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없이 그냥 '하나님'만 믿으면 안 될까? 그리고 아무도 다 지킬 수 없는 율법은 하나님이 왜 주셨을까?
앞 장들에서 칼빈은 타락한 인간이 스스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보였다. 6장은 거기서 출발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은 중보자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고 말한다. 칼빈은 이것이 신약에서 처음 나온 생각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아브라함 언약, 다윗 왕조, 선지자들의 약속 속에서 구약 성도들의 소망은 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향해 있었다는 것이다. 7장은 그 사이에 주어진 모세의 율법이 이 소망을 가로막는 벽이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율법은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소망을 붙들어 주는 장치였다. 의식법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였고, 도덕법은 세 가지 일을 한다.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드러내 그리스도께 달아나게 하고, 사회의 악을 억누르며, 이미 믿는 사람을 가르치고 일깨운다. 마지막으로 칼빈은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말이 무엇을 뜻하고 무엇을 뜻하지 않는지 정리하며 끝맺는다.
1. 절별 정리
제6장 · 타락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을 구해야 함
1. 그리스도 밖에는 참된 예배도, 자녀 됨도 없음 (절 제목은 발췌에 없어 정리자가 붙임 · 발췌는 절 후반부부터)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고 말씀하셨다. 칼빈은 이 말씀에서 두 가지를 읽는다. 하나는 이방 종교들이 모두 거짓이라는 판정이다. 다른 하나는 구속주가 왜 율법 아래에서 택한 백성에게만 약속되었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바라보지 않는 예배는 어떤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적이 없다. 요한복음은 생명이 처음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었는데 세상이 그 생명에서 떨어져 나갔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근원으로 돌아가는 길밖에 없다. 하늘의 유업은 하나님의 자녀에게만 주어지는데, 독생자의 몸에 접붙지 않은 사람을 자녀라고 부를 수는 없다. 믿음 자체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뒤(3권 2장)로 미룬다.
- 그리스도를 보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이 받지 않으심
- 생명의 근원은 그리스도, 세상은 거기서 떠남
- 하나님의 자녀 = 그리스도께 접붙은 사람
- 하늘 유업은 자녀에게만 주어짐
- 믿음에 대한 본격 논의는 3권으로 미룸
2. 구약 시대에도 중보자께서 제시되셨음
하나님은 구약 백성에게도 중보자 없이 자비나 은혜의 소망을 주신 적이 없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 전체를 언약에 넣으셨지만, 바울은 모든 민족에게 복을 가져올 '씨'가 그리스도라고 추론한다.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이 다 자손으로 인정받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스마엘은 제쳐 두더라도, 에서와 야곱은 태어나기 전에 이미 한 사람은 택함 받고 한 사람은 버림받았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씨'는 머리이신 한 분 안에서 인정되고, 하나님이 처음 백성을 택하신 일도 중보자의 은혜에 근거한다. 모세의 글에는 이것이 아직 분명한 말로 나오지 않는다. 그래도 경건한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왕정이 서기 전 한나의 노래, 다윗에게 주신 언약, 나라가 갈라지고 거의 망할 때마다 되풀이된 "다윗을 위하여 등불을 남긴다"는 약속이 그 증거다. 칼빈의 결론은 이렇다. 하나님은 교회의 안전이 그 머리에 달려 있게 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율법 아래에서도 늘 믿음의 대상으로 조상들 앞에 세워져 계셨다.
- 구약에서도 중보자 없는 은혜는 없었다
- 아브라함의 '씨'는 결국 한 분 그리스도
- 혈통이 아니라 택하심, 택하심은 중보자 은혜
- 다윗 왕조는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형상'
- 교회의 안전은 머리(왕)에게 달려 있다
그리스도야말로 언약과 믿음에 필수적이심. 3-4
3. 구약의 믿음과 소망은 약속에 근거함
환난 중의 위로와 교회의 구원이 나오는 곳마다 그리스도를 향한 소망의 '깃발'이 서 있다. 선지자들은 교회의 회복을 말할 때마다 다윗 나라가 영원하리라는 약속을 다시 떠올리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약이 흔들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이사야의 경우가 의미심장하다. 아하스 왕이 예루살렘이 곧 구원받는다는 말씀을 믿지 않자, 이사야는 갑자기 메시아 이야기로 넘어가 '임마누엘'을 선포한다. 왕과 백성이 약속을 거부해도, 구속주가 정한 때에 오시므로 언약은 무효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예레미야, 에스겔, 호세아, 미가, 아모스, 스가랴도 모두 '다윗'과 '왕'과 '한 목자'를 통한 회복을 말한다. 칼빈은 이것으로 경건한 사람들의 소망이 늘 그리스도께만 있었다는 점을 독자에게 상기시키려 한다. 구원은 머리에서 온몸으로 흘러내린다.
