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리탄
1부 교의신학 서론

1장 학문으로서의 교의신학

헤르만 바빙크 『개혁파 교의학』 (새물결플러스, 단권 축약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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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의신학은 어떤 학문이며 어디에 서야 하나?

  • 교의는 교회가 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셨기에(Deus dixit) 믿어야 할 진리다. 다만 교의는 늘 신적 권위와 교회 고백의 결합이다.
  • 신학을 감정·도덕·종교학으로 줄이면 ‘하나님이 참으로 계신가’라는 진리 물음을 피하게 된다. 기독교는 하나님 지식이 참이냐에 따라 서거나 넘어진다.
  • 재료는 성경·교회·그리스도인의 경험이지만, 교육적으로는 교회가 앞서도 논리적으로는 성경만이 유일한 외적 토대다. 신앙은 샘이 아니라 수로다.
  • 방법은 성경 전체에서 출발하는 종합적-발생적 방법이고, 구성은 하나님에서 시작해 그분의 사역을 거쳐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이다. 교의신학은 결국 송영이다.

1. 용어와 교의 원서 31–36쪽

(1) 용어: 로키에서 교의학까지 원서 31–32쪽

  • 요점: 교의의 근거는 하나님의 권위, 고백의 주체는 교회다.
  1. 로키 (loci)멜란히톤의 『보편논제』를 따라 신학 주제를 ‘장소들’이라 불렀다. 본래 수사학에서 논거를 찾는 자리(토포이).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찾아보는 자리다.
  2. 신학더 체계적인 서술이 요구되자 느슨한 ‘로키’ 대신 선호되었다.
  3. 교의학실천신학·도덕신학과 구별하려고 수식어가 붙다가 ‘교의학’이 정착했다. 연구 내용이 교회의 규범적 가르침(교의)으로 정착하게 한다.
  • 개신교 교의학은 출발부터 성경 진술의 정리라는 성격을 지녔다.
  • 교의 = 반드시 믿어야 할 것으로 성경에 제시된 진리.
  • 교회가 인정해서 교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권위에 기초하기 때문에 교의가 된다.
  • 그러나 교의는 언제나 신적 권위 + 교회적 고백의 결합이다. 교회의 가르침을 곧바로 신적 진리 자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둘을 함께 붙들되 뒤섞지 않는다.

(2) 도그마의 의미와 권위 원서 33–36쪽

  • 요점: 교의의 원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셨다”(Deus dixit)이며, 교회는 말씀을 섬기며 고백한다.
  • ‘도그마’는 그리스어 ‘도케인’(견해를 갖다)에서 왔지만 뜻은 확고히 결정되어 변치 않는 것이다. 교부들은 신앙의 진리를 교회의 교의라 불렀다.
도그마의 종류기대는 권위
정치적 도그마정부의 권위
철학적 도그마자명성이나 논증
종교적 도그마오직 신적 증언
종교적 권위의 자리무엇을 권위로 삼는가
이방인신탁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도직(교회의 공식 교육 권한)
개신교(개혁파)성경. 성경에 하나님의 권위로 주어진 진리 외에 다른 교의를 인정하지 않는다.

교의의 사회적 요소와 긴장

  • 하나님의 권위에 선 명제는 사람이 인정하든 말든 참이다. 그러나 진리는 참된 것으로 인정받도록 의도되어 있다.
  • 그래서 어떤 성경적 진리가 성령의 인도 아래 교회에서 보편적 승인을 얻었는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사적 견해를 하나님의 진리로 오인하는 위험을 막는다.
  • 교회는 교의를 보존·설명·변호할 책임을 진다. 그러나 교회의 권세는 주권적·법정적이지 않고 말씀에 봉사하는 권세다.
  • 교의신학자는 신앙고백의 인도를 받되, 그 역사적·특수한 한계에 매이지 않고 교의가 성경에서 왔는지 검토한다.

교의 ≠ 절대 진리

성령의 인도가 약속되었어도 인간의 오류 가능성은 남는다. 교회의 교의는 하나님의 절대 진리와 같지 않다.

그러나 하르낙도 틀렸다 비판

하르낙은 교의를 그리스 정신이 복음을 변질시킨 결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교의를 버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 같은 도덕적 확신이라는 새 교의로 바꿨을 뿐이다.

교의 없는 기독교는 착각신의 존재·계시·인식 가능성에 대한 믿음 없이는 종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교의를 거부하는 것도 또 하나의 교의다. 쟁점은 어떤 교의를 긍정하느냐다. 교의는 넓게는 기독교 전체, 좁게는 모두가 믿어야 할 신앙 조항이며, 교의신학은 그 조항들의 체계다.

