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리탄
6부 새로운 공동체를 창조하시는 성령

22장 성령의 은혜의 방편들

헤르만 바빙크 『개혁파 교의학』 (새물결플러스, 단권 축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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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님은 어떤 통로로 은혜를 주시는가?

  • 바빙크는 은혜를 표지와 떼어 놓는 신비주의와 사제 의식에 묶는 로마 사이에서 종교개혁의 중도를 취한다. 교회가 아니라 성경이 으뜸 방편이다.
  • 말씀은 율법과 복음으로 구분되지만 둘은 늘 함께 선포되어야 한다. 개혁파에게 율법은 영속적이다.
  • 성령은 말씀과 더불어(cum verbo) 일하신다. 말씀은 늘 능력이 있지만 열매는 성령이 마음을 여실 때 맺힌다.
  • 성례는 말씀에 딸린 보이는 말씀, 언약의 표지와 인침이다. 내용은 말씀과 같은 그리스도이며 믿음이 있는 곳에서만 유익하다.
  • 세례는 할례를 잇는 언약의 표지라 신자의 자녀도 받는다. 성찬은 자기를 살필 수 있는 신자의 성숙의 성례다.

앞 장의 교회, 곧 그리스도와 그 유익을 누리는 모임이 어떻게 세워지는가를 이어받는다. 성례가 인치는 죄 사함과 영생의 약속이 어떻게 완성되는가의 물음은 다음 장들(7부)로 넘어간다.

1. 은혜의 방편들 원서 1081–1085쪽

은혜는 방편에 매이지도 않고, 방편이 은혜를 자동으로 주지도 않는다. 엄밀히는 말씀과 성례만이 은혜의 방편이다.

신비주의 과소평가

은혜는 외적 표지에 묶일 수 없다. 내적 말씀과 빛이 직접 일한다. 성경과 성례는 이미 마음에 있는 것을 표현할 뿐. 소키누스주의·항변파도 성례를 기념·고백 표지로만 본다.

로마 가톨릭 마술적 과대평가

가시적 교회 자체가 가장 탁월한 성례. 사제의 성사가 사효적으로(ex opere operato) 초자연적 은혜를 주입. 선포와 믿음은 예비 단계로 내려간다.

종교개혁 중도

은혜는 사제의 권세가 아니라 말씀의 영적 권세. 교회가 아니라 성경이 탁월한 방편. 성례는 말씀에 종속. 말씀과 성례를 하나님의 일반적 방편으로 긍정.

  • 예외: 유아기에 죽은 언약의 자녀처럼 성령만으로 구원하시는 경우를 인정하되 예외로 둔다. 바빙크는 이것이 중생에 관한 사변으로 번지는 것을 경계한다.
  • 넓은 의미의 방편에는 직분·은사·믿음·회심·기도 등 언약의 유익을 누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이 들어간다. 그러나 엄밀히는 말씀과 성례만이 그리스도가 정하신 외적 행위와 표지다.
  • 방편은 그리스도의 인격·사역에서도, 유기체이자 기관인 교회에서도 분리될 수 없다.

2. 말씀의 선포 원서 1085–1086쪽

말씀은 소리가 아니라 능력이며 하나님의 뜻의 성취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지 않고 성취하셨다.

  • 말씀은 율법과 복음, 행위언약과 은혜언약을 모두 담으므로 교회의 공적 선포보다 넓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이라는 책을 구분하자고 한다.
  • 하나님은 말씀으로 창조·보존하시고(창 1:3), 예수는 말씀으로 바다를 잠잠케 하셨다(막 4:39). 같은 말씀이 도덕과 영의 영역에서도 일한다(사 55:11).
  • 예수와 율법: 바리새적 율법주의와 인간적 규례는 거부하셨으나 율법 전체의 타당성은 인정하셨다. 율법을 영적으로 풀고 하나님과 이웃 사랑을 그 전부로 보셨다. 혁명적 전복이 아니라 성취를 통한 갱신(마 5:17).
  • 바울과 율법: 기록된 법전으로서의 율법(토라 전체)이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폐기되었음을 처음 온전히 깨달았다(골 2:14). 율법은 의를 낳지 못하고 죄를 더하며 진노를 낳지만 여전히 거룩하고 선하다.
  • 신자는 율법의 저주에서 풀려났으나, 이 자유는 율법을 없애지 않고 확증한다(롬 3:31). 율법의 요구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에서 이루어진다(롬 8:4).

3. 율법과 복음의 구분 원서 1087–1090쪽

율법과 복음은 두 언약 모두에 있는, 본질이 다른 두 계시다. 복음은 한시적이고 율법은 영속적이며, 복음이 율법을 회복한다.

  • 반율법주의(영지주의·마니교·재세례파)는 대립을 극단으로 몰고, 율법주의(펠라기우스주의·로마·소키누스주의·합리주의)는 대립을 지운다.
  • 로마는 옛 언약 = 율법, 새 언약 = 복음으로 보고 예수도 입법자로 보아 복음을 ‘새로운 율법’으로 만들었다. 율법은 미완성의 복음, 복음은 완성된 율법이 된다.
  • 종교개혁은 은혜언약의 통일성을 지키면서도 율법과 복음을 본질이 다른 두 계시로 대비시켜 은혜의 종교로서 기독교의 독특성을 되찾았다.
  • 핵심: 율법·복음 구분 ≠ 옛 언약·새 언약 구분. 아브라함의 약속은 옛 언약 안의 복음이었다(갈 3:8). 율법을 정죄의 도구로 만든 것은 율법이 아니라 죄다.
구분율법복음
근원하나님의 거룩함하나님의 은혜
알려지는 길본성으로 알려짐, 모든 사람에게특별계시로만
내용요구·명령·질병·사망선물·약속·치료·생명
작용자기 의를 요구하고 정죄그리스도의 의를 제공하고 무죄 선고
  • 믿음과 회개는 율법인가 복음인가? 엄밀히 복음에는 조건이 없고 약속과 선물만 있다. 그러나 복음은 늘 율법을 전제한다. 그래서 믿음과 회개는 율법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면서도 그 내용은 복음에 속한다.

루터파

율법의 정죄 기능에 집중. 율법은 죄 때문에만 필요하다.

개혁파

율법은 하나님 존재의 표현으로 영속적. 율법에서의 자유 = 더 이상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정죄하지 못함. 율법은 감사의 교리에 자리하며 복음과 함께 늘 선포된다(롬 7:22; 시 1:2).