- 위로와 회복의 약속엔 늘 '기름 부음 받은 자'
- 아하스가 불신해도 임마누엘로 언약은 지속
- 모든 선지자가 다윗 나라에 구원을 걸었다
- 구원은 머리(그리스도)에서 몸(교회)으로
4.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필수적임
하나님은 유대인들이 이런 예언으로 배워서 구원을 찾을 때 그리스도께 곧바로 눈을 돌리기를 원하셨다. 그들이 부패했어도 "하나님이 다윗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를 통해 교회를 구원하신다"는 기본 원리는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입성 때 아이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를 외칠 수 있었다. 예수께서도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셨다. 엄밀히 말하면 믿음은 그리스도를 거쳐 아버지께로 올라간다. 하지만 중보자가 붙들어 주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차츰 사라진다. 하나님의 위엄이 너무 높아서 죽을 인생은 혼자 거기 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칼빈은 "하나님이 믿음의 대상"이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단서를 단다. 그리스도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므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만나 주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을 확신할 수 없다. 경건의 첫걸음은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로서 영원한 기업에 이를 때까지 우리를 돌보고 다스리고 기르신다는 것을 아는 데 있다. 칼빈은 교부 이레나이우스의 말도 인용한다. 무한하신 아버지가 아들 안에서 우리 분량에 맞춰 자신을 낮추셨다는 것이다. 어떤 광신자들은 이 말을 비틀어 그리스도 안에 신성의 일부만 있다고 했다. 칼빈은 이 말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알 수 있다"는 뜻일 뿐이라고 답한다. 끝으로 칼빈은, 중보자 없이 지극히 높은 창조주를 섬긴다고 자랑한 사람들이 결국 미신에 빠졌다고 말한다. 당시의 이슬람교도들도 창조주를 고백하지만 그리스도를 거부하기 때문에 결국 우상을 섬기는 것이라고 본다.
- 믿음은 그리스도를 거쳐 아버지께 오른다
- 중보자 없으면 하나님 지식은 덧없이 사라짐
- 그리스도 =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
- 경건의 첫걸음: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
- 창조주 고백만으로는 참 하나님께 닿지 못함
제7장 · 율법이 주어졌으나, 이는 구약 백성을 그 아래 가두어 두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에 대한 소망을 그가 오시기까지 견고히 하기 위함이었음
의식법과 도덕법 모두가 그리스도를 지향함. 1-2
1. 의식법은 그리스도를 지향함
율법은 아브라함 이후 약 사백 년 뒤에 주어졌다. 앞 장의 증언들로 볼 때 율법은 백성을 그리스도에게서 떼어 놓으려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마음을 준비시키고, 그리스도를 사모하게 하고, 오시기까지 오래 기다리는 동안 낙심하지 않도록 소망을 굳게 하려고 주어졌다. 칼빈은 여기서 '율법'을 십계명만이 아니라 모세를 통해 주신 신앙 생활의 형식 전체로 본다. 모세는 조상들에게 값없이 주신 언약을 없애러 온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그 언약을 거듭 상기시킨 사람이었다. 동물 기름 타는 냄새, 물과 피 뿌리기 같은 제사 의식은 문자 그대로만 보면 우스꽝스럽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막을 산에서 보여 준 '본'대로 만들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영적인 예배만 기뻐하신다. 선지자들이 제사 자체를 귀하게 여기는 백성을 꾸짖은 것도 율법을 깎아내리려는 것이 아니었다. 율법의 본래 목표를 보게 하려는 '참된 해석자'의 일이었다. 또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부르셨는데, 부패한 아담의 후손이 왕과 제사장이 되려면 동물의 피보다 훨씬 큰 화목이 필요했다. 베드로는 이 말씀을 신자에게 적용해, 그 은혜가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히 드러났다고 가르친다.
- 율법은 그리스도까지 소망을 붙드는 장치
- '율법' = 십계명 + 모세의 신앙 형식 전체
- 의식은 그림자, 목적과 떼면 헛된 일
- 선지자의 책망은 율법의 목표를 가리킨 것
- 제사장 나라는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
2. 율법에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 제시되어 있음
칼빈은 다윗 왕국도 율법의 일부이며 모세의 경륜(하나님이 일을 이끌어 가시는 질서) 안에 포함된다고 본다. 그래서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과 다윗 왕조라는 '이중 거울'에 그리스도가 비쳐 보였다. 죄와 사망의 노예인 인간이 하나님 앞에 왕과 제사장으로 설 길은 그것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약속된 씨가 오기까지 백성이 '초등교사' 아래 있었다는 바울의 말이 맞다. 매일 새 제사를 드리던 시대에 이사야와 다니엘은 단 한 번의 제사를 약속했고, 시편 110편은 레위 계열이 아닌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영원한 제사장'을 말했다. 십계명에 대해서도, 그리스도가 의를 값없이 전가하시고 중생의 영을 주시기까지는 계명이 아무리 의를 가르쳐도 소용이 없다. 율법은 사람이 자기 정죄를 깨닫고 낮아지게 하려고 '더해진'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찾는 유일한 준비다. 바울이 율법을 좁게(행위의 규칙으로만) 말하는 곳은 행위로 의를 얻는다는 교사들과 논쟁할 때다. 그 밖의 곳에서는 율법 안에 값없는 양자의 언약이 함께 들어 있다.
