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믿을 때만 은혜이고, 그다음부터는 내가 잘해야 하나님께 인정받는 걸까?
칼빈은 사람을 네 부류로 나눈다. 우상 숭배자, 이름뿐인 신자, 위선자, 성령으로 거듭난 신자다. 그리고 각 부류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義)를 가질 수 있는지 차례로 묻는다. 믿지 않는 사람의 훌륭한 덕행도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섬기려는 목적과 믿음이 없으므로 하나님 앞에서는 의가 되지 못한다(1-6절). 마음이 씻기지 않은 위선자와 이름뿐인 신자의 종교 행위는 오히려 더러워진다(7-8절). 핵심은 거듭난 신자다. 신자의 가장 좋은 행위에도 죄가 섞여 있으므로, 신자의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받는 의', 곧 평생 이어지는 죄 사함이다(9-11절). 칼빈은 이어서 스콜라 신학의 '은혜로 받아들여지는 행위'와 '잉여 공로'를 반박한다. 그다음 네 가지 원인으로 구원 전체가 우리 밖에서 이루어짐을 보인다. 끝으로 선행은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부르심의 열매이며, 하나님이 정하신 순서 속의 '계단'이라고 정리한다(12-21절).
1. 절별 정리
자연인은 죄 가운데 죽어 있어서 구속이 필요한 상태에 있음. 1-6
1. 네 종류의 인간
칼빈은 사람의 일생 동안 어떤 의가 가능한지 살피려고 사람을 네 부류로 나눈다. (1) 하나님을 모르고 우상을 섬기는 사람, (2) 세례·성찬에는 참여하지만 삶으로 하나님을 부인하는 이름뿐인 신자, (3) 겉치레로 악한 마음을 감추는 위선자, (4) 성령으로 거듭나 참된 거룩함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먼저 타고난 본성으로만 보면 사람에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선이 없다. 칼빈은 그 근거로 마음의 부패를 말하는 구약 구절들을 잇달아 든다. 성경은 사람을 '육신'이라 부르는데, 이 말에는 바울이 꼽은 온갖 악행이 다 들어 있다. 사람이 자랑하고 기대는 것이 바로 그런 것들이라고 칼빈은 꼬집는다. 물론 겉으로 예의 바르고 거룩해 보이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으시므로 그 행위의 뿌리까지 살펴야 한다고 하며 다음 절로 넘어간다.
- 사람은 네 부류로 나뉜다
- 본성대로라면 선의 흔적조차 없다
- 성경은 사람을 '육신'이라 부른다
- 겉모습이 아니라 행위의 뿌리를 봐야 한다
2. 불신자들의 덕행도 하나님의 선물임
칼빈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뛰어난 재능과 덕을 무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분명히 인정한다. 로마 황제를 예로 든다. 티투스·트라야누스의 정의와 절제는 칼리굴라·네로·도미티아누스의 광기와 잔인함과 하늘과 땅만큼 다르다. 티베리우스의 방탕과 베스파시아누스의 절제도 그렇다. 칼빈은 이 상식을 받아들인다. 선과 악의 구별이 무너지면 세상 질서가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 마음에 선악을 가리는 감각을 두셨고, 때로 덕 있는 사람에게 이 세상의 복을 주신다. 그러나 이 복은 그 덕이 은혜를 받을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다. 하나님이 참된 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지 보여 주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은 꾸며 낸 의에도 세상적인 상을 주신다.
- 불신자의 덕도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다
- 선한 통치자와 폭군은 분명히 다르다
- 선악 구별은 세상 질서를 지킨다
- 이생의 복은 공로에 대한 값이 아니다
- 하나님이 참된 의를 높이심을 보여 준다
3.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
그러나 칼빈은 바로 이어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가져온다. 참 하나님을 믿는 신앙 밖에 있는 사람은 아무리 덕이 높아도 상보다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인간 사회를 지키는 하나님의 도구다. 하지만 그 일을 가장 나쁜 방식으로 한다. 선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야망이나 자기애 같은 부패한 동기로 악을 누르기 때문이다. 칼빈은 모든 옳은 일에는 한 가지 목적,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 다른 목적을 향한 일은 '옳다'는 이름을 잃는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누스는 파브리키우스·스키피오·카토 같은 로마의 훌륭한 인물들도 믿음의 빛이 없어 바른 목표를 향하지 못했고, 결국 죄를 지은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덕은 겉으로 드러난 행위가 아니라 그 행위가 향하는 목표로 판단된다.
