴
- 신자를 아브라함의 품으로 데려감
| 주장 | 지지 | 거부 | 본문 검토 |
|---|---|---|---|
| 수호천사(도시·민족·개인) | 헤르마스의 목자, 오리게네스, 교부들, 로마 가톨릭, 『로마 교리서』 | 칼뱅과 대부분의 개혁파(소수 예외) | 단 10장: 영적 전쟁에 천사들이 양편에서 싸운다는 것뿐. 계 1:20의 ‘앙겔로이’는 목회자·대표자. 마 18:10도 일반적 진술을 넘지 않음 |
| 천사의 중보기도 | 루터파 신앙고백서 | 개혁파 만장일치 | 눅 15:7, 10의 기쁨, 계 8:3의 향로도 중보기도가 아님 |
(2) 천사 숭배 거부와 참 공경 원서 499–500쪽
- 신약골 2:18이 천사 숭배를 경고. 천사는 자신이 ‘동료 시종’이라며 요한의 경배를 거부(계 19:10; 22:9). 구약의 여호수아는 천사에게 경배(수 5:14)
- 암브로시우스처음으로 천사에게 간구하라고 명시. 교회는 ‘존경하다’와 ‘경배하다’를 구별하려 함
-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천사에 대한 간구 승인
- 트리엔트 · 『로마 교리서』간구는 ‘선하고 유익하다’. 천사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며 우리 구원의 보증을 맡았다고 정당화
- 개신교루터파·개혁파 모두 천사 숭배를 성인 숭배와 함께 거부
로마 가톨릭의 구별
하나님께 드리는 경배(λατρεία)와 성인·천사에게 드리는 공경(δουλεία)은 다르다.
바빙크의 반박
종교적 공경과 일상 예의의 공경을 나누는 것은 합당하다. 그러나 천사에게 돌리는 공경은 성격상 종교적이다. 성경은 높고 낮은 두 종류의 종교적 공경을 모른다. ‘둘레우에인’은 하나님께(마 6:24), ‘라트레우에인’은 사람 섬김에도 쓰인다 → 어원학적으로도 성경적으로도 자의적.
6. 지상: 물질 세계 원서 502–504쪽
- 물질 세계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 과학의 정당한 대상이다. 그래도 피조물은 하나님의 작품이므로 그것을 다루는 일은 신학이다. “신학자, 철학자, 자연과학자는 같은 세계를 다루고 있다.” 구별되나 분리될 수 없다.
- 과학은 사실을, 종교는 가치만 다룬다는 분업은 이론적으로도 실천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모든 학문은 종교적 확신 위에 서고, 모든 종교는 우주생성론을 지닌다. 사실을 과학에 넘기면 창조 교리의 역사적 토대를 포기하게 된다.
| 범바빌론주의의 주장 | 바빙크의 반박 |
|---|---|
| ‘테홈’, ‘토후 와보후’, 라합·리워야단·용·뱀 같은 표현으로 보아 창세기 1장은 『에누마 엘리쉬』에 의존한다 | ① 이 용어들은 구약에서 다양하게 쓰여 티아마트와 동일시할 이유가 없다(사 27:1). ② 출애굽 같은 구속사에서 하나님이 꺾으신 세력을 가리키는 시적 이미지다(시 74:13–14; 사 51:9–10). ③ 티아마트는 신들보다 먼저 있다가 저항하는 혼돈이지만, 테홈은 창조된 무형의 땅이다. 창세기는 신들의 기원을 말하지 않고 유일신론과 무로부터의 창조를 가르친다. |
(1) ‘일주일’ 창조와 과학 원서 504–505쪽
창 1:1은 2절의 땅의 기원을 알려 주는 독립된 사실 기록이다. 2절의 땅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도, 이교의 혼돈도, 파괴되거나 하나님께 저항하는 땅도 아니다. 아직 덜 형성된 땅, 어둠에 싸인 많은 물이다(“창조된 혼돈이란 모순”).