- 다윗 왕국도 모세 율법 체계 안에 있다
- 제사장직과 왕직: 그리스도를 비춘 이중 거울
- 구약 백성은 초등교사 아래 있는 아이
- 계명만으론 소용없음, 전가와 중생이 필요
- 바울의 '율법' 비판은 논쟁 상황의 좁은 뜻
인간으로서는 도덕법을 지킬 수 없음. 3-5
3. 율법은 우리를 절망에 빠지게 함
도덕법은 우리 죄를 깨닫고 용서를 구하게 하려고 주어졌다. 그런데 그 가르침이 오히려 우리를 더 변명할 수 없게 만든다. 율법이 완전한 의를 가르친다면, 율법을 완전히 지킨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 맞다. 모세가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앞에 두었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면 영생의 상이 주어진다는 약속 자체는 진짜다. 문제는 우리가 그 조건을 채울 수 있느냐는 것이다. 율법의 요구는 인간의 능력을 훨씬 넘어선다. 그래서 우리는 약속을 멀리서 바라볼 뿐 실제로는 얻지 못한다. 결국 약속이 아름다울수록 우리의 비참함이 더 잘 보이고, 율법이 경고하는 위협만 우리를 쫓아온다.
- 완전히 지키면 생명: 약속 자체는 참이다
-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우리의 무능
- 약속은 멀리서 바라볼 뿐 손에 안 잡힘
- 율법만 보면 남는 것은 죽음의 위협
4. 율법의 약속의 의의
율법만 보면 남는 것은 정죄와 저주뿐이다. 그러면 이런 반문이 나올 수 있다. "얻을 수도 없는 행복을 보여 주며 초대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놀리시는 것 아닌가?" 칼빈의 대답은 이렇다. 율법의 약속에는 완전한 순종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고, 아무도 그 조건을 채우지 못한다. 그래도 약속이 헛되이 주어진 것은 아니다. 우리가 두 가지를 배울 때 약속은 효력을 낸다. 하나님이 우리 행위를 보지 않고 값없는 선하심으로 받아 주셔야 한다는 것, 그리고 복음이 제시하는 그 선하심을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은 우리의 불완전한 순종을 버리지 않으시고, 모자란 것을 채워 마치 조건을 다 이룬 것처럼 약속을 누리게 하신다. 자세한 것은 3권의 칭의(11장)에서 다룬다고 미룬다.
- "하나님이 우리를 놀리시나?"라는 반문
- 약속엔 완전 순종의 조건이 붙어 있음
- 은혜와 믿음 안에서 약속은 효력이 생김
- 불완전한 순종도 채워서 받아 주심
- 상세 논의는 3권 칭의론으로
5. 육체를 지닌 인간으로서는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음
"율법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터무니없게 여기는 사람이 많다. 교부 히에로니무스는 이 말을 저주하기까지 했다. 칼빈은 '불가능'을 이렇게 정의한다. 지금까지 일어난 적이 없고, 하나님의 작정 때문에 앞으로도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뜻이다. 죽을 몸을 가진 성도 중에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은 없었고, 육체의 정욕에서 자유로운 사람도 없었다. 로마 교회가 미신적으로 상상하는 '천사보다 순결한 성인'은 성경에도 경험에도 맞지 않는다.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은혜로도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며 아우구스티누스를 공격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이 원하시면 사람을 천사 같은 순결로 높이실 수 있지만, 성경에 선언하신 것과 반대로 하지는 않으신다고 답했다. 칼빈은 여기에 덧붙여,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서로 싸움 붙이는 것 자체가 어리석다고 말한다. 또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라, 사랑은 앎을 따라오는데 지금 우리는 희미하게만 알기에 사랑도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 '불가능' = 없었고, 작정상 없을 일
-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은 없었다
- '완전한 성인'은 성경과 경험에 어긋남
-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은 대립하지 않음
- 희미하게 알기에 사랑도 불완전하다
율법의 첫 번째 기능: 하나님의 의를 밝히 드러내어 인간의 죄성을 밝히고 온전히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바라도록 만듦. 6-9
6. 도덕법의 첫 번째 기능
칼빈은 도덕법의 기능을 세 가지로 나눈다. 첫째 기능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유일한 의를 보여 주는 것이다. 그것으로 각 사람에게 자기 불의를 경고하고, 알리고, 깨우치고, 정죄한다. 자기 사랑에 취한 사람은 자기 기준으로 자기를 재기 때문에 자신이 얼마나 약한지 모른다. 그런데 율법의 요구에 자기를 대 보는 순간 허세가 꺾이고, 무거운 짐 아래 비틀거리다 쓰러진다. 교만이라는 병도 고쳐진다. 혼자 판단할 때는 겉치레(외식)를 의로 여기지만, 삶 전체를 율법의 저울에 달아 보면 순결하다고 여긴 자신이 악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특히 탐심은 굴 속에 숨어 있어서 율법이 끌어내지 않으면 느끼지도 못한 채 사람을 망하게 한다.