- 신앙 밖의 덕은 하나님 앞에서 상이 아니다
- 문제는 행위가 아니라 동기와 목적이다
- 옳은 일의 목적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 덕은 행위가 향하는 목표로 판단된다
4. 믿음이 없이는 참된 덕행도 없음
칼빈은 요한일서를 근거로, 그리스도께 속하지 않은 사람은 무엇을 하든 결국 영원한 죽음을 향해 간다고 말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같은 말을 한다. 의인과 악인을 가르는 기준은 행위의 법이 아니라 믿음의 법이고, 믿음이 없으면 선행처럼 보이는 것도 죄가 된다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달리기 비유도 소개한다. 코스를 벗어나 달리는 선수는 열심히 달릴수록 결승점에서 더 멀어진다. 그리스도와의 교제 밖에서는 성화도 없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은 겉보기에 맛있는 열매를 맺어도 실은 나쁜 나무다. 칼빈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기 전에 하는 모든 일은 의에 쓸모가 없을 뿐 아니라 정죄받아 마땅하다고 결론짓는다. 히브리서 11:6이 이를 확증한다.
- 그리스도가 없으면 생명도 없다
- 의인과 악인을 가르는 것은 믿음이다
- 길을 벗어난 열심은 더 멀어지게 한다
- 그리스도 밖에서는 성화도 없다
-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게 못 한다
5.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의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음
하나님의 은혜와 사람의 본성을 나란히 놓으면 더 분명해진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선을 베푸실 이유가 될 만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도 하나님이 먼저 값없는 자비로 다가오신다. 성경은 이를 '죽은 자를 살리심', '새 피조물로 만드심',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심'이라고 표현한다. 죽은 사람이나 없는 존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누가 먼저 내게 주었느냐"는 욥기의 말씀과 그것을 인용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께 내놓을 것은 가난과 빈손뿐이라고 가르친다. 에베소서 2:10에 따르면 선을 행하는 능력부터가 거듭남에서 나온다. 칼빈은 본성대로라면 사람에게서 선행이 나오기보다 돌에서 기름이 나오기가 더 쉽다고 말한다. 행위에서 나온 의가 조금이라도 칭의에 보탬이 된다면 "은혜로 의롭게 된다"는 말은 거짓이 된다. 로마서 11:6과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예수님 말씀이 이를 못 박는다.
- 하나님이 먼저 값없이 다가오신다
- 구원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일이다
- 선을 행할 능력도 거듭남에서 나온다
- 행위가 끼어들면 은혜가 은혜 아니다
-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6.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를 이루심
칼빈은 너무 분명한 진리를 길게 변호하면 오히려 의심스러워 보일까 걱정한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 워낙 악해서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자꾸 자기에게 돌리므로 더 다룬다고 말한다. 이사야는 도울 사람이 하나도 없어 하나님이 자기 팔로 구원하셨다고 말한다. 호세아는 하나님이 '내 백성 아니던 자'와 결혼 언약을 맺으신다고 말한다. 이 첫 연합이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면 우리의 의가 설 자리는 없다. 의롭게 되기 전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다. 원수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것을 내놓을 수는 없다. 칭의는 하나님 사랑의 시작이고, 우리가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다. 어떤 대중은 '그리스도가 구속하셨지만 그것을 내 것으로 하려면 내 행위가 필요하다'고 오해한다. 칼빈은 성령이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주시기 전까지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 밖의 죄인이라고 답한다. 그러므로 구원의 시작은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부활이며, 그 믿음조차 선물로 주어진다.
- 도울 자가 없어 하나님이 친히 구원하셨다
- 의롭게 되기 전 우리는 하나님의 원수였다
- 우리가 먼저 사랑한 것이 아니다
- 구속을 내 것으로 하는 것도 성령의 일이다
- 구원의 시작은 일종의 부활이다
외식하는 자들과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은 정죄 아래 있음. 7-8
7. 먼저 마음이 정결하게 씻음 받아야 함
이제 둘째와 셋째 부류, 곧 이름뿐인 신자와 위선자를 본다. 이들의 더러운 양심은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는 증거다. 거듭나지 않았다면 믿음이 없는 것이다. 칭의는 믿음으로만 받으므로, 이들은 아직 하나님과 화목하지도 의롭게 되지도 못했다. 그런데 위선자들은 '마음은 더럽지만 좋은 행위 몇 가지를 내놓으면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시겠지' 하고 생각한다. 학개서의 비유가 이 생각을 무너뜨린다. 거룩한 고기를 싼 옷자락이 다른 음식에 닿아도 그 음식이 거룩해지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부정한 백성이 드리는 것도 부정하다고 하신다. 칼빈은 하나님이 명령하신 거룩한 일조차 악인의 손을 거치면 더러워진다는 점을 이 비유의 날카로운 지점으로 본다.