- 첫 창조(1:1)무로부터 천지를 즉시 나오게 하심
- 덜 형성된 땅(1:2)혼돈하고 공허한 상태, 하나님의 영이 유지
- 6일의 형성(1:3~)이차적 분리와 형성. 시간 안에서 일어나며 보존·통치에 앞섬
(2) 6일 창조의 구조와 순서 원서 505–507쪽
3일+3일 대응 구도는 첫째·넷째 날 외에는 어긋난다(물고기는 둘째 날 궁창보다 셋째 날 바다와 어울림). 바빙크는 창조(1:1–2) → 첫 3일의 분리 → 넷째~여섯째 날의 꾸밈이라는 옛 삼분법이 낫다고 보되 엄격히 고집하지 않는다. 진행은 생명의 일반 조건에서 생명 자체로, 낮은 데서 높은 데로다. ‘라하프’(위를 맴돌다, 신 32:11)는 ‘루아흐 엘로힘’을 하나님의 영으로 읽게 하며, 이 영이 물에 형태와 활기를 주어 창조의 말씀을 예비한다.
| 날 | 사역 | 요점 |
|---|---|---|
| 첫째 날 | 빛, 낮과 밤의 교대 | 빛은 발광체와 구별되고 앞선다. 모든 생명의 가장 보편적 전제. 운동과 변화의 시작 |
| 둘째 날 | 궁창(휘장처럼 보이는 하늘, 시 104:2)과 물의 분리 | ‘좋았다’는 승인이 없음 — 셋째 날과 긴밀히 이어지기 때문 |
| 셋째 날 | 대륙과 바다, 식물 | 땅이 체계를 갖출 때 승인. 식물은 해 없이는 살아도 빛 없이는 못 산다 |
| 넷째 날 | 해·달·별 | 동물과 인간에게 필요하므로 먼저 준비. 밤낮·계절·절기를 정함 |
| 다섯째 날 | 수중 동물과 새 | 물과 하늘이 채워짐 |
| 여섯째 날 | 육상 동물, 끝으로 인간 | 인간의 육체는 흙으로, 영혼은 하나님이 직접. 전체가 심히 좋았다(창 1:31) |
| 일곱째 날 | 안식 | 피곤이 아니라 자기 일에 대한 만족과 기쁨, 그날을 복되고 거룩하게 하시는 적극적 행위 |
(3) 프톨레마이오스와 코페르니쿠스 원서 507–509쪽
- 천 년 넘게 창세기 주석은 지구 중심의 아리스토텔레스-프톨레마이오스 틀 안에 있었다. 그 안에서 동시 창조·풍유 학파와 문자적 학파가 생겼고, 로마 가톨릭 스콜라주의와 개신교는 후자를 따르면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해석을 이단시하지 않았다.
- 교회는 어떤 과학적 세계관에도 신앙고백적으로 매이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에 대한 저항은 교회보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서 나왔다. “기독교와 그 세계관은 프톨레마이오스나 코페르니쿠스와 함께 서거나 넘어지지 않는다.”
- 성경의 지구 중심 표현은 ‘해가 뜬다’와 같은 경험의 언어다. 해가 멈춤(수 10:12–13), 그림자가 물러감(왕하 20:9–11)도 과학적 설명이 아니라 사실의 보고다. 성경은 기적을 전할 뿐 방식은 설명하지 않는다.
- 그래도 지구는 종교적·윤리적 의미의 중심이다.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고 교회 안에 하나님의 처소가 준비되는 곳이다. 마음과 양심, 말씀과 성도의 공동체에서 하나님을 찾지 못하는 이는 최고의 망원경으로도 그분을 발견하지 못한다.
(4) 기원 문제와 계시 원서 510–511쪽
진짜 문제는 지동설이 아니라 기원이다. 과학이 우주·운동·생명의 기원을 내재적 힘만으로 설명하려 하면 양자택일에 빠진다: 원래 상태가 하나님께 의존함을 인정하든지, 물질과 운동의 영원성과 우주의 무한 반복을 주장하든지. 후자는 물질에서 운동과 의식이 어떻게 나오는지 말하지 못한다(베토벤 교향곡을 종이에 우연히 찍힌 점으로 설명하는 격). 설명해 낸다 해도 증명할 수 없는 가설이다. 가능성에서 실재를 끌어낼 수 없다.