4. 성령과 말씀 그리고 권세 원서 1091–1094쪽

성령은 늘 말씀과 더불어, 그러나 늘 같은 방식으로는 아니다. 말씀은 결코 무력하지 않다.

입장말씀과 성령
율법주의 (유대교·펠라기우스주의·합리주의·로마)성령의 특별한 초자연적 능력이 필요 없다
반율법주의 (재세례파·신비주의)외적 말씀과 구원의 역사적 매개를 버리고 내적 말씀과 빛에만 의존 → 사실상 범신론적 신비주의
루터파성령은 일반적으로 말씀과 함께. ‘말씀을 통해’(per verbum)
개혁파성령은 일반적으로 말씀과 함께. ‘말씀과 더불어’(cum verbo)
  • 말씀은 율법의 형태로 올 때도 늘 능력과 함께 온다(살전 2:13; 히 4:12; 롬 1:16). 내적/외적, 영/물질을 맞세우는 모든 이원론과 신령주의를 거부한다. 하나님은 영혼과 육체 모두의 창조주시다.
  • 성경에 기초해 선포된 말씀도 본질상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은 하나님에게서 이신론적으로 분리되지 않는다. 성령은 인격으로서 늘 말씀과 함께 거하신다.
  • 그러나 결과는 다르다. 잃어버린 자에게 복음은 넘어짐과 사망의 냄새가 된다(고후 2:16). 성령은 말씀을 통해 회개하게도, 강퍅하게도 하신다.
  • 믿음으로 이끄실 때 말씀에 객관적으로 무엇을 더하시지는 않는다. 다만 씨앗에는 준비된 토양이 필요하다. 마음을 열고(행 16:14) 지각을 밝히는(엡 1:18) 일은 성령의 구별된 사역이되 말씀에서 분리된 사역은 아니다. 이 영은 그리스도가 획득하여 부으신 그리스도의 영이다.

5. 성례 원서 1094–1096쪽

성경에는 ‘성례’라는 통칭이 없고, 역사가 7성사를 만들었다.

  1. 초대 교회두 모임: 비회원도 오는 말씀 모임(성경 읽기·기도·찬송)과 신자만 오는 성찬 모임(감사 → 공동 식사 아가페 → 성찬). 바빙크: 바울은 일반 식사와 성찬을 구분했다(고전 11:20–21).
  2. 2세기두 모임이 합쳐져 성찬이 정규 예배에 통합. 세례 교인만의 것이 되어 ‘신비’의 색채.
  3. 신비종교의 영향신약의 ‘뮈스테리온’(감춰졌다가 드러난 하나님의 행위)이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여져 sacramentum으로 번역 → 서품·혼인·축귀·안식일 등 온갖 거룩한 행위가 성사로 불림.
  4. 롬바르두스처음으로 7성사 열거(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 등은 여전히 넓은 의미로 사용).
  5. 1439년 피렌체 공의회7성사로 수를 확정. 이어 트리엔트 공의회가 교리를 굳힘.
중세의 합의그리스도가 세례·견진·성체·고해·종부·신품·혼인을 제정 · 각 성사는 특별한 은혜를 주며 구원에 필요 · 은혜는 사효적으로 전달 · 서품 받은 사제만 합법적 집행 · 수령자는 받으려는 의도 필요 · 세례·견진·신품은 지워지지 않는 특성(character indelebilis)을 새긴다.

6. 성사론의 변질과 개혁자들 원서 1097쪽

개혁자들은 성례가 사죄의 은혜를 주되 말씀과 믿음을 전제한다고 바로잡았다.

  • 로마의 변질: 성사는 성화의 은혜만 준다(은혜가 죄책·사죄에서 떨어짐) → 말씀과 연결이 끊김(말씀은 예비적) → 믿음이 조건이 아님(장애물만 없으면 됨) → 사제 손의 도구로 물리적·마술적 작용.
  • 개혁자 공통: 성례는 사죄의 은혜를 주고, 말씀 없이는 무가치하며, 수혜자의 믿음을 전제한다.

루터

재세례파에 맞서 객관성 강조. ‘하늘의 실체’가 요소 안에·함께·아래 감춰져 성례가 은혜의 매개체가 된다.

츠빙글리

성례는 무엇보다 믿음의 상징이자 신앙고백 행위. 믿음 강화는 부차적 기능.

칼뱅

고백은 부차적. 성례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표지와 인침, 은혜를 비추는 거울. 본유적 능력은 없고 하나님이 택하신 도구. 불신자는 표지만 받는다.

이후 재세례파·소키누스주의·항변파·합리주의·퀘이커는 츠빙글리 쪽으로 기울어 성례를 덕을 위한 기념물로 떨어뜨렸다. 슐라이어마허의 통합 시도도 교회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7. 개혁파의 성례 정의 원서 1099–1101쪽

성례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언약의 가시적 표지와 인침이다. 그리스도만이 성례의 유일한 제정자요 분여자시다.

  • ‘성례’라는 말이 성경에 없다고 버릴 이유는 없다. 신학은 성경에 없는 전문 용어를 많이 쓴다. ‘성례 일반’ 교리도 할례·유월절·세례·성찬의 공통 요소를 정리하고 불건전한 교리에 맞서게 해 준다.
  1. 제정자는 하나님사람은 예배를 만들 수 없다(고전 11:23). 트리엔트는 7성사 모두 그리스도가 직접 제정했다고 선언해 신학에 수행 불가능한 책무를 지웠다. 다만 제정권이 피조물에게 양도될 수 없다고 본 점은 옳다.
  2. 성례는 ‘표지’루터파는 표지 안·함께·아래서 은혜가 전달되는 ‘행위’로 본다. 개혁파의 행위는 성령으로 마음에 은혜를 주시는 그리스도의 비가시적 행위. 집례자 행위에 초점을 두면 공재설·화체설로 기운다.
  3. 하나님의 행위 + 신자의 고백하나님이 약속을 인치시고, 신자는 회심·믿음·순종·교제를 고백하며 언약을 갱신한다. 이렇게 칼뱅은 루터와 츠빙글리를 화해시킨다.

8. 표지와 인침, 말씀과 성례 원서 1102–1105쪽

“성례는 가시적으로 드러난 말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말씀을 떠나서는 세례의 은혜도 성찬의 은혜도 없다.