- 더러운 양심은 거듭나지 않았다는 증거다
- 거듭남이 없으면 믿음도 칭의도 없다
- 위선자는 착한 행동 몇 개를 믿는다
- 거룩한 행위도 부정한 손에서 더러워진다
- 행위보다 마음이 먼저 씻겨야 한다
8. 하나님 앞에서는 행위보다 사람이 우선함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제물과 절기와 기도를 싫어한다고 하신다. 율법이 명령한 일인데 왜 싫어하실까? 율법을 지키는 일의 기초는 하나님 이름을 참으로 경외하는 마음이다. 그 기초가 빠지면 드리는 모든 것이 쓰레기가 된다. 그러니 마음에 악을 감춘 채 행위로 하나님 사랑을 얻으려 할수록 더 큰 진노를 부른다. 여기서 칼빈은 성경이 보여 주는 순서를 강조한다. 사람이 먼저 하나님께 받아들여지고, 그다음에 그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창세기는 하나님이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다고 기록한다. 제물보다 사람이 먼저다. 그리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믿음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의 기초는 살아 있는 참된 믿음이다.
- 경외 없는 제사는 하나님이 싫어하신다
- 악인의 제사는 하나님이 미워하신다
- 사람이 먼저, 행위는 그다음이다
- 아벨 '과' 그의 제물 — 순서가 중요하다
- 마음은 믿음으로 깨끗해진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중생한 자들. 9-11
9. 참된 성도의 행위도 의롭지 못함
이제 넷째 부류, 거듭난 신자를 본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의를 근거로 우리와 화목하시고 값없이 죄를 용서하여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동시에 성령으로 우리 안에 계셔서 날마다 육신의 욕심을 죽이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다. 신자는 정말로 율법에 순종하는 마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최고의 소원으로 삼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우쭐하지 않도록 불완전함의 흔적을 남겨 두신다. 칼빈의 첫째 주장은 이것이다. 신자의 가장 훌륭한 행위에도 육신의 찌꺼기가 섞여 있다. 하나님의 종에게 일생 최고의 선행을 골라 꼼꼼히 살펴보게 하면, 어딘가에서 부패한 냄새를 맡게 될 것이다. 사람 눈에도 얼룩이 보이는데, 별도 깨끗하지 않다고 여기시는 하나님 눈에는 어떻겠는가.
- 신자는 칭의와 성화를 함께 받는다
- 그래도 불완전함의 흔적이 남아 있다
- 그 흔적은 우리를 겸손하게 한다
- 최고의 선행에도 죄의 얼룩이 있다
- 행위 자체로는 상이 아니라 부끄러움이다
10. 행위의 의로는 죽음과 멸망에 이를 수밖에 없음
둘째 주장이다. 가령 완전히 순결한 행위가 하나 있다고 쳐도, 죄 하나가 그 이전의 의를 모두 지워 버린다. 에스겔과 야고보가 같은 말을 한다. 행위로 의를 따질 때는 행위 몇 개가 아니라 계명 전체를 봐야 한다. 율법이 요구하는 것은 한두 번의 선행이 아니라 끊임없는 완전한 순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생각하는 방식, 곧 '처음에 과거 죄를 한 번 용서받았으니 이제부터는 율법으로 의를 쌓는다'는 생각은 거짓 소망이다. 이 몸을 입고 사는 동안 우리는 완전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니 율법은 언제나 우리를 정죄할 근거를 갖고 있다. 하나님의 긍휼이 거듭거듭 용서하지 않으시면 우리는 죽음과 멸망을 받아 마땅하다.