- 도덕법에는 세 가지 기능이 있다
- 첫째: 하나님의 의로 우리 불의를 드러냄
- 자기 기준으로 재면 자신을 모른다
- 율법의 저울에 달면 교만이 꺾인다
- 숨은 탐심은 율법이 끌어낸다
7. 율법이 정죄의 기능이 있으나, 그 고유한 가치는 사라지지 않음
율법은 거울과 같다. 얼굴의 얼룩을 보듯 우리의 연약함을 보고, 거기서 나오는 죄를 보고, 그 둘의 결과인 저주를 본다. 바울이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다"고 할 때 말하는 것이 아직 거듭나지 않은 사람이 겪는 이 첫째 기능이다. 죄를 분명히 알수록 죄는 더 커진다. 율법을 주신 분께 대한 고집스러운 불순종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 자체로는 고소하고 정죄하고 무너뜨리는 일밖에 못 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처럼, 은혜의 성령 없이 율법은 우리를 고소해 죽일 뿐이다. 하지만 칼빈은 이 말이 율법을 깎아내리는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한다. 우리의 의지가 율법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면 율법을 아는 것만으로도 구원에 충분했을 것이다. 구원을 위해 주어진 율법이 죄와 죽음의 계기가 된 것은 우리의 부패한 본성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실은 오히려 율법의 뒷받침 없이 우리를 기르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더 빛나게 한다.
- 율법은 거울: 연약함, 죄, 저주를 비춤
- 죄를 알수록 죄책은 커진다
- 성령 없는 율법은 고소하고 죽일 뿐
- 문제는 율법이 아니라 부패한 본성
- 그래서 은혜가 더 아름답게 드러난다
8. 율법의 정죄의 기능이 신자와 불신자에게 미치는 효과
율법이 우리 모두의 죄를 드러낸다고 해서 곧장 절망으로 뛰어들 필요는 없다. 율법을 바르게 받으면 그렇게 되지 않는다. 버림받은 사람들은 마음이 완고해서 율법 앞에서 공포에 빠진다. 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에게 율법은 다른 목적을 가진다. 바울은 율법이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심판 아래 두는 것,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불순종에 가두신 것이 멸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긍휼을 베푸시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곧 자기 힘을 믿는 생각을 버리고, 빈손으로 하나님의 긍휼께 피해 거기서만 의를 찾게 하려는 것이다. 율법의 계명 속에서 하나님은 완전한 의에 상을 주시고 모든 악을 심판하시는 분으로 나타나신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무가치한 죄인에게도 은혜와 온유로 얼굴을 비추신다.
- 율법을 바르게 받으면 절망으로 끝나지 않음
- 불신자의 공포는 완고함에서 나온다
- 신자에게 율법은 긍휼로 피하게 하는 길
- 빈손으로 하나님의 긍휼께 피하라
- 율법 속 심판자, 그리스도 안의 은혜로운 얼굴
9. 율법의 정죄의 기능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진술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여러 편지에서 같은 말을 했다고 소개한다. 힐라리우스, 아셀리우스, 로마의 인노켄티우스(역자 주에 따르면 교황 인노켄티우스 1세), 발렌티누스에게 보낸 편지들이다. 요지는 이렇다. 율법은 명령하고 은혜는 행할 힘을 준다. 하나님이 우리가 못 하는 것을 명령하시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구해야 할지 알게 하시려는 것이다. 율법은 스스로 크다고 여기는 사람을 작게 만들어 은혜로 피하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의 은혜로만 이룰 수 있는 것을 명령하소서"라고 기도하기도 했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영과 문자에 대하여』라는 책을 따로 썼다. 다만 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율법의 둘째 기능은 분명히 다루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이 첫째 기능은 버림받은 사람에게도 작용한다. 그들은 새로워지지는 않지만, 율법과 양심 앞에서 두려워하며 스스로 심판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드러낸다. 그것으로 하나님 심판의 공정함이 증명된다.