  • 성례 = ‘말씀’ + ‘요소’. 표지에는 자연적/제정된, 평범한/특별한, 기념적(수 4:6)/예고적/항구적 표지가 있다. 성례는 비가시적·영원한 선을 나타내려 가시적인 것에서 취한 특별한 표지다.
  • 인침은 진짜와 가짜를 가르고 참됨을 보증하며 위조·침범에서 보호한다(고후 1:22). 성례는 말씀의 신뢰성을 마음에 새기려 덧붙이신 인침이다. 요소와 의식 행위 모두 지시하고 인치는 힘을 가진다.
  • 성례의 내적 요소: 은혜언약, 믿음의 의, 죄 사함, 믿음과 회개, 그리스도와의 교통. 한마디로 그리스도 자신이 성례의 내용이다.
  • 후대 루터파와 현대신학: 말씀은 의식을, 성례는 정신물리적 본성을 바꾼다 → 바빙크: 로마의 가르침을 들여온 비성경적 견해.
  • 근거: 믿는 자는 이미 의롭게 되었고(롬 5:1) 그 몸과 피와 교제한다(요 6:47–51). 말씀에서 유보되고 성례로만 주어지는 유익은 하나도 없다. 둘을 다르게 규정하면 그리스도와 유익이 분리되고, 성례가 구원에 필수가 되어 사람이 사제에게 의존하게 된다.

9. 기호와 기의의 관계 원서 1106–1107쪽

차이는 은혜의 여부가 아니라 은혜를 주시는 방식이다. 기호와 기의는 물리적 연합이 아니라 윤리적 관계다.

  • 기호(signa)와 기의(res)의 관계는 물리적·공간적·실체적 연합이 아니다. 단어와 뜻, 초상과 인물, 약속과 내용처럼 그리스도와 복음 사이의 관계 같은 윤리적 관계다.
  • 그러나 자의적이지 않다. 자연과 은혜를 다스리는 분이 한 하나님이시므로 둘 사이에 놀라운 대응이 있다. “자연계는 영적 세계의 형상이다.”

로마·루터파

  • 제정의 말씀이 기호를 기의로 바꾸거나 통합 → 말씀이 요소를 향함.
  • 성례의 은혜가 성직자에게 의존.
  • 로마: 가시적 표지가 비가시적 은혜를 흡수해 사효적으로 작용.

개혁파

  • 말씀은 마술적 힘 없이 요소를 일상 용례에서 구별할 뿐 → 말씀이 청중을 향함. “요소에 말씀을 더하면 성례가 된다”(아우구스티누스).
  • 하나님만이 분여자.
  • 은혜는 영적이므로 믿음이 있는 곳에서만 주어진다.

관계는 물리적 연합이 아니어도 객관적·실재적·본질적일 수 있다. 하나는 듣고 하나는 보지만 둘 다 믿음이라는 영적 방식으로 온전한 그리스도를 준다. 다만 하나님이 말씀과 성례를 쓰시는 방식은 여전히 신비로 남는다.

10. 성례의 실재와 가치 원서 1108–1110쪽

성례는 믿음을 낳지 않고 믿음을 강화한다. “한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만드는 것은 성례의 결여가 아니라 성례에 대한 모독이다.”

  • 로마의 ‘주입되는 성화의 은혜’와 ‘지울 수 없는 표’를 루터파·개혁파 모두 거부한다. 성례는 신자를 위한 것이므로 늘 믿음을 전제한다(막 16:16).
  • 루터파가 말씀과 성례 자체에 효력이 들어 있다고 본 것은 겉보기 장점일 뿐이다. 로마도 루터파도 성인에게는 믿음을 요구하므로 무조건 사효적이지 않다. 은혜가 언제 주어지는지의 난제는 세 전통이 함께 안고 있다.
  • 개혁파: 그리스도는 모든 참여자에게 제공되지만 참된 능력은 성령의 내적 역사가 있어야 누린다. 표지는 택자에게만 참으로 유익하다.
  • 고마루스 등의 내적·외적 언약 구분은 별로 돕지 않는다. 가시적·비가시적 교회가 두 교회가 아니듯 언약도 둘이 아니다. 성례는 일반적 진리가 아니라 ‘나는 너와 네 자손의 하나님’이라는 약속을 인친다.
  • 성례는 구원에 절대 필요하지 않다(요 3:16). 그러나 우리는 몸을 가진 감각적 피조물이어서 보이는 형태로 영적 세계를 이해한다. 결혼반지가 사랑을 만들지 않고 키우듯 성례는 믿음을 강화하고, 언약을 새롭게 하며, 신자들을 묶고 세상과 구별한다.

11. 성례의 수효 원서 1110쪽

중요한 것은 수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정과 그 안에서 나누시는 은혜의 충만함이다.

구분성례로 꼽힌 것
행위언약 (개혁파, 넓은 의미)안식일, 낙원,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생명나무
구약 은혜언약 (넓은 의미)할례, 유월절, 가죽옷, 무지개, 만나, 반석의 물, 놋뱀 등
신약 (엄밀한 정의)세례와 성찬
로마 가톨릭세례·성찬 + 다섯 성사 = 일곱 (개신교: 추가된 다섯은 성경적 근거가 빈약)

로마에서는 은혜의 상태를 확신하지 못하는 일이 흔하다. 일곱이어도 확신을 주지 못하면 소용없다. 개신교인은 두 성례로 그리스도 전부를 그의 의와 거룩과 함께 소유한다.

12. 세례 원서 1111–1114쪽

세례는 할례에 뿌리를 둔 언약의 인침이며, 본질적으로 회개와 믿음의 세례다. 바울에게 물세례는 곧 새 생명의 성령세례다.

  • 할례: 다른 민족에게는 종교·위생 관습이었으나 이스라엘에서는 은혜언약 안의 죄 사함과 성화의 표지·인침. 언약의 약속은 “내가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 17:7). 팔 일에 받았고 받지 않으면 끊어졌다.
  • 할례는 믿음으로 얻는 의(롬 4:11)와 마음의 할례(신 30:6; 롬 2:28–29)를 인친다. 마음의 할례 없는 외적 할례는 무가치하므로 할례는 믿음을 전제한다.
  • 물의 종교적 상징은 널리 있었으나 하나님이 제정하신 세례만이 성례다. 요한의 세례는 하늘로부터 왔고(마 21:25), 제자들의 세례와 같은 죄 사함의 세례다(행 2:38).
반론 본문바빙크의 답
마 3:11; 행 1:5 (물세례 대 성령세례)대비되는 것은 기독교 세례가 아니라 비유적인 오순절 성령 ‘세례’
행 19 (에베소 제자들의 재세례)그들의 세례가 참된 요한의 세례가 아니었기 때문
마 28:19새 세례를 만드신 것이 아니라 대상을 열방으로 넓히심
  • 오순절 이후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관련되지만 분리될 수 있다(행 2:33; 9:17; 10:44). 방언·예언은 세례가 아니라 안수로 주어졌고(행 8:15–17; 19:6) 일시적이었다.
  • 세례는 죄로부터의 구원으로 그려진다(롬 6:3–6; 골 2:12). 세례받은 자는 씻기고 성화되고 의로워진 사람이다(고전 6:11).