- 죄 하나가 이전의 의를 다 지운다
- 율법은 완전하고 끊임없는 순종을 요구한다
- '처음만 용서, 이후는 행위'는 거짓 소망이다
- 율법은 언제나 우리를 정죄할 수 있다
- 필요한 것은 거듭되는 용서다
11. 신자의 의는 언제나 믿음에 근거한 의임
칼빈은 두 가지를 못 박는다. 첫째, 경건한 사람의 행위도 하나님의 엄격한 심판대에서는 하나도 빠짐없이 정죄받을 만하다. 둘째, 혹시 흠 없는 행위가 있더라도 그 사람의 다른 죄 때문에 인정받을 수 없다. 이것이 이 편의 핵심이다. 칭의의 '시작', 곧 죄인이 값없이 용서받아 의롭게 된다는 점에서는 칼빈과 건전한 스콜라 신학자들 사이에 큰 다툼이 없다. 차이는 그들이 '칭의'에 성령의 새롭게 하심(갱신)을 넣는다는 데 있다. 그들은 처음엔 믿음으로 화목하지만, 그 뒤로는 선행의 공로로 의인으로 인정받는다고 본다. 칼빈은 아브라함으로 답한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우상을 섬길 때가 아니라 여러 해 거룩하게 산 뒤에도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말씀도 신자에게 하신 말씀이다. 다윗이 노래한 '죄 사함의 복'도 자기 같은 신자의 고백이다. 화목의 메시지는 교회에서 평생 선포되고, 그리스도는 언제나 중보자로 계신다. 바울도 구원이 은혜로 '시작'되었다가 아니라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한다.
- 신자의 행위도 심판대에서는 정죄감이다
- 다툼은 '칭의의 시작'이 아니라 '이후'다
- 스콜라는 칭의에 갱신을 섞는다
- 오래 경건했던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 신자는 평생 죄 사함의 복으로 산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대한 스콜라 신학자들의 반론과 소위 성인들의 잉여 공로설에 대한 반박. 12-21
12. 스콜라 신학자들의 핑계
스콜라 신학자들은 이렇게 빠져나가려 한다. 선행은 그 자체로는 의를 얻기에 부족하다. 하지만 하나님이 은혜로 '받아 주시기' 때문에 큰 가치를 갖는다. 그러면서 행위의 의가 늘 불완전하고, 그래서 이 땅에서는 죄 사함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그런데 그 모자란 부분은 '잉여 행위', 곧 의무 이상으로 한 선행으로 갚는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은혜'의 뜻부터 바로잡는다. 은혜는 행위를 받아 주는 장치가 아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흠 없으심을 옷 입히시고, 그것을 우리 것으로 여겨 우리를 거룩한 자로 안아 주시는 값없는 선하심이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완전한 의는 그리스도의 의뿐이다. 그 의가 우리 대신 심판대에 서서 보증이 되어 주신다. 그 덕분에 우리의 부끄러운 불완전함은 땅에 묻힌 것처럼 덮이고, 우리는 부활의 날을 기다린다.
- 스콜라: 행위는 은혜로 '받아들여져' 가치 있다
- 모자란 것은 잉여 행위로 메운다고 주장
- 칼빈: 은혜는 그리스도의 의를 입히심이다
- 그리스도의 의만 심판대에 설 수 있다
- 우리의 불완전함은 그 의로 덮인다
13. '잉여 행위'의 논리는 죄의 위중함을 망각하는 것임
그러므로 우리 행위는 그 자체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의로 덮이는 만큼만 기쁘시게 할 수 있다. 율법은 "행하면 산다"고 하면서, 모든 것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저주를 선언한다. 그러니 '부분적인 의'라는 것은 없다. 잉여 공로로 부족분을 메운다는 주장은 이미 틀린 것으로 드러난 전제, 곧 '율법 일부만 지켜도 그만큼 의로 인정된다'는 생각으로 되돌아가는 것이다. 그 속에는 자랑거리를 조금이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이 있다. 칼빈은 이들이 죄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무거운지 모른다고 지적한다. 인류의 의를 다 모아도 죄 하나를 갚지 못한다. 아담은 단 한 번의 죄로 쫓겨났다. 하나님은 원수가 내미는 것을 받지 않으시므로, 먼저 죄가 덮이고 용서받아야 한다. 용서는 값없는 선물이다. 여기에 '보속'을 엮는 것은 용서의 은혜를 욕되게 하는 일이다.