- 율법은 명령하고, 은혜는 힘을 준다
- 못 할 일을 명령하심은 구할 것을 알게 하심
- 아우구스티누스는 둘째 기능을 분명히 다루지 않음
- 불신자의 두려움도 심판의 공정함을 증언
율법의 두 번째 기능: 악인과 불신자들을 억제시킴. 10-11
10. 율법의 두 번째 기능
둘째 기능은 옳고 그름에 관심 없는 사람들을 율법의 위협과 형벌에 대한 두려움으로 억누르는 것이다. 이것은 마음이 바뀌어서가 아니다. 손에 굴레가 씌워져 함부로 행동하지 못할 뿐이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 앞에서 더 의로워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억눌릴수록 속에서는 불길이 더 타오르고, 율법과 하나님을 미워한다. 그래도 이런 강요된 의는 공동체에 꼭 필요하다. 모두에게 모든 것이 허락되면 사회는 혼란에 빠지는데, 하나님은 이 장치로 질서와 평화를 지키신다. 아직 부르심을 받기 전의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도 유익하다. 두려움 때문에 겉으로라도 방종을 삼가며 '의의 멍에'에 조금 길들여지기 때문에, 부르심을 받을 때 전혀 훈련되지 않은 상태는 아니게 된다.
- 둘째: 형벌의 두려움으로 악을 억누름
- 손은 묶어도 마음은 바꾸지 못함
- 하나님 앞에서 더 의로워진 것은 아님
- 그래도 사회 질서에는 꼭 필요하다
- 부르심 전의 택자에게도 훈련이 됨
11. 율법이 초등교사의 역할을 함
바울이 율법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라고 부른 것은 앞의 두 기능을 다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초등교사가 인도하는 사람은 두 부류다. 첫째 부류는 자기 덕과 의를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먼저 비워져야 은혜를 받을 수 있으므로, 율법이 그들을 낮춘다. 둘째 부류는 육체의 욕망이 날뛰는 사람들이다. 이들에게는 굴레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택하신 사람을 곧바로 거듭나게 하지 않으실 때도 있는데, 그 기간에 율법의 두려움으로 그들을 지키신다. 이 두려움은 자녀다운 순결한 경외는 아니지만 나름대로 경건을 가르치는 데 유익하다. 칼빈은 하나님을 모르고 더듬던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율법의 굴레 아래 막연한 두려움과 존경을 품고 있다가 성령으로 거듭나며 비로소 마음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인정할 것이라고 말한다.
- 초등교사는 두 부류를 그리스도께 인도
- 자기 의로 가득한 사람: 비워서 낮춤
- 욕망이 날뛰는 사람: 굴레로 붙듦
- 거듭나기 전 택자를 두려움으로 지키심
- 노예적 두려움에서 자녀의 사랑으로
율법의 세 번째 기능: 신자들을 가르치며 권고함. 12-13
12. 신자들에게도 율법이 필요함
셋째 기능은 칼빈이 율법의 '가장 주된' 기능이자 율법의 본래 목적에 더 가깝다고 부르는 것이다. 성령이 이미 마음에 계시고 율법이 마음에 새겨진 신자들에게 율법은 두 가지로 유익하다. 하나는 가르침이다. 신자는 율법으로 하나님의 뜻을 날마다 더 깊이 배우고, 이미 깨달은 것을 확인한다. 주인을 진심으로 섬기려는 종이 주인의 뜻을 살피는 것과 같다. 율법을 더 배울 필요가 없을 만큼 지혜로운 사람은 없었다. 다른 하나는 권고다. 율법을 묵상하면 순종하려는 마음이 깨어나고 강해지며, 미끄러지려던 길에서 돌아선다. 신자에게도 굼뜬 육체가 남아 있어서, 율법은 게으른 나귀를 깨우는 채찍처럼 작용한다. 다윗이 시편 19편과 119편에서 율법을 찬양한 것이 바로 이 기능이다. 이것은 바울의 말과 모순되지 않는다. 바울은 율법 그 자체가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를 말했고, 다윗은 거듭난 사람에게 율법이 하는 일을 말한 것이다. 다윗은 계명과 함께 은혜의 약속을 붙들었고, 율법 안에서 중보자를 보았다. 그분이 없으면 율법에는 기쁨이 없다.