7. 성경과 지질학 원서 512–520쪽
지질학의 가설은 지층과 화석 자료에 기초하므로 계시와의 충돌은 심각하다. 쟁점은 둘이다. 시간: 성경 연대기는 약 6천 년(히브리어 본문과 70인역의 약간의 차이), 지질학은 수백만~수십억 년. 순서: 지질학의 생물 출현 순서와 창세기 1장의 순서는 전혀 양립하지 않는다. 원서 512쪽
(1) 화해 시도의 네 이론 원서 512쪽
| 이론 | 내용 | 대표자·계보 | 바빙크의 평가 |
|---|---|---|---|
| 상징 (ideal) | 창세기 1장은 역사 기술이 아니라 문학적·시적·풍유적 묘사. 6일은 한 창조를 보는 여러 관점 | 오리게네스·아우구스티누스까지 거슬러 감. 근대는 종교적 핵심만 담은 신화로까지 | 장르는 본문이 정한다. 창세기 1장은 역사를 표방하는 책의 서론이며 신화의 표지가 없다 |
| 복원 (restitution) | 1:2와 1:3을 분리. 지질 사건을 2절 이전에 두고 ‘토후 와보후’는 앞선 대참사의 파괴, 6일은 회복 | 항변파 에피스코피우스·림보르흐(1–2절 사이에 천사 타락), 셸링·케얼·델리치 | 땅이 황폐하게 ‘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창조되었다 |
| 조화 (concordism) | 창조의 날 = 아주 긴 기간 | 고대 교회에서 비롯, 근대에 부활. 복원 이론과 결합하기도 | 자꾸 바뀌는 지질학에 기대므로 목표에 이르지 못함. 날은 저녁과 아침이 한 번 바뀌는 기간 |
| 반지질학 | 문자적·역사적 읽기 고수, 노아 홍수에 큰 지질학적 의미 부여 | 홍수의 전지구성·국지성 논쟁이 뒤따름 | 성경 연대기와 지질 산정을 교조적으로 동일시하지 말 것 |
(2) 해석의 원칙과 제안 원서 514–515쪽
- 네 이론의 공통 전제: 성경은 일상 경험의 언어로, 지구와 인간 중심의 관점에서 말한다. 성경은 지질학이 아니라 종교와 하나님 지식의 책이다(“주님은 수학자가 아니라 그리스도인을 만들려 하셨다”).
- 동시에 창조 이야기는 신화나 시가 아니라 역사적 성격을 지닌다. 다만 신앙고백들은 창세기 1장에 확정적 선언을 하지 않았으므로 다양한 해석의 공존을 허용한다.
- 아우구스티누스의 경고: 성급히 판단하지 말고, 진지한 연구 전에 토론하지 말며, 무지로 불신앙의 과학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지 말라. “세계 역시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의해 한 장 한 장 새겨진 책이다.” 충돌은 대개 두 책을 잘못 읽은 데서 온다. 모두에게 겸손·인내·신중함이 요구된다.
(3) 창조의 날의 성격 원서 516–517쪽
신앙에 본질적이지 않은 문제에는 의견 차이를 허용한다. 여호수아 10장을 지동설 반박이나 조화 이론의 근거로 쓰지 말라(모호한 본문에 고정된 해석을 고집하면 자기 견해를 변호하게 된다). 그러나 상징·시적·신화적 해석으로 옮겨갈 수도 없다. 여섯 날의 역사성을 버리면 피조물이 생긴 질서뿐 아니라 출 20:11이 근거로 삼는 한 주와 안식일 제정의 토대가 사라진다.
(4) 지질학의 한계 원서 518쪽
- 연구로 밝혀진 사실은 성경만큼이나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사실과 해석은 엄밀히 구별해야 하며, 특히 지질 연대의 길이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 지질학은 이른 시기 지구의 상태는 알려 주어도 그 원인·기원·지속 기간은 말하지 못한다. 유익한 보조학문이지 창조의 역사가 아니다. 홀게르: 우리는 막이 내린 뒤 극장에 도착한 관객으로, 남은 무대장치(화석)로 연극을 추측할 뿐이다.
- 진화론을 미리 전제하고 화석을 읽으면 순환론에 빠진다. 화석은 생물이 시작된 ‘시기’가 아니라 살았던 ‘지대’를 알려 줄 뿐이다. 지질학은 아직 신생 학문이다.
(5) 홍수와 지질학의 시간 원서 520쪽
거의 모든 민족에 홍수 전승이 있다. 성경은 홍수를 지구 전체를 바꾼 대격변으로 말한다. 홍수 이전 인류는 큰 지성·힘·긴 수명과 섬뜩한 사악함을 지녔고, 홍수 뒤 더 온화한 세대가 시작되었으며 지구는 그때 현재 모습을 갖게 되었다. 성경의 증언은 지질학적 사실과 충돌하지 않고 남는 문제는 시간뿐이다. 푸치우스: 성경에서 정확한 연대 계산은 얻을 수 없다. 창 1:1부터 홍수까지 성경은 지질학·고생물학의 사실을 넉넉히 수용할 기간을 제시한다. 피조물 발생의 위계(무기물 → 식물 → 수중·육지·포유동물)는 성경과 일치한다.