13. 고대 교회 세례의 변질 원서 1115쪽

신비화와 의식의 치장이 세례를 마술로 바꾸었다. “더 이상 단순성이 표어가 아니었다.”

  1. 디다케삼위일체 세례 문구는 이미 있었으나 보편화된 세례 의식은 없었다
  2. 2세기 이후예배가 공적·사적 부분으로 나뉘며 세례·성찬이 신비화, 많은 의식으로 치장
  3. 신비종교의 이름조명·신비·완성·입문. ‘하늘로 가는 수레’, ‘천국의 열쇠’
  4. 아우구스티누스·스콜라유아에게 사효적 작용, 받는 자의 믿음·회개 경시 → 세례는 교회의 입구이자 구원에 필수

14. 종교개혁과 세례 논쟁 원서 1116쪽

“사람은 믿음과 회개 때문이 아니라 오직 언약 때문에 세례받을 자격을 얻는다.”

  • 개혁자들의 비판은 세례보다 성찬에 집중되었다. 루터파는 세례명·십자가 성호·축귀·후견인·흰옷 등 의식을 유지했다. 루터: 물은 불에 달군 강철처럼 하나님의 위엄과 현존으로 가득하다. 개혁파는 의식을 버리고 성경의 단순함으로 돌아갔다.
  • 개혁파의 원리(세례는 믿음을 낳지 않고 강화한다)에서 유아세례의 두 난제가 생겼다: ① 신자의 자녀가 세례 전에도 신자로 간주되어야 함을 논증하기 ② 실제적 믿음이 없는 아이에게 세례의 은혜로운 작용이 무엇인가.
  • 답: 신자의 자녀는 진노나 사탄의 권세 아래 있지 않으며 세례 이전에도 언약의 자녀다. 그러므로 세례는 구원의 절대 조건이 아니고 평신도의 응급 세례도 필요 없다.
  • 이후: 교회가 타락하며 세례가 중생과 분리되어 가치를 잃었고, 항변파·합리론자·퀘이커·현대 개신교는 성례를 인간의 고백 행위로 보았다. 19세기 회복 시도: 슐라이어마허(교회의 입회 행위), 중생의 능력을 주는 수단이라는 견해, 카이퍼(그리스도의 온전한 몸과 하나되려는 성향을 믿음에 심는 특별은총).

15. 세례의 양식과 방법; 유아세례 원서 1118–1119쪽

세례는 말씀으로 이미 받은 유익만을 인치며, 그 방식 자체는 본질이 아니다.

  • 성경은 유아세례를 직접 언급하지 않고 세례는 늘 성인세례를 전제한다. 복음의 제시와 수용이 세례에 앞섰다(렘 31:31–34; 겔 36:25–28). 성인의 신앙고백 필요성에는 이견이 없다.
  • 갈림길: 로마는 성화의 초자연적 은혜가 세례로만 주어지고 믿음 없이도 유익하다고 본다. 종교개혁은 성례가 신자가 말씀으로 이미 가진 유익만 나눈다고 본다.
바빙크의 경고말씀을 통해 믿음으로 얻을 수 없는 은혜의 전달을 세례에 돌리는 사람은 로마의 성사 교리로 가는 문을 여는 것이다.
  • 형태: 물이 몸의 먼지를 씻듯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씻음을 보이려 의도적으로 택한 표지다(출 30:18–20).
  • 초기 교회는 ‘밥티제인’(βαπτιζειν)이 보여 주듯 침례였다. 물뿌림이 보편화된 것은 13세기 이후다. 침례가 의미를 더 분명히 하지만 방식 자체는 본질이 아니다.

16. 세례 문구와 세례의 유익 원서 1120–1121쪽

말씀이 주지 않는 것은 세례도 주지 않는다.

  • ‘그리스도의 이름으로’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는 낭독할 문구를 정한 것이 아니라 세례의 본질을 설명한다. 할례·유월절·요한의 세례·성찬에도 정해진 문구가 없었다. 삼위일체 문구는 이단에 맞서고 예전을 지키려고 점차 필수가 되었다.
  • 문구가 물을 그리스도의 피로 바꾸지 않는다. 로마는 성령의 역사를 물 안에 공간적으로 가두었고 루터파도 어느 정도 이었다. 개혁파: 성령이 말씀 안에 갇히지 않듯 물에도 갇히지 않는다. 바울도 말씀의 역사와 물의 역사를 구분한다(엡 5:26).
  • 거룩하게 하시는 이는 목회자도 물도 아닌 그리스도시다. 물이 중생을 일으킨다면 바울이 세례보다 복음 선포를 위해 보냄받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고전 1:14).
  • 그러나 빈 의식은 아니다. 성인 신자가 받는 유익: 칭의와 죄 사함, 중생과 옛 사람의 죽음, 죽음과 부활에 참여하는 새 생명(롬 6:2–10), 그리스도 및 교회와의 교제.
세례 안에서 삼위 하나님이 증거하시는 것
성부언약과 입양(창 17:7)
성자피로 씻으심, 죽음·부활 참여
성령내주와 성화(딛 3:5)

17. 유아세례 논쟁의 역사 원서 1122–1124쪽

유아세례의 근거는 다른 사람의 믿음이나 사효론이 아니라 오직 은혜언약이다.