- 율법은 부분적인 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 잉여 공로는 틀린 전제로 돌아간 것이다
- 모든 의를 모아도 죄 하나를 못 갚는다
- 죄 사함에 보속을 섞으면 은혜를 욕보인다
- 뒤를 잊고 부르심의 상을 향해 달린다
14. 잉여 행위의 논리는 주님의 명령과도 부합되지 않음
예수님은 명령받은 것을 다 한 뒤에도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라고 하셨다. 칼빈은 이것이 겉으로 하는 겸손한 말이 아니라고 본다. 마음으로 정말 그렇게 믿어야 한다는 명령이다. 우리는 다 해낼 수 없을 만큼 많은 의무를 진 종이다. 그러니 "명령받은 것을 다 한 뒤에도"라는 말은, 사람의 모든 의를 합쳐도 계명 하나에 못 미친다는 뜻이다. 그런데 어떻게 의무를 다하고도 남는 것을 쌓아 두었다고 자랑하겠는가. '일부 의무는 못 해도 의무 이상의 일은 할 수 있지 않느냐'는 반론도 있다. 칼빈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일 가운데 율법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없다고 답한다. 의무인 일을 자발적인 선심처럼 자랑할 수는 없다.
- 다 해도 '무익한 종'이라 고백해야 한다
- 이 고백은 겸손한 척이 아니라 진심이다
- 우리는 다 갚을 수 없는 의무를 진 종이다
-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은 모두 의무다
- 의무 '이상'의 일이란 없다
15.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므로 잉여 행위란 성립할 수 없음
잉여 공로를 주장하는 쪽은 바울의 예를 든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사례를 받을 권리를 스스로 포기했으니, 의무를 넘어 자발적으로 섬긴 것이라는 주장이다. 칼빈은 본문에 담긴 이유를 보라고 한다. 바울은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으려고 그렇게 했다. 당시 거짓 일꾼들이 겉으로 친절한 척하며 사람들을 끌고 복음을 미워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 그것은 분별 있는 복음 일꾼의 의무였다. 설령 그 이유가 분명하지 않더라도, 크리소스톰의 말처럼 종이 가진 모든 것은 주인의 것이다. 예수님도 종이 명령대로 했다고 주인이 감사하느냐고 물으셨다. 종이 더 부지런히 일해도 종으로서 해야 할 일을 넘은 것은 없다. 종의 힘 자체가 주인의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지어낸,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은 행위는 "누가 이것을 요구했느냐"는 책망을 받을 뿐이다. 칼빈은 그늘에서 한가하게 논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무엇을 내놓을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고 맺는다.
- 바울의 권리 포기는 복음을 위한 의무였다
- 종의 모든 것은 주인의 것이다
- 더 일해도 종의 몫을 넘지 않는다
- 하나님이 명령하지 않은 행위는 헛수고다
- 질문은 '심판대 앞에서 무엇을 내놓나'다
16. 행위에 대한 신뢰와 자랑을 버려야 함
칼빈은 마음에서 두 가지 독을 빼야 한다고 한다. 행위의 의를 믿는 것과 행위를 자랑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도 그리스도의 흠 없으심에서 향기를 얻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악취가 난다고 가르친다. 그러니 우리는 다윗처럼 "주의 종을 심판하지 마소서"라고 긍휼을 구할 수밖에 없다. 욥은 "의로울지라도 머리를 들지 못한다"고 고백한다. 이 말은 천사도 감당 못 할 하나님의 최고 의를 두고 한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사람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음을 보여 준다. 신뢰가 사라지면 자랑도 사라져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떨게 하는 행위를 자랑할 수는 없다. 자랑은 오직 여호와 안에서 해야 한다. 어리석은 사람이 행위로 우쭐대는 것은 행위를 구원의 원인으로 여기는 잘못에서 나온다.
- 버릴 것: 행위 신뢰와 행위 자랑
- 그리스도 없이는 선행도 악취가 난다
- 심판대 앞에서 할 일은 긍휼을 구하는 것뿐
- 자랑은 여호와 안에서만 한다
- 교만의 뿌리는 행위를 원인으로 보는 것
17. 철학자들이 말하는 네 종류의 원인을 구원에 적용시켜 살핌
철학자들(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온 것으로 알려진 구분)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 데 네 가지 원인이 있다고 본다. 칼빈은 이 틀을 구원에 대 보면 행위가 들어갈 자리가 하나도 없다고 말한다. 일을 일으키는 원인(유효적 원인)은 아버지의 긍휼과 값없는 사랑이다. 구원의 '재료'(질료적 원인)는 순종으로 의를 이루신 그리스도다. 그것을 우리에게 연결하는 통로(형식적·수단적 원인)는 믿음이다. 목적(목적적 원인)은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내고 선하심을 찬양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3:16 한 구절에 앞의 세 원인이 다 들어 있다. 로마서 3:23-26과 에베소서 1장에는 네 원인이 모두 나온다. 구원의 모든 부분이 우리 밖에서 이루어진다. 반대자들도 첫째와 넷째 원인은 부정하지 못한다. 대신 재료와 통로에서 행위가 반쯤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의이며, 그 혜택은 믿음으로만 받는다고 가르친다.