8. 창조에서 보존으로: 섭리 원서 521–525쪽
- 일곱째 날의 안식은 피곤이나 무료한 휴식이 아니라, 무로부터 새로운 종류를 만드는 좁은 의미의 창조를 그치시고 완성된 사역을 기뻐하신 것이다. “하나님에게는 창조가 ‘노동’이 아니며, 보존이 ‘쉼’이 아니다.” 하나님은 항상 일하신다(요 5:17).
- 피조물은 하나님을 통해, 하나님을 위해 존재하므로 독립적 피조물이란 모순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까지 주장하시고(잠 21:1), 악을 선으로 바꾸시며(창 50:20), 머리털까지 세신다. 우연이나 운명은 없다.
- 이 왕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이신 왕, 왕이신 아버지시다. 섭리 신앙의 참된 대상은 이 절대 능력과 완전한 사랑이다.
이방 종교·철학의 섭리
- 섭리에 대한 일반적 믿음은 자연계시로 모든 종교에 있는 ‘혼합 조항’. 부정하면 기도·제사·신앙이 무너짐(키케로)
- 점성술: 미신적·운명론적
- 아리스토텔레스: 자기만 사유하는 신, 세계 밖에서 도울 수 없음
- 스토아: 섭리 = 운명·자연 / 에피쿠로스: 신의 간섭 부정
- → 운명과 우연의 지배
기독교의 섭리 원서 523–525쪽
- 언약과 약속, 자비와 은혜에 기초 → 위로·소망·신뢰·인종의 원천(시 23)
- 자연신학의 조항이 아니라 신앙 조항: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특별한 섭리를 보고, 용서와 중생을 경험해 얻음
- 성경은 ‘섭리’라는 추상어 없이 창조하시고 살리시고 붙드시고 돌보시는 활동을 그림. 성경 전체가 섭리의 기록
- 본래 ‘예지’를 뜻하던 말을 바꿔 매 순간 만물을 보존하고 다스리는 행위로
(1) 범신론과 이신론 비판 원서 526–527쪽
섭리는 보존·협력·통치를 포함하며, 협력 개념은 범신론과 이신론을 동시에 피하려고 고안되었다.
| 구분 | 범신론 | 기독교 유신론 | 이신론 |
|---|---|---|---|
| 하나님과 세계 | 하나로 봄 | 구별되나 하나님이 매 순간 붙드심 | 분리. 만든 뒤 손을 뗌(기계와 제작자) |
| 창조와 보존 | 구별이 사라짐 | 창조는 존재의 생산, 보존은 존재의 지속 | 보존은 소극적 행위(항변파도 협력 거부) |
| 섭리 | = 자연의 추이, 작정 = 자연법칙 | 보존·협력·통치의 하나의 능력 | 필수 신앙이 아님. 이교의 우연론 부활 |
| 결과 | 기적·인격·자유·기도·죄·종교가 설 자리 상실, 자연이 곧 운명 | 위로와 소망 | 계시·기적·은혜는 군더더기 → 실천적 무신론 |
19세기 윤리적 현대주의자들은 자연의 힘과 도덕의 힘을 마니교의 두 신처럼 맞세웠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간 자유의 경쟁자로 보는 오류다. 하나님의 통치에서 빼앗은 영역은 우연이나 운명에 떨어질 뿐이다. 객관적으로 우연한 것은 없다.
9. 보존, 협력, 통치 원서 528–537쪽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27문: 하나님은 전능하고 언제나 함께하는 능력으로 모든 피조물을 자기 손으로 하듯 붙들고 다스리시며,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라 아버지의 손길에서 온다. 원서 528–530쪽
“처음부터 보존은 또한 통치이고, 통치는 또한 협력이고, 협력은 또한 보존이다.” 섭리는 단순한 허용이 아니라 매 순간 존재하도록 역사하시는 적극적 행위이므로 끊임없이 지속되는 창조라 부를 수 있다.
(1) 협력과 제2원인 원서 531–533쪽
- 각 피조물은 고유한 본성과 법칙을 갖고 창조되었다(시 148:6). 협력은 하나님의 직접적 뜻에 기초하며 제2원인이 하나님과 결과 사이에 끼어드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기적도 자연법칙 위반이 아니라 고유한 결과를 내는 특별한 힘의 실행이다.
- 섭리는 사물의 본성을 파괴하지 않고 보존하고 발전시킨다. 하나님은 천사·사람·동식물을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스리신다.