  • 거부의 두 이유: 성경에 명시되지 않는다, 유아에게 없거나 확인할 수 없는 믿음과 회개를 전제한다.
  1. 1–2세기성인세례가 일상. 테르툴리아누스 이전엔 유아세례의 직접 증거 없음. 그러나 이 침묵에서 과도한 결론을 끌어내면 안 된다.
  2. 테르툴리아누스반대했으나 혁신이어서가 아니라 세례의 무게 때문에 미루는 편이 낫다는 이유였다.
  3. 오리게네스·키프리아누스유아세례는 일반적이며 사도적 기원을 가진다. 출생 2–3일 안에 베풀자.
  4. 아우구스티누스펠라기우스파에 맞서 원죄 제거에 필요하다고 옹호. 부모와 보편 교회의 믿음에 호소 → 다른 사람의 믿음(fides aliena)은 결국 세례 중생론으로.
  5. 트리엔트 · 루터파트리엔트: 유아는 사효적으로 은혜를 받는다. 루터파: 유아는 실제 행위의 믿음까지 받는다(성공회 고교회파도 비슷).
  • 비판: 세례가 스스로 작용하면 다른 사람의 믿음은 불필요해진다. 세례가 말씀과 믿음에서 떨어져 독립적 방편이 되면 성경적 성격을 잃는다.
  • 이런 견해는 유익을 과장하면서 동시에 약화한다. 세례받은 모든 자녀가 구원받는 것은 아니므로 유익이 아이가 스스로 믿을 나이까지만 유효한 모호한 지위가 된다.
“성인과 유아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세례의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중생이나 믿음 또는 회개가 아니며, 하물며 그것들에 대한 우리의 추측들은 더더욱 아니고, 오직 은혜언약뿐이다.” — 바빙크

18.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 원서 1125–1128쪽

신자의 자녀는 자연적으로가 아니라 언약으로 인해 거룩하므로 세례의 권리를 가진다.

  • 관건은 성경이 신자의 자녀를 어떻게 보고 대하느냐다. 성인 신자와 같은 방식으로 말한다면 유아세례의 권리와 의무가 세워진다.
  • 재세례파: 유아는 믿음과 회개를 경험할 수 없다 → 개혁파: 믿음의 행위는 없어도 믿음의 성향(habitus)은 있을 수 있다. 내적 상태의 절대적 확실성은 성인에게도 없다. 절대 확신을 요구하면 어떤 성례도 시행할 수 없다.
유아세례의 성경적 근거
할례의 대체세례가 할례를 대체했다(골 2:11–12). 더 풍성한 은혜를 담은 세례는 유아에게 더욱 합당하다
언약의 유기적 성격언약은 개인과 그 후손에게 함께 맺어진다. 죄의 연대처럼 은혜의 연대도 있다(창 17:7)
예수의 아이 영접아이들을 언약의 자녀로 대하고 축복하셨다(막 10:13)
가정 세례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했고 온 집안이 세례를 받았다(고전 1:16)
고전 7:14한쪽 부모만 신자여도 자녀는 거룩하다
은혜의 풍성은혜는 죄보다 풍성하여 나이·분별력 같은 경계를 모른다(롬 5:12–21)
  • 은혜가 자동으로 유전되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계보를 따라 이어질 뿐이다. 신자의 자녀는 축귀가 필요한 마귀의 자녀(로마·루터파)가 아니다.
  • 재세례파는 자연의 경계로 은혜를 제한하므로 기독교의 보편성을 인정하지 않는 셈이다.
  • 단서: 세례는 한 사람의 구원을 입증하지 못한다. 근거는 중생의 가정도 중생 자체도 아닌 하나님의 언약이며, 열매는 결국 택자만 누린다.
  • 빛과 눈이 서로를 전제하듯 믿음이 강할수록 성례를 더 누린다. 성숙해 가는 신자에게 성례의 가치는 계속 커진다.
“신자의 자녀에게 구원을 위한 가장 중요한 기회는 그들이 믿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는 바로 그 사실이다.”

19. 세례의 집례와 보편성 원서 1129–1131쪽

유죄는 세례의 결핍이 아니라 세례의 경멸이다. 세례는 직분자가 회중 앞에서 시행하며 교회의 보편성을 지킨다.

  • 참 시행자는 그리스도시나, 세움 입은 사람들을 쓰셔서 성례가 말씀 선포에 종속됨을 보이신다. 신약에서 세례는 직분자(요한·제자들·사도들·빌립·아나니아·바울)에게 제한되었고, 권한은 목회자와 말씀을 가르치는 장로에게 전수되었다.
  • 그러므로 응급 상황이라도 목회자 아닌 사람의 세례는 허용할 이유가 없다. 개혁파는 회중 가운데 공개 시행을 선호한다. 가정 세례는 극히 예외로, 당회 결정과 참관 아래.
  • 시기: 정교회·로마·루터파·개혁파 모두 출생 후 속히. 대부모는 비본질. 개혁파는 일차 책임자를 부모로 보고, 칼뱅의 제안으로 대부모의 양육 의무를 교리문답 교육으로 바꾸어 목회자에게 맡겼다.
  • 보편성: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시행된 이단의 세례도 인정(단, 교회가 공적으로 인정한 목회자의 집례). 입양아, 부적절한 결혼의 자녀, 파문자·분파주의자·이단의 자녀도 언약의 계보가 완전히 끊기지 않았다면 세례를 금하지 않았다.

20. 성찬 원서 1132쪽

성찬 논의를 여는 표제로, ‘함께 나누는 제사음식’이라는 소제목이 붙어 있다. 본문은 다음 절부터 시작된다.

세례

  • 은혜언약에 들어가는 입문(합일)의 성례
  • 한 번 받음
  • 할례에 뿌리
  • 수동적: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살아남

성찬

  • 언약 안에서 자라는 성숙의 성례
  • 반복해서 나눔
  • 구약의 제사 식사(유월절)에 뿌리
  • 능동적: 먹고 마시며 자라 감

21. 유월절과 성찬의 제정 원서 1132–1138쪽

성찬은 제사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자신을 주시는 식사다. “그리스도는 자기 백성들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친히 자기 자신을 주신다.”

  • 이스라엘에서 식사는 종종 희생제사와 묶였다. 제사음식을 먹는 것은 그 신과 언약관계에 들어가는 일이다. 그래서 이방 제사음식이 금지되었다(민 25:3).
  • 유월절은 속죄제사이자 하나님·이웃과의 친교 식사, 곧 희생제사이자 성례였다. 신약은 이를 모형으로 본다. 그리스도는 참 유월절 어린 양이시다(고전 5:7).
  • 할례가 세례로 바뀌었듯 유월절은 성찬으로 대체되었다. 결정적 차이: 유월절은 일차적으로 제사였으나 성찬은 제사적 성격을 완전히 잃었다. 단번의 희생으로 이미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미사를 제사로 보는 로마와 갈라지는 핵심이다.
  • 예수가 성찬을 친히 제정하셨음을 의심하면 자기 죽음의 구원적 의미에 대한 예수의 자의식까지 의심하게 된다. 떡과 포도주는 몸과 피, 새 언약의 피(출 24:8)의 표지다. 네 기사의 문구가 다른 것은 고정된 주문이 없었음을 보여 준다.
  • ‘나를 기념하라’는 단순 추모가 아니라 재림 때까지 그의 죽음을 선포하는 교제의 식사다(고전 11:26).