- 셋째, 가장 주된 기능: 신자를 위한 것
- 하나님의 뜻을 날마다 더 배우게 함
- 묵상으로 순종의 마음을 깨우고 붙듦
- 게으른 육체에는 나귀의 채찍
- 은혜의 약속이 율법을 달게 만든다
13. 율법을 폐지하는 것은 그릇된 처사임
어떤 무지한 사람들은 율법이 '죽게 하는 직분'이라는 이유로 모세의 글 전체와 두 돌판을 내던진다. 칼빈은 이런 생각을 단호히 거부한다. 모세 자신이 율법은 죄인에게는 죽음만 가져오지만 성도에게는 훨씬 나은 쓰임이 있다고 가르쳤다. 율법은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 생명"이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율법에 완전한 의의 본이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면, 바른 삶의 기준이 아예 필요 없든지 율법을 떠나면 안 되든지 둘 중 하나다. 삶의 기준은 여럿이 아니라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다. 그래서 '율법을 묵상하는 의인'(시편 1편)은 모든 시대에 해당한다. 몸이 있는 동안 율법의 순결에 이르지 못해도 율법을 피해선 안 된다. 율법은 이제 모든 요구가 채워지기 전에는 만족하지 않는 집행관처럼 우리를 몰아붙이지 않는다. 대신 평생 달려갈 목표를 보여 준다. 인생은 경주이고, 하나님이 마침내 그 목표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 신자에게 율법이 필요 없다는 생각은 거짓
- 율법은 성도에게 '생명'의 말씀
- 삶의 기준은 하나, 영원히 변하지 않음
- 율법은 집행관이 아니라 목표를 보여 줌
- 인생은 경주, 목표에 이르게 하실 분은 주님
율법의 폐지와 관련된 문제들. 14-17
14. 율법의 폐지된 면과 유효한 면
율법은 신자를 권고한다. 그 힘은 양심을 저주로 묶는 힘이 아니라 게으름을 흔들어 깨우고 불완전함을 채찍질하는 힘이다. 많은 사람이 "신자에게 율법(도덕법)은 폐지되었다"고 말한다. 그 말이 옳은 경우는 율법이 더 이상 신자의 양심을 위협하고 정죄하고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뜻일 때뿐이다. 율법이 무엇이 옳은지 더 이상 명령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예수께서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굳이 부정하신 것을 보면, 당시 유대인들 사이에 그런 오해가 퍼져 있었던 것 같다. 그 오해는 아마 예수의 가르침을 잘못 해석한 데서 나왔을 것이다. 오류는 대개 진리를 계기로 생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율법에서 폐지된 것과 여전히 구속력이 있는 것을 정확히 구별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다. 율법은 여전히 가르치고, 권하고, 책망하고, 바로잡는다.
- 폐지된 것: 양심을 정죄하는 힘
- 남아 있는 것: 무엇이 옳은지 가르치는 힘
- 오류는 대개 진리를 오해해서 생긴다
-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지 않고 완성하심
- 율법은 지금도 가르치고 바로잡는다
15. 율법이 폐지되었다는 말의 의미
바울이 말하는 '폐지'는 율법 자체가 아니라 양심을 속박하는 율법의 힘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율법은 가르치기만 하는 게 아니라 곧바로 집행한다. 한 가지라도 어기면 저주를 내린다. 바울이 "율법 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 아래 있다"고 할 때, 그 사람들은 자기 의의 근거를 죄 용서에 두지 않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죄 용서를 통해 율법의 엄격한 집행에서 풀려난다. 그리스도께서 나무에 달려 우리 대신 저주를 받으셨고, 율법 아래 나셔서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을 속량하고 우리에게 아들의 지위를 주셨다. 그 결과 우리 양심은 더 이상 죽음의 두려움에 짓눌리지 않는다. 그러나 율법은 권위를 조금도 잃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여전히 같은 존경과 순종으로 율법을 대해야 한다.
- 폐지된 것은 율법이 아니라 양심의 속박
- 율법은 한 점만 어겨도 저주를 집행함
- 그리스도가 대신 저주를 받으심
- 목적은 자녀의 지위를 주시려는 것
- 율법의 권위는 그대로, 존경과 순종도 그대로
16. 의식법
의식법은 사정이 다르다. 의식의 '효력'은 폐지되지 않았고 '사용'만 폐지되었다. 그리스도는 의식들을 끝내셨지만 그 거룩함을 깎지 않으셨고 오히려 인정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능력이 담겨 있지 않았다면 의식은 구약 백성에게도 빈 껍데기였을 것이다. 또 의식이 끝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그것이 왜 있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은 의식이 그림자이고 실체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친다. 그리스도가 죽으실 때 성소 휘장이 찢어진 것은, 희미하던 하늘의 복이 이제 분명한 형상으로 드러났다는 표시다. 그렇다고 족장들에게 구원과 영생의 소망이 없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이 멀리서 윤곽만 보던 것을 우리는 대낮의 빛 속에서 본다는 뜻이다. 옛 제사에도 속죄가 진정으로 약속되어 있었고 언약궤도 하나님의 아버지 같은 사랑의 보증이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은혜에 근거하지 않았다면 모두 그림자였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의식의 사용을 폐하시고, 자신의 죽음으로 그 효력을 확증하셨다.