- 유효적 원인: 아버지의 값없는 사랑
- 질료적 원인: 그리스도의 순종
- 수단적 원인: 믿음
- 목적적 원인: 하나님의 공의와 선하심의 영광
- 구원의 모든 원인이 우리 밖에 있다
18. 선행은 신자의 믿음을 강건하게 해줌
그런데 성경 속 성도들은 자신의 결백과 정직을 떠올리며 힘을 얻는 경우가 많다. 방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악인과 비교하며 자기편의 정당함을 확신하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을 뒤에서 다루겠다고 미룬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살펴 양심이 깨끗함을 보고 위로받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이 '행위를 신뢰하지 말라'는 앞의 가르침과 충돌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구원의 기초를 세울 때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만 바라본다. 이 기초 위에 선 양심은 행위를 볼 때 그것을 '하나님이 내 안에서 일하신다는 증거'로 본다. 금지되는 것은 구원을 거들려고 행위의 공로로 마음을 돌리는 일이다. 하나님 은혜의 표시들로 믿음을 보강하는 것은 금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선물이 그분의 선하심을 비추는 빛줄기라면,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표인 선행은 더욱 그렇다.
- 성도는 깨끗한 양심으로 위로받기도 한다
- 기초는 오직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 행위는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증거다
- 금지: 구원을 거들려고 공로에 기대는 것
- 허용: 은혜의 표시로 믿음을 보강하는 것
19. 부르심의 열매로서의 행위의 역할
성도가 깨끗한 양심을 보며 기뻐하는 것은 그것이 부르심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 열매를 보며 하나님이 자기를 자녀로 삼으셨음을 확인한다. 히스기야처럼 성도는 기도할 때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했다고 아뢰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양심의 기초를 세우는 일과는 관계가 없다. 결과로서만 의미가 있다. 완전한 확신을 줄 만큼 완전한 경외는 어디에도 없고, 성도의 경외에도 육신의 흔적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열매를 성령이 함께 계신 증거로 보면 큰 격려를 얻고, 모든 필요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경험하게 된다. 단, 먼저 약속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신해야 한다. 행위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판단하기 시작하면 그보다 불확실한 것은 없다. 행위는 그 자체로는 오히려 진노를 알릴 뿐이다. 그래서 성도는 늘 그리스도 사랑의 길이와 넓이와 깊이와 높이를 바라본다.
- 선행은 부르심과 양자 됨의 열매다
- 기초가 아니라 결과로서만 의미가 있다
- 먼저 약속, 그다음 열매의 격려
- 행위로 은혜를 재면 늘 불안하다
- 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본다
20. 행위는 하나님의 선물임
성도는 행위를 믿지 않고, 무엇 하나 행위의 공로로 돌리지 않는다. 행위를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게 하는 선물로, 택하심을 알게 하는 부르심의 표로 여긴다. 그래서 행위를 인정해도 그리스도 안의 값없는 의는 조금도 깎이지 않는다. 행위가 그 의에 기대어 있고, 그 의 없이는 행위도 없기 때문이다.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도를 인용한다. 그는 시편 말씀을 빌려 '내가 주를 찾았고 손을 들었다'며 자기 행위를 내놓지 않겠다고 한다. 공로보다 죄가 더 많이 보일까 두렵기 때문이다. 대신 '주께서 지으신 것을 멸시하지 마시고, 내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을 보시라'고 구한다. 그러면서 내 것을 보시면 정죄하실 것이요, 주의 것을 보시면 면류관을 씌우실 것이라고 고백한다.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가 행위를 내놓지 않는 이유를 두 가지로 정리한다. 선행이 있어도 자기 것이 아니고, 그 선행이 수많은 죄에 압도되기 때문이다.