22. 초대교회에서 화체설까지 원서 1138–1141쪽

감사의 식사가 사제의 희생제사로 변하면서 화체설과 미사가 생겨났다.

  1. 처음주일 저녁 애찬과 함께 기념. 곧 예배가 말씀 부분(모두에게)과 성찬 부분(세례 받은 자만)으로 나뉘어 신비의 색채.
  2. 헌물신약은 몸의 성화(롬 12:1)·기도·선행과 구제(히 13:15–16)를 제사라 부르지만 성찬은 그렇게 부르지 않았다. 성찬이 제사로 불린 것은 부유한 교인이 가져온 헌물 때문. 『디다케』는 말 1:11을 따라 ‘깨끗한 제물’이라 불렀다. 처음엔 감사제물이지 속죄제물이 아니었다.
  3. 애찬과 분리헌물 대신 주교가 성별하는 요소 자체가 제사의 내용이 됨. 제사 관념과 표지·실체 연합 관념이 서로를 강화 → 동방의 상징적 견해가 실재적 변형론에 밀림.
  4. 아우구스티누스떡과 포도주는 몸과 피의 표지. 승천하신 그리스도는 육체로 함께 계시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몸을 진실로 먹는 것은 그를 믿는 것이다.” 그의 영향이 오래 실재론을 억제했다.
  5.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화체(μετουσιωσις) 공식화 → 성체거양·성체경배·성체안치.

로마: 사제의 성별로 실체는 변하고 모양·맛·냄새 같은 부수적 성질만 남는다. 성체성사는 참여자를 향한 말이 아니라 요소를 바꾸는 사제의 행위이므로 성사이기 전에 제사다. 미사는 십자가의 희생과 동일한 제사이되 피 없이 날마다 반복된다.

23. 루터·츠빙글리·칼뱅의 성찬론 원서 1142–1145쪽

쟁점은 현존의 사실이 아니라 그 방식이다.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 전인격과 교제한다는 칼뱅의 견해가 개혁파의 공통 자산이 되었다.

  • 종교개혁은 한목소리로 화체설과 미사를 거부했지만 성찬 이해에서는 갈렸다. 마르부르크 회의와 부처·멜란히톤의 중재에도 ‘참된 현존’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 칼뱅은 츠빙글리와 함께 물리적·지역적 현존을 거부한다(몸의 본질, 참된 인성, 승천, 교제의 본질과 맞지 않음). 그러나 츠빙글리가 성찬을 일방적 고백 행위로 만든다고 비판하며 루터 편에 선다. 그리스도가 몸과 피를 포함한 전인격으로 실제로 임재하여 주어진다.
  • 먹는 것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결과다(엡 3:17: 내주는 믿음을 통하되 믿음은 아님). 말씀에서 이미 이루어진 신비적 연합이 성찬에서 더 뚜렷이 주어지고 인쳐진다.
  • 이 연합은 그리스도를 땅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이 하늘로 들려 성령 안에서 하나 되는 것이다. 바빙크는 칼뱅의 설명이 불분명한 점(살과 피에서 흘러나오는 생명)을 인정한다.
  • 이후 츠빙글리적 견해 확산, 징계 이완 → 성찬의 형식화. 소키누스주의·항변파·메노파의 합리주의로, 반대로 옥스퍼드 운동처럼 로마로의 회귀로 이어졌다.

24. 성찬의 목적 원서 1145–1148쪽

“그리고 그것은 식사다!” 성찬은 제단의 제사가 아니라 공예배 식탁에서 나누는 주님의 식사다.

  • 성경의 이름: ‘주의 만찬’(고전 11:20), ‘주의 식탁’(고전 10:21), ‘떡을 뗌’(행 2:42). 루터는 ‘제단의 성사’를 유지했지만 개신교는 ‘주의 만찬’을 택해 식사라는 원리를 지켰다.
  • 우리가 차린 잔치가 아니라 주님의 잔치다. 예수는 중보자로서 제정하셨다: 죽음을 선포하시니 예언자, 자신을 내어 주시니 제사장, 표지 아래 누리게 하시니 왕. 그분이 떡과 잔을 나누시는 주최자이고, 목사는 비밀을 맡은 청지기다(고전 4:1).
  • 떡과 포도주는 일상 식탁의 양식이자 마음을 든든하고 기쁘게 하는 것(시 104:15)으로 교제를 생생히 그린다. 밀·보리, 붉은·흰 포도주, 누룩 유무의 다툼은 쓸모없다. 다만 금욕을 명분으로 포도주를 물로 바꾸는 것은 “그리스도보다 더 현명해지려는” 시도다.
  • 개혁파는 특별한 경우 가정 성찬을 인정하되 원칙적으로 공예배에 속한다고 보았다. 칼뱅은 적어도 매달 시행을 원했다.
  • 제단 대 식탁: 성찬이 제사로 변질되자 목사는 제사장, 식탁은 제단이 되었다(로마·정교회). 루터파는 제단을 비본질로 남겼고, 개혁파는 식탁을 되찾았다. 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제단은 십자가이며 신자는 찬미의 제사만 드린다(히 13:10, 15).

25. 성찬의 영적 유익 원서 1149–1151쪽

“성찬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이지, 우리의 기념과 고백이 아니다.”

  • 기의는 우리 죄를 위해 찢기고 흘려진 그리스도의 몸과 피, 곧 그리스도와 그 모든 유익이다. 단순 기념·고백으로 보는 합리적·도덕적 견해는 이 깊이를 놓친다.
  • 성찬은 말씀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게 같은 그리스도를 준다. 교제의 실재성에서는 로마·루터파·개혁파가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영성체 없는 미사나 잔을 보류하는 관행은 교제의 식사라는 의미를 흐린다.
  • 성례의 진리는 믿음에 달려 있지 않지만, 유익을 받으려면 믿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연합을 이루고 지키는 것은 엄밀히 성령의 역사다.
  1. 그리스도와의 교제 강화연합이 몸과 영혼에 더 친밀하게 확증된다
  2. 죄 사함몸은 주어지고 피는 흘려졌다. 속죄하는 것은 피다
  3. 영생과 부활 소망믿음으로 얻는다. 내주하시는 성령이 보증(롬 8:11). ‘불멸성의 치료제’
  4. 고백과 신자 간 교제많은 알곡이 한 덩이, 많은 포도가 한 잔이 되듯

26. 성찬 참여 자격과 신앙고백 원서 1152–1155쪽

성찬은 자기를 살필 수 있는 신자들을 위한 성숙의 성례이며, 신앙고백이 그 문이다. “교회는 사람의 마음을 판단하지 않으며, 판단할 수도 없다.”