- 창조주와 피조물을 구별한 기독교는 자연 숭배와 두려움에서 사람을 해방해 과학을 가능케 하고 청지기 책임을 주었다. 운명론적 체념도 오만도 아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만일을 대비하라”(크롬웰).
| 입장 | 제1원인과 제2원인 |
|---|---|
| 범신론 | 제2원인이 제1원인과 동일시 → 참된 원인이 없고 하나님이 죄의 주체 |
| 이신론 · 펠라기우스주의 | 제1원인을 처음 창조(창조된 가능성)에만 국한 → 인간의 원함과 행함에서 하나님 배제 |
| 반펠라기우스주의 · 신인협력설 | 두 원인을 마차를 끄는 두 마리 말처럼 나란한 동반 원인으로 |
| 성경 · 기독교 신학 | 하나님이 모든 것을 이루시니 피조물은 도구(사 44:24). 동시에 섭리는 피조물의 자기활동을 전제(창 1:11). 제2원인은 하나님께 전적으로 종속되지만 참된 원인.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소원과 행함을 이루시고(빌 2:13), 악인도 돌이 아니라 사고하는 피조물로 쓰신다 |
(2) 하나님의 통치와 악·고난 원서 535–537쪽
- 통치는 섭리의 마지막 목적이며 보존과 협력 안에 이미 담겨 있다. ‘왕’과 ‘아버지’를 맞세우지 말라(엡 3:14–15). 우주의 통치 형태는 민주제·공화제·입헌제가 아니라 군주제다. 다만 이 군주는 폭군이 아니라 아버지다.
- 죄도 통치 아래 있다. 하나님은 온 존재로 죄를 미워하시지만, 때로 죄를 막으시고(창 20:6), 정욕에 내버려두시며(롬 1:24), 시험과 강퍅함을 위해 때와 기회를 조정하신다. 요셉 형들의 악행(창 50:20)과 십자가(행 2:23)도 경륜 안에 있었다. ‘허용’이라는 말은 쓸 수 있으나 적극적 주권을 부인하는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 고통과 죽음도 하나님의 손에서 온다(창 2:17). 의인의 고난과 악인의 형통(시 73)에 대해 신앙은 ‘해답’이 아니라 왕의 능력과 아버지의 사랑을 동시에 붙든다. 고난의 목적: 보응, 징계, 믿음의 강화(롬 5:3–5), 진리의 증언,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은 영광으로 가는 길이다.
구조도
| 입장 | 그 입장의 주장 | 바빙크의 답 |
|---|---|---|
| 범신론·유출설 | 세계는 하나님의 존재가 흘러나온 영원한 자기계시다 | 통일성에서 다양성이 나오는 길을 설명 못 하는 말놀이이며, 세계는 하나님의 뜻으로 무로부터 지어졌다 |
| 유물론 | 영원한 물질 원자의 운동이 만물을 설명한다 | 기원은 관찰 밖이므로 과학이 아니라 종교적 세계관이며, 물질을 신격화하는 자기모순이다 |
| 재세례파·중재신학 | 로고스는 세계의 영원한 마음이며 성육신은 죄와 무관한 필연이다 | 창조가 하나님께 필연이 되고 은혜가 자연을 삼켜 회복된 이교주의에 이른다 |
| 로마 가톨릭 | 천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필요를 알므로 간구할 수 있다 | 성경은 천사 숭배를 금하고 천사도 경배를 거부했다. 경배와 공경의 구별은 자의적이다 |
| 루터파 | 하늘의 천사들이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한다 | 눅 15장의 기쁨이나 계 8:3의 향로는 중보기도가 아니다 |
| 슐라이어마허·근대 신학 | 천사 가르침은 동화이고 창조와 섭리 구별은 무의미하다 | 예수와 사도들이 천사를 공개적으로 믿었고, 섭리는 창조와 구별되는 매 순간의 보존과 통치다 |
오해와 바른 이해
오해 ✕
- 세계는 영원한 물질을 신이 빚은 것이다. / ‘무로부터’는 무라는 재료로 만들었다는 뜻이다.
- 하나님은 시간 속 어느 시점에 창조하셨다.
- 하나님은 세상이 필요해서 창조하셨다.
- 창세기 1장은 바빌론 신화를 베낀 것이다.
- 천사는 순수한 영이니 하나님께 더 가깝다.
- 모든 사람과 나라에는 수호천사가 있다(마 18:10).
- 하나님은 지으신 뒤 세상을 내버려 두신다.