- 행위는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다
- 행위는 부르심과 택하심의 표다
- 행위는 값없는 의에 기대어 존재한다
- "내 것이 아니라 주의 것을 보소서"
- 선행은 내 것이 아니고 죄에 압도된다
21. 행위에 대한 바른 이해
성경은 때로 신자가 선을 행하므로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한다. 칼빈은 이 말씀을 앞에서 세운 원리와 맞게 읽어야 한다고 한다. 구원의 유효적 원인은 아버지의 사랑, 질료적 원인은 아들의 순종, 수단적 원인은 성령의 조명하심인 믿음, 목적적 원인은 하나님 자비의 영광이다. 이 원인들과 별도로 하나님이 행위를 '아래 단계의 원인'으로 쓰실 수는 있다. 하나님은 영생을 주기로 정하신 사람들을 보통 선행의 길을 거쳐 영생에 이르게 하신다. 그 순서에서 앞에 오는 것을 뒤에 오는 것의 '원인'이라고 부르실 뿐이다. 의롭다 하신 자를 영화롭게 하시는 것처럼, 앞선 은혜가 다음 은혜로 가는 계단이 된다. 로마서 6:23을 보라. 바울은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면서도 '의의 삯은 생명'이라고 하지 않는다. 대구를 일부러 깨고 '하나님의 은사는 영생'이라고 한다. 사망은 사람의 죄 때문이지만 생명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에서 온다는 뜻이다. 결국 이런 표현들은 원인이 아니라 순서를 말한다. 모든 것의 근원은 값없는 택하심이고, 나중 선물들은 그 첫 원인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 '행위 때문에'라는 표현은 순서를 뜻한다
- 앞선 은혜가 다음 은혜의 계단이 된다
- 참된 원인은 언제나 하나님의 긍휼이다
- 죄의 삯은 사망, 생명은 선물이다
- 근원은 값없는 택하심이다
2. 오해와 반론
| 입장 | 주장 | 칼빈의 답 | 근거 구절 |
|---|---|---|---|
| 일반 상식 | 믿지 않아도 정의롭고 절제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도 선하다 | 그 덕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사회를 지키는 데 유익하다. 하지만 하나님을 섬기려는 목적과 믿음이 없어 하나님 앞의 의는 아니다 | 요한일서 5:12, 히브리서 11:6 요한일서 5:12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
| 이름뿐인 신자·위선자 | 마음은 더러워도 좋은 행위 몇 개를 내놓으면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신다 | 마음이 씻기지 않으면 거룩한 행위도 더러워진다. 사람이 먼저 받아들여져야 행위도 받아들여진다 | 학개 2:11-14, 이사야 1:13-16, 잠언 15:8, 창세기 4:4 학개 2:11-14 11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니 너는 제사장에게 율법에 대하여 물어 이르기를 12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음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아니니라 하는지라 13학개가 이르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가운데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하니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부정하리라 하더라 14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들의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에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이사야 1:13-16 13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내 눈을 너희에게서 가리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라 16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실을 버리며 행악을 그치고 잠언 15:8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셔도 정직한 자의 기도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창세기 4: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
| 당시 '무지한 대중' | 그리스도가 구속하셨지만 그것을 내 것으로 하려면 내 행위가 보태져야 한다 | 성령이 그리스도의 피로 씻기 전까지 우리는 그리스도 밖의 원수다. 구원의 시작은 부활이다 | 고린도전서 6:11, 베드로전서 1:2, 로마서 5:10 고린도전서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베드로전서 1: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
| 많은 사람들 | 처음에 과거 죄를 용서받았으니 이제부터는 율법을 지켜 의를 쌓는다 | 율법은 끊임없는 완전한 순종을 요구한다. 우리는 평생 거듭되는 용서가 필요하다 | 에스겔 18:24, 야고보서 2:10, 시편 32:1 에스겔 18:24 만일 의인이 돌이켜 그 공의에서 떠나 범죄하고 악인이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대로 행하면 살겠느냐 그가 행한 공의로운 일은 하나도 기억함이 되지 아니하리니 그가 그 범한 허물과 그 지은 죄로 죽으리라 야고보서 2: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시편 32:1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