  • 세례처럼 성찬도 오직 신자를 위해 제정되었다. 예수는 제자들과만 나누셨고, 비신자는 말씀 모임에는 오지만 성찬에서는 제외되었다(고전 14:22–24; 11:18).
  • 변질: 죽은 친지를 위한 제물의 관습 + 그레고리우스 1세의 연옥 교리 확정 → 미사가 산 자와 망자의 형벌을 덜어 준다는 교리. 회중의 참여는 줄었다.
  • 개혁파의 답: 말과 행실로 불신과 불경건을 드러낸 자는 금한다. 이는 망자를 위한 미사의 종언이었고 어린이에게 사적으로 베푸는 일도 제한했다.
  • 자기 성찰의 요구(고전 11:26–29)가 어린이를 자연히 배제한다. 그러나 언약의 유익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에 맞지 않는 표시 방식만 잠시 미루는 것이다. 성찬은 말씀과 세례로 받은 유익 외에 새것을 주지 않는다.
  1. 언약의 자녀로 출생신자로 세례받음
  2. 진리로 양육교리교육
  3. 공개적 신앙고백당회나 회중 앞 (견진성사 대체)
  4. 성찬 허입훈계를 거부하면 출교

경건주의와 합리주의는 성례를 경시한 채 개인 회심이나 교회적 확인만 강조해 하나님이 합치신 것을 나눈다. 교회는 불신을 드러낸 자에게 성찬을 금하는 동시에, 죄를 슬퍼하며 용서를 신뢰하고 더 나은 삶을 바라는 이를 위해 성찬이 있다고 늘 설교한다.

구조도

은혜의 방편 신비주의와 로마 사이의 중도 말씀 (으뜸 방편) 율법과 복음 · 성령은 말씀과 더불어 성례 (보이는 말씀) 언약의 표지와 인침 · 내용은 그리스도 세례 할례를 잇는 입문 성찬 유월절을 잇는 성숙 종속 말씀에서 유보되고 성례로만 주어지는 유익은 없다
말씀이 으뜸이고 성례는 그 말씀을 보이게 인치는 언약의 표지다

교파별 성례관 비교

주제로마 가톨릭루터(파)츠빙글리칼뱅·개혁파
성례의 일차 성격사제가 집행하는 은혜 주입의 도구은혜의 매개체·기관 (객관성)믿음의 상징, 신앙고백 행위하나님 약속의 표지와 인침 + 부차적으로 신자의 고백
은혜 전달사효적(ex opere operato), 장애물만 없으면요소 안·함께·아래의 ‘하늘의 실체’믿음이 고대하는 유익을 상기시킴성령이 믿음 있는 곳에서만, 영적·윤리적 관계
말씀과의 관계말씀은 예비적, 성례가 우위후대 루터파: 말씀과 다른 은혜를 줌—성례는 말씀에 종속된 가시적 말씀, 내용 동일
성령과 말씀—말씀을 통해(per verbum)—말씀과 더불어(cum verbo)
수효일곱 (피렌체 1439, 트리엔트)둘둘둘 (그리스도 전부를 소유)
세례교회의 입구, 구원에 필수. 유아는 사효적으로 은혜물은 달군 강철처럼 하나님 현존으로 가득. 유아는 실제적 믿음을 받음. 많은 의식 유지—근거는 오직 은혜언약. 응급 세례 불필요. 성경의 단순함
성찬의 그리스도 현존화체: 실체 변화, 부수 성질만 남음요소 안·함께·아래 실재적·본질적 현존 (편재성)‘이다’ = ‘가리킨다’, 죽음을 생각나게 하는 표지 (영적 임재는 부정 안 함)물리적 현존 거부, 성령 안에서 전인격적 실제 임재. 마음이 하늘로 들림
성찬의 자리제단, 미사 = 피 없는 제사제단을 비본질로 유지, ‘제단의 성사’—식탁, ‘주의 만찬’. 유일한 제단은 십자가

원고에 언급이 없는 칸은 ‘—’로 두었다.

다른 입장과 바빙크

입장주장바빙크의 답
신비주의·재세례파은혜는 외적 표지에 매이지 않고 내적 말씀과 빛으로만 온다하나님은 몸과 영을 함께 지으셨고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므로 내외를 가르는 이원론은 거부된다
로마 가톨릭사제의 성사가 사효적으로 은혜를 주입하며 구원에 필수성례는 말씀을 전제하고 믿음이 있는 곳에서만 유익하며 구원은 오직 믿음에 매인다
루터파하늘의 실체가 요소 안·함께·아래 있어 말씀과 다른 은혜를 준다말씀과 성례의 내용은 동일한 그리스도. 성례만의 고유한 은혜는 없다
루터파 (율법관)율법은 죄 때문에만 필요하다율법은 하나님 존재의 표현으로 영속적이다
츠빙글리·항변파성례는 믿음의 상징이자 신앙고백 행위일 뿐고백은 부차적, 일차적으로 하나님이 약속을 인치시는 행위
침례교·재세례파성경은 유아세례를 말하지 않으니 신앙고백자만 세례받아야 한다세례 자격은 믿음이 아니라 언약. 신자의 자녀는 세례 전에도 언약의 자녀

오해와 바른 이해

오해

  • 의식만 제대로 하면 은혜가 자동으로 주어진다. 성례 없이는 구원도 없다.
  • 내 안의 빛이면 충분하니 외적 말씀은 필요 없다.
  • 복음을 믿으면 율법은 더 이상 상관없다. 복음은 조건이 없으니 믿음과 회개를 요구하면 안 된다.
  • 성례는 말씀이 주지 못하는 특별한 은혜를 준다.
  • 제정의 말씀이 물·떡·포도주를 변화시킨다.
  • 침례여야 참된 세례다. 성경에 없고 유아는 못 믿으니 유아세례는 틀렸다.

바른 이해

  • 성례는 믿음을 전제하고, 은혜는 믿음이 있는 곳에서만 온다. 정죄하는 것은 성례의 결여가 아니라 모독이다.
  • 성령은 늘 말씀과 더불어 일하시며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다.
  • 율법은 영속적이며 감사의 삶의 규칙으로 늘 선포된다. 복음은 율법을 전제하므로 믿음과 회개는 복음의 요소로 요구된다.
  • 성례는 말씀과 동일한 그리스도를 보는 방식으로 줄 뿐이다.
  • 말씀은 요소를 일상 용례에서 구별할 뿐 마술적 힘이 없다.
  • 침례가 의미를 더 밝히지만 방식은 본질이 아니다. 세례의 근거는 신자와 자손을 품는 은혜언약이다.