바른 이해 ✓
- 재료 없이 말씀으로 지으셨다. ‘로부터’는 질료인을 배제할 뿐, 원인은 오직 하나님 안에 있다.
- 세계는 시간 안이 아니라 시간과 함께 창조되었다.
- 필요가 아니라 기쁨으로 창조하셨기에 예술가 범주가 합당하다.
- 창세기는 철저히 유일신적이며 신들의 기원이 없다.
- 하나님의 형상은 몸과 통치권을 지닌 인간만 가진다.
- 성경에 근거가 없다. 마 18:10은 일반 진술을 넘지 못하며 천사는 섬기는 영일 뿐이다.
- 매 순간 보존하고 다스리시며 죄와 고난도 주권 아래 두신다.
핵심 용어
- 무로부터의 창조 (creatio ex nihilo)
- 질료인을 배제하고 세계의 원인을 오직 하나님께 두는 고백. 창조주와 세계의 구별, 세계의 우연성을 지킨다.
- 질료인 / 목적인 (causa finalis)
- 재료가 되는 원인 / 그것을 위해 존재하는 최종 목적. 성자는 세상의 목적인이다.
- 유출 (emanation)
- 세계가 하나님의 존재에서 흘러나왔다는 범신론적 견해. 기독교는 나심(성자)과 창조(피조물)의 이중 전달을 말한다.
- 삼위일체의 흔적 (vestigium trinitatis)
- 삼위 하나님이 지으신 창조세계에 남은 자취.
- 범바빌론주의 (pan-Babylonism)
- 창세기 창조 기사가 바빌론 신화에서 왔다는 주장.
- 테홈 · 토후 와보후
- 창 1:2의 ‘깊음’, ‘혼돈하고 공허함’. 티아마트 같은 신화적 혼돈이 아니라 창조된, 덜 형성된 땅.
- 그룹 / 스랍
- 하나님의 거룩을 지키는 능력 있는 천사 / 보좌에서 섬기는 고귀한 천사.
- 라트레이아 / 둘레이아 (λατρεία / δουλεία)
- 로마 가톨릭의 경배/공경 구별. 바빙크는 자의적이라고 본다.
- 상징 · 복원 · 조화 · 반지질학 이론
- 성경과 지질학을 화해시키려는 네 시도.
- 섭리
- 매 순간 만물을 보존하고 다스리는 하나님의 행위. 보존·협력·통치의 하나의 능력.
- 협력 (concurrence)
- 섭리가 피조물의 구별된 존재와 자기활동을 확증하고 유지함. 범신론과 이신론을 함께 피한다.
- 제2원인
- 제1원인인 하나님께 전적으로 종속되나 고유한 본성과 힘을 지닌 참된 원인.
- 이신론
- 하나님이 세계를 만든 뒤 간섭하지 않는다는 견해.
성경 근거
| 구절 | 이 장에서의 쓰임 |
|---|---|
| 롬 11:36 |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와 그분께 돌아감 |
| 히 11:3; 롬 4:17 | 보이는 세계는 보이는 것에서 나오지 않음,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심 → 무로부터의 창조 |
| 골 1:16–17 |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고 그 안에서 함께 섬. 보이지 않는 천사도 피조물 |
| 계 4:11 | 세계는 하나님의 뜻으로 존재함 |
| 사 43:7 |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어짐 |
| 히 1:14 | 천사는 왕이 아니라 구원받을 상속자를 섬기는 영 |
| 계 22:9 | 천사는 동료 종으로서 경배를 거절함 |
| 창 1:31 | 지으신 모든 것이 심히 좋았음 |
| 출 20:11 | 한 주와 안식일은 6일 창조에 기초 |
| 창 50:20 | 악을 백성의 선으로 바꾸심 → 통치 |
복습 문제
‘무로부터의 창조’에서 ‘무로부터’는 무엇을 뜻하며, 무엇을 배제하는가?
“하나님이 삼위일체가 아니셨다면 창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라는 말의 근거는?
창조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주장에 대한 두 반론과 바빙크의 답은?
천사와 인간의 공통점과,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에게만 있는 이유는?
성경과 지질학의 충돌 문제에서 네 이론과 바빙크의 제안을 요약하라.
섭리의 세 측면은 무엇이며, ‘계속적 창조’라는 말에는 어떤 단서가 붙는가?
책의 저작권은 저자와 출판사에 있습니다. 빛다방 학습·심화 노트를 바탕으로 한 개인 학습용 정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