| 스콜라 신학자 | 칭의에는 성령의 갱신이 포함된다. 처음엔 믿음으로, 이후엔 선행의 공로로 의인으로 인정된다 | 칭의의 시작에서는 큰 이견이 없다. 그러나 오래 경건했던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 로마서 4:3, 하박국 2:4, 고린도후서 5:18-19 로마서 4: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하박국 2:4 보라 그의 마음은 교만하며 그 속에서 정직하지 못하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고린도후서 5:18-19 18모든 것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으니 19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
| 스콜라 신학자 | 선행은 그 자체로는 부족해도 하나님이 은혜로 받아 주시므로 가치가 있다 | 은혜는 행위를 받아 주는 장치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를 입히시는 값없는 선하심이다 | 레위기 18:5, 갈라디아서 3:10 레위기 18:5 너희는 내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말미암아 살리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갈라디아서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 잉여 공로설 | 의무 이상의 선행(성인들의 공로)이 모자란 행위를 갚아 준다 | 부분적인 의는 없다. 모든 의를 모아도 죄 하나를 못 갚는다. 하나님 사랑·이웃 사랑은 다 의무다 | 누가복음 17:10, 신명기 27:26, 창세기 3:17 누가복음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신명기 27:26 이 율법의 말씀을 실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창세기 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
| 잉여 공로설 | 바울이 사례받을 권리를 포기한 것이 의무 이상의 행위다 | 복음에 장애가 되지 않으려 한 일꾼의 의무였다. 종의 모든 것은 주인의 것이다 | 고린도전서 9:12, 누가복음 17:9 고린도전서 9: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누가복음 17: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
| 은혜를 반대하는 이들 | 구원의 재료와 통로에서는 행위도 믿음·그리스도의 의와 함께 절반의 역할을 한다 |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의이고, 그 혜택은 믿음으로만 받는다. 구원의 모든 원인은 우리 밖에 있다 | 요한복음 3:16, 로마서 3:23-26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로마서 3:23-26 23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25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26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
| 성경 본문을 원인으로 읽는 이들 | 성경이 '행위 때문에' 복을 주신다고 하니 행위가 구원의 원인이다 | 하나님이 정하신 순서에서 앞의 것을 뒤의 것의 원인이라 부를 뿐이다. 참 원인은 긍휼이다 | 로마서 8:30, 로마서 6:23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
| (흔한 오해) | 자기 삶의 변화를 보고 위로받으면 행위를 믿는 것이다 | 약속 위에 서 있다면 선행을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증거로 보고 믿음을 보강해도 된다 | 로마서 8:15, 잠언 14:26 로마서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잠언 14:26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
3. 용어
- 칭의(稱義)
- 하나님이 죄인을 그리스도 때문에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일.
- 중생(重生)
- 성령이 죽어 있던 사람을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일. '거듭남'과 같은 말.
- 성화(聖化)
- 거듭난 사람이 성령의 힘으로 평생 점점 거룩해지는 과정.
- 외식(外飾)
- 속은 그대로 두고 겉으로만 경건한 척하는 것. 위선.
- 육신
- 칼빈이 성경을 따라 쓰는 말로, 몸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떠난 사람의 타락한 본성 전체.
- 스콜라 신학
- 중세 대학(스콜라)에서 철학적 논리로 신학을 체계화한 흐름. 칼빈은 그중 '건전한' 이들과는 칭의의 시작에서 큰 이견이 없다고 말한다.
- 보속(補贖)
- 지은 죄의 값을 자기 행위로 채워 갚는다는 개념.
- 잉여 행위(잉여 공로)
- 하나님이 요구하신 의무를 넘어 더 한 선행. 당시 로마 교회는 이것이 자신이나 남의 부족을 채운다고 가르쳤다.
- 네 가지 원인
- 어떤 일이 일어나게 한 원인(유효적), 재료(질료적), 통로(형식적·수단적), 목적(목적적)으로 나누어 보는 철학의 틀.
- 중보자
-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서 둘을 화목하게 하는 분. 곧 그리스도.
4. 청년의 삶으로
5. 이 편의 결론
- 믿기 전 사람의 덕은 하나님의 선물이지만, 믿음과 하나님을 향한 목적이 없어 하나님 앞의 의가 되지 못한다.
- 거듭난 신자의 가장 좋은 행위에도 죄가 섞여 있으므로, 신자의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으로 받는 그리스도의 의다.
- 칭의는 '시작만 은혜, 이후는 행위'가 아니다. 평생 거듭되는 죄 사함이며, 잉여 공로나 보속이 끼어들 틈이 없다.
- 구원의 네 원인(아버지의 사랑, 그리스도의 순종, 믿음, 하나님의 영광)은 모두 우리 밖에 있다.
- 선행은 구원의 근거가 아니라 부르심의 열매이자 하나님이 정하신 순서 속 계단이다. 그 열매는 약속 위에서 믿음을 격려한다.
✏️ 본문을 드래그하면 형광펜(노랑·초록·분홍)과 밑줄을 칠할 수 있고, 칠한 곳을 누르면 메모를 적을 수 있습니다. 위의 가−/가+ 로 글자 크기를 바꿉니다. 모두 이 브라우저에 저장됩니다.
빛다방 학습 노트 · 원문 미전재 · 성경 장절은 개역개정 · PDF · quritan.com 판 · youtube.com/@빛다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