- 의식: 사용은 폐지, 효력은 확증
- 의식은 그림자, 실체는 그리스도
- 휘장이 찢어짐: 희미한 것이 선명해짐
- 족장들도 소망이 있었으나 멀리서 보았다
- 끝났기에 오히려 그 가치가 보인다
17. 골로새서의 진술에 나타나는 문제
골로새서 2장 13~15절은 "우리를 거스르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워 십자가에 못 박으셨다"고 말한다. 이 말씀은 마치 율법의 명령 전체가 우리와 상관없어졌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첫째 해석은 이것을 도덕법으로 보고, 도덕법의 가르침은 남고 가혹함만 폐지되었다고 읽는다. 칼빈은 이 해석이 틀렸다고 본다. 둘째 해석은 이것을 의식법으로 보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막힌 담'을 허문 에베소서 2장과 같은 내용이라고 읽는다. 칼빈은 둘째 해석이 첫째를 바르게 비판했다고 인정하지만, 충분하지는 않다고 본다. 에베소서는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교제 안으로 들어왔다는 이야기다. 반면 골로새서는 모세 규례를 강요하는 거짓 사도들에 맞서 문제의 뿌리까지 내려간다. 의식을 지킬 의무만 말하는 것이라면 그것을 "우리를 거스르는 증서"라고 부르고 구원의 근거를 그 증서가 지워진 데 둘 이유가 없다. 칼빈의 답은 아우구스티누스를 따른다. 의식에는 죄를 없애는 '대속'이 아니라 죄를 인정하는 '고백'이 담겨 있었다. 제물을 바친 것은 "나는 죽어 마땅하다"는 고백이었고, 정결 예식은 "나는 더럽다"는 고백이었다. 그러니 의식을 반복할수록 자기 죄를 기록한 '증서'를 갱신한 셈이다. 그래도 구약 백성은 의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와 같은 은혜에 참여했다. 그런데 거짓 사도들처럼 다시 의식에 묶이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잃는다. 그리스도가 영원한 속죄를 이루셔서, 죄를 확인만 하던 그 의식들을 없애셨기 때문이다.
- '증서를 지움'은 도덕법 폐지가 아니다
- 에베소서 2장보다 깊은 뿌리를 다룸
- 의식은 대속이 아니라 죄의 고백이었다
- 반복할수록 죄의 증서를 갱신한 셈
- 다시 의식에 묶이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잃음
2. 오해와 반론
| 입장 | 주장 | 칼빈의 답 | 근거 구절 |
|---|---|---|---|
| 일반 유신론 / 창조주 신앙 (2권 6장 4절) | 천지를 지은 지극히 높은 신을 섬기면 그리스도 없이도 충분하다 | 중보자 없는 하나님 지식은 덧없이 사라져 결국 미신과 우상으로 간다 | 요한일서 2:23, 요한복음 14:1 요한일서 2: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요한복음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
| 혈통 중심 이해 (6장 2절) | 아브라함의 육체적 후손이면 누구나 약속의 상속자다 | '씨'는 머리이신 그리스도 한 분 안에서 인정된다. 택하심 자체가 중보자의 은혜다 | 갈라디아서 3:16, 로마서 9:11 갈라디아서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로마서 9:11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
| 광신자들의 이레나이우스 왜곡 (6장 4절) |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일부만 흘러들어 있다 | 이레나이우스의 뜻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알려진다는 것이다 | 요한일서 2:23, 골로새서 1:15 요한일서 2:23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또한 아버지가 없으되 아들을 시인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 골로새서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
| 의식을 귀하게 여긴 유대인 (7장 1절) | 제사 자체가 하나님 앞에 가치가 있다 | 하나님은 영이시라 영적 예배를 원하신다. 의식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그림자일 뿐이다 | 출애굽기 25:40, 히브리서 8:5 출애굽기 25:40 너는 삼가 이 산에서 네게 보인 양식대로 할지니라 히브리서 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
| 의식을 조롱하는 불신자 (7장 1절) | 기름 태우고 피 뿌리는 것은 어린애 장난이다 | 목적에서 떼면 헛되어 보이지만, 의식은 그리스도를 향한 표지였다 | 사도행전 7:44, 히브리서 8:5 사도행전 7:44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그가 본 그 양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히브리서 8:5 그들이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모세가 장막을 지으려 할 때에 지시하심을 얻음과 같으니 이르시되 삼가 모든 것을 산에서 네게 보이던 본을 따라 지으라 하셨느니라 |
| 행위의 의를 가르치는 교사들 (7장 2절) |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될 수 있다 | 계명은 의를 가르치지만 전가와 중생 없이는 소용없다. 율법은 낮추려고 더해졌다 | 고린도후서 3:6, 갈라디아서 3:19 고린도후서 3: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갈라디아서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
| "하나님이 놀리시나?" (7장 4절) | 지킬 수 없는 조건의 약속은 조롱이다 | 은혜로 받아 주시고 모자란 순종을 채우시기에 약속은 효력이 있다 | 갈라디아서 3: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
| 히에로니무스 (7장 5절) |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말은 저주받을 주장이다 | '불가능' = 없었고 작정상 없을 일. 성경과 경험이 증언한다 | 전도서 7:20, 시편 143:2, 갈라디아서 5:17 전도서 7:20 선을 행하고 전혀 죄를 범하지 아니하는 의인은 세상에 없기 때문이로다 시편 143: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하지 마소서 주의 눈 앞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갈라디아서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