핵심 용어

은혜의 방편
그리스도가 은혜를 전달하도록 지정하신 외적 행위와 표지. 엄밀히는 말씀과 성례.
사효적 (ex opere operato)
수혜자의 믿음과 무관하게 의식 자체의 효력으로 은혜가 온다는 로마의 견해.
말씀과 더불어 (cum verbo)
성령이 말씀 안에 갇히지 않고 말씀과 함께 역사하신다는 개혁파의 표현. 루터파는 per verbum.
율법과 복음
자기 의를 요구하고 정죄하는 말씀과, 그리스도의 의를 선물로 약속하는 말씀.
표지와 인침
보이지 않는 은혜를 가리키고(표지) 약속의 참됨을 보증하는(인침) 것.
기호 (signa)와 기의 (res)
성례의 가시적 요소와 그것이 가리키는 영적 실체. 윤리적 관계로 묶인다.
제정의 말씀
물을 성례로 만드는 말씀. 물을 마술적으로 바꾸지 않는다.
지울 수 없는 특성 (character indelebilis)
세례·견진·신품이 영혼에 새긴다는 로마의 개념.
다른 사람의 믿음 (fides aliena)
유아세례를 부모·교회의 믿음으로 정당화한 견해. 세례 중생론으로 이어진다.
믿음의 성향 (habitus)
믿음의 행위는 없어도 유아가 가질 수 있는 믿음의 기질.
화체설 (μετουσιωσις)
사제의 성별로 떡과 포도주의 실체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로마 교리.
공재설
떡과 몸이 함께 있다는 설(요소 안·함께·아래).
성숙의 성례
합일(입문)의 성례인 세례와 달리 능동적으로 먹고 마시며 교제가 자라는 성찬.

성경 근거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고린도전서 7:14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고린도전서 11:26
구절이 장에서의 쓰임
사 55:11하나님 말씀은 소리가 아니라 뜻을 이루는 능력
롬 3:31믿음은 율법을 폐하지 않고 굳게 세운다
롬 1:16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행 16:14마음을 여는 일은 성령의 사역
롬 4:11할례(성례)는 믿음으로 얻는 의의 인침
창 17:7‘너와 네 자손의 하나님’, 언약은 자녀를 품는다
골 2:11–12세례가 할례를 대체함
고전 7:14한쪽 부모만 믿어도 자녀는 거룩하다
고전 5:7그리스도는 참 유월절 어린 양
고전 10:16떡과 잔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
고전 11:26–29재림까지 죽음을 선포함, 자기를 살피고 먹으라
히 13:10, 15그리스도인의 유일한 제단은 십자가, 찬미의 제사

복습 문제

은혜의 방편에 대한 신비주의·로마·종교개혁의 입장을 비교하라.
신비주의는 은혜가 외적 표지에 묶일 수 없다며 내적 말씀과 빛에 의존한다(과소평가). 로마는 사제의 성사가 사효적으로 은혜를 주입한다고 본다(마술적 과대평가). 종교개혁은 그 중도로, 교회가 아니라 성경을 으뜸 방편으로 세우고 성례를 말씀에 종속시키며, 말씀과 성례를 하나님의 일반적 방편으로 긍정한다.
율법에 대한 루터파와 개혁파의 차이는? 믿음과 회개의 요구는 율법인가 복음인가?
루터파는 율법의 정죄 기능에 집중해 율법이 죄 때문에만 필요하다고 보고, 개혁파는 율법을 하나님 존재의 표현으로서 영속적인 것으로 보아 감사의 교리에서 중시한다. 엄밀히 복음에는 조건이 없지만 복음은 늘 율법을 전제하므로, 믿음과 회개는 율법의 이름으로 요구되면서도 그 내용은 복음에 속한다.
성례가 ‘가시적 말씀’이라는 말의 뜻은? 이를 부정하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가?
성례의 내용은 말씀과 같은 그리스도이며, 말씀에서 유보되고 성례로만 주어지는 유익은 없다. 성례는 말씀 위의 기둥이요 부록이다. 둘을 다르게 규정하면 그리스도와 유익이 분리되고 언약의 통일성이 깨지며, 성례가 구원에 필수가 되어 사람이 사제에게 의존하게 된다.
기호와 기의의 관계에 대해 개혁파와 로마·루터파는 어떻게 다른가?
로마·루터파는 제정의 말씀이 요소를 바꾸거나 기의와 통합한다고 보고(말씀이 요소를 향함) 은혜가 성직자에게 의존한다. 개혁파는 둘의 관계를 물리적 연합이 아닌 윤리적 관계로 보며, 말씀은 요소를 일상 용례에서 구별할 뿐이고(말씀이 청중을 향함) 하나님만이 분여자시며 은혜는 믿음이 있는 곳에서만 주어진다. 차이는 은혜의 여부가 아니라 방식이다.
개혁파가 유아세례의 근거로 삼는 것은 무엇이며, ‘다른 사람의 믿음’ 이론은 왜 부족한가?
오직 신자와 그 후손을 함께 포함하는 은혜언약이다(할례의 대체, 예수의 아이 영접, 가정 세례, 고전 7:14 등). 부모·교회의 믿음(fides aliena)은 유아 자신의 믿음 부족을 메울 수 없고 결국 세례 중생론으로 흐르며, 세례를 말씀과 믿음에서 떼어 독립적 방편으로 만든다.
성찬론에서 루터·츠빙글리·칼뱅은 어떻게 갈리며, 칼뱅과 루터의 차이는 무엇에 있는가?
루터는 그리스도의 몸이 요소 안·함께·아래 실재적으로 현존한다고 보았고, 츠빙글리는 ‘이다’를 ‘가리킨다’로 읽어 성찬을 기념과 고백으로 보았다. 칼뱅은 물리적·지역적 현존을 거부하면서도 그리스도가 전인격으로 실제 임재하여 주어진다고 보았다. 칼뱅과 루터의 차이는 현존의 사실이 아니라 방식, 곧 마음이 하늘로 들려 성령 안에서 연합한다는 데 있다.
한 줄“말씀과 성례는 성령과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 자신을 건네는 은혜의 통로다.”

책의 저작권은 저자와 출판사에 있습니다. 빛다방 학습·심화 노트를 바탕으로 한 개인 학습용 정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