| 펠라기우스주의 (7장 5절) | 은혜로도 못 할 것을 요구하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능력과 신실하심을 대립시키지 말라. 사람에겐 불가능해도 하나님은 하신다 | 마태복음 19:25-26 25제자들이 듣고 몹시 놀라 이르되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26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
| 로마 교회의 성인 이해 (7장 5절) | 천사보다 순결한 완전한 성인이 있다 | 성경에도 경험에도 어긋난다. 몸이 있는 동안 완전에 이른 사람은 없다 | 열왕기상 8:46, 욥기 9:2 열왕기상 8:46 범죄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없사오니 그들이 주께 범죄함으로 주께서 그들에게 진노하사 그들을 적국에게 넘기시매 적국이 그들을 사로잡아 원근을 막론하고 적국의 땅으로 끌어간 후에 욥기 9:2 진실로 내가 이 일이 그런 줄을 알거니와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
| 율법 폐기론자 (7장 13절) | 율법은 죽게 하는 직분이니 신자는 모세와 두 돌판을 버려야 한다 | 율법은 성도에게 생명이다. 삶의 기준은 하나이고 영원하다 | 신명기 32:46-47, 시편 1:2, 마태복음 5:17-18 신명기 32:46-47 46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증언한 모든 말을 너희의 마음에 두고 너희의 자녀에게 명령하여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라 47이는 너희에게 헛된 일이 아니라 너희의 생명이니 이 일로 말미암아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 차지할 그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시편 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마태복음 5:17-18 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18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도 결코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
| 골로새서 2장 첫째 해석 (7장 17절) | '증서'는 도덕법이고, 가혹함만 폐지되었다 | 틀렸다. 본문은 의식이 담은 죄의 고백을 말한다 | 골로새서 2:13-15, 히브리서 10:3 골로새서 2:13-15 13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14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15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히브리서 10:3 그러나 이 제사들에는 해마다 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 있나니 |
| 골로새서 2장 둘째 해석 (7장 17절) | '증서'는 에베소서 2장처럼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르는 의식이다 | 부분적으로 옳지만, 골로새서는 의식이 죄를 확인만 했다는 더 깊은 문제를 다룬다 | 에베소서 2:14-15, 히브리서 9:15 에베소서 2:14-15 14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히브리서 9:15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
| 거짓 사도들 (7장 17절) | 그리스도인도 모세 규례를 지켜야 한다 | 의식에 다시 묶이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잃는다 | 골로새서 2:16-17 16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17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
3. 용어
- 중보자
-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서 둘을 화해시키는 분. 칼빈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고 말한다.
- 구속(주)
- 값을 치르고 죄와 사망에서 건져 내는 일. 그 일을 하시는 분이 구속주다.
- 기름 부음 받은 자
- 히브리어로 '메시아', 헬라어로 '그리스도'. 구약에서 왕과 제사장을 세울 때 기름을 부은 데서 나온 말이다.
- 의식법
- 제사, 정결 예식, 성막처럼 구약 예배의 형식을 정한 규정. 그리스도가 오신 뒤 사용은 끝났다.
- 도덕법
- 십계명으로 요약되는, 하나님과 이웃을 어떻게 사랑할지에 대한 변하지 않는 기준.
- 그림자 / 예표
- 나중에 올 실체(그리스도)를 미리 희미하게 보여 주는 모형. '예표'는 앞서 보여 주는 표라는 뜻이다.
- 초등교사
- 옛날 부잣집 아이를 학교까지 데려가고 감독하던 종(개역성경 '몽학선생'). 율법이 그리스도께 데려가는 역할을 가리킨다.
- 전가
-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쳐 주는 것. 그리스도의 의를 믿는 사람의 의로 인정해 주신다는 뜻이다.
- 중생
-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 겉이 아니라 마음의 근본이 바뀌는 일이다.
- 율법의 세 기능
- ① 죄를 비추는 거울 ② 악을 억누르는 굴레 ③ 신자를 가르치고 깨우는 안내자이자 채찍.
4. 청년의 삶으로
5. 이 편의 결론
- 타락한 인간에게 하나님께 가는 길은 중보자 그리스도 한 분뿐이고, 구약 성도의 소망도 언제나 그분을 향해 있었다.
- 모세의 율법은 그리스도를 가로막는 벽이 아니라 그분이 오실 때까지 소망을 붙드는 장치였다.
- 도덕법은 죄를 비추는 거울, 악을 누르는 굴레, 신자를 가르치고 깨우는 안내자라는 세 가지 일을 한다.
- 신자에게 폐지된 것은 율법의 정죄하는 힘이지 가르침이 아니다. 의식법은 사용이 끝났고 효력은 그리스도로 확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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