2. 주관화된 신학과 진리 물음 원서 36–38쪽

(1) 주관적 신학과 종교학화 원서 36–37쪽

  • 요점: 신학을 종교 경험의 묘사로 바꾸면 진리 문제를 회피하는 종교학이 된다.
  • 아퀴나스: 교의신학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교의, 그리고 하나님을 원천과 목적으로 삼는 피조물에 대한 교의다. 실천적 관심을 가진 이들은 강조점을 구원이 필요한 사람으로 옮겼다.
인물신학을 무엇으로 바꾸었나
칸트지식의 대상을 감각 경험으로 제한하고 하나님을 알 가능성을 부인. 하나님의 존재와 영혼 불멸을 도덕적 진리(요청)로 세워 신앙을 구하려 했다. 교의는 도덕적 동기에 기초한 개인 확신으로 내려앉았다.
19세기 신학자들“하나님은 알 수 없고 믿을 수만 있다”는 전제를 공유.
슐라이어마허교리 = 그리스도인의 종교 감정을 말로 풀어낸 것. 교의신학 = 특정 시기 교회에 퍼진 교리의 정리.
리츨신앙 내용을 도덕·윤리 용어로 구성.
트뢸치역사·심리·비교종교 연구(종교학)를 신학의 목적으로 삼음.
  • 바빙크의 판정: 교의신학이 역사적 현상의 묘사에 그치면 신학이 아니라 종교학이다. 묘사는 무엇이 참인지 말하지 않는다.
  • 단서: 종교에 대한 역사·사회·심리 연구 자체는 타당하다. 문제는 “오직 그런 연구만 정당하다”는 주장이다.
  • 교회에서 고백하는 신앙을 대학에서 무시하는 이중장부(이중적 진리 개념)를 인간 정신은 견디지 못한다. 그런데 종교학이 ‘편견 없는 학문’을 자처하며 교의신학을 교단 신학교의 일로 격하시키고, 기독교 연구는 기술적 수준에 머문다.

(2) 진리를 추구하는 교의신학 원서 38쪽

  • 요점: 기독교는 하나님 지식의 진실성에 달렸으므로 교의신학은 무엇이 진리인지 보여야 한다.
  • 종교를 주관적 마음 상태로 보면 참·거짓의 문제가 감정과 기분의 문제로 축소된다.
  • 반대 극단도 경계: 메마른 지성주의를 반대한다며 감정으로 급선회하는 것도 잘못이다. 지성주의의 해독제는 감정주의가 아니라 참된 지식이다.
  1. 하나님은 알려질 수 있다
  2.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셨다
  3. 우리는 이 지식을 질서 있게 말할 수 있다

기독교 신학의 존재는 이 세 확신에 달려 있다. 그래서 교의신학은 하나님 지식의 학문적 체계이며, 오로지 그렇게만 존재한다. 엄밀히는 하나님이 자신과 모든 피조물에 대해 말씀 가운데 교회에 계시하신 지식이다.

(3) 신앙지식 논쟁과 계시 원서 38쪽

  • 요점: 신앙은 하나님 지식의 기능(faculty)이지 원천(source)이 아니다. 객관적 지식은 계시에서 온다.

‘신앙지식’론의 주장

  • 기독교 신앙은 머리 지식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맺는 인격적 관계다.
  • 지식이라 부른다면 전혀 다른 종류의 지식, 곧 ‘신앙지식’이다.

바빙크의 답

  • 가슴의 자리를 주지 않는 사변적·이성주의 신학을 반대하는 것은 옳다.
  • 그러나 지식을 감정·도덕적 행위로 바꿔치기하는 것은 범주 혼동이다.
  • 핵심 질문: 신앙의 대상이 실제로 존재하는가? 하나님은 객관적으로 계신가, 주관적 의식의 문제일 뿐인가?
  • 우리는 외적 지각이 아니라 신앙으로 하나님을 안다. 그래도 지성을 신앙지식에서 떼어 괄호에 묶을 수는 없다.
  • 하나님은 자연 현상처럼 경험적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래서 행위로만 아니라 말로도 자신을 계시하셔야 했다.
  • 교의신학을 ‘하나님 지식의 체계’라 부를 때 모든 자율적 사변이 차단된다. 신학의 하나님 지식은 하나님이 말씀 안에서 계시하신 것을 옮겨 적은 것일 수밖에 없다.

3. 계시를 재현하는 학문 원서 40–43쪽

(1) 하나님에 대한 학문으로서의 신학 원서 40쪽

  • 요점: 신학자는 신자로서 계시된 진리를 재현하며, 초연한 객관성은 신화다.
  • 계시가 참된 지식을 담고 있다면 학문적으로 사유되고 체계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러나 신학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시에 묶여 있다. 창작이 아니라 재현이 그의 일이다.
  • 계시는 구원 얻는 신앙으로만 받으므로, 신학자는 시작·진행·마무리까지 신자로서 일한다. 기독교 신학자는 기독교 신앙보다 높은 지식에 이를 수 없다.
  • 학문을 물리·화학·생물 같은 자연과학으로만 보는 것은 경험주의와 자연주의의 횡포다.
  • 가장 엄밀하다는 물리학도 주관성을 담는다. 선험적 종교적·철학적 헌신이 무엇을 ‘사실’로 받아들일지 좌우한다.
  • 단서: 회의주의는 맹신만큼 부적절하다. 그러나 학자와 사람은 분리될 수 없다. 전제를 가진 것은 신학자만이 아니라 모든 학자다.

(2) 체계와 신학자의 임무 원서 41–43쪽

  • 요점: 하나님 지식의 체계화는 정당하되, 신학자는 겸손한 종으로 일한다.
  • 체계 = 한 분야의 지식을 이해 가능하고 일관되며 질서 있는 전체로 묶는 일.

반대: 시인·문학비평가

성경은 조직신학 책이 아니라 이미지와 이야기로 쓰였다. 체계는 추상적이고 무미건조하다.

바빙크의 답

서투른 신학이 무미건조할 수 있음은 인정한다. 그러나 오용이나 남용이 모든 사용을 무효화하지는 않는다.

체계의 한계
  • 종교의 본질, 기독교의 본질, 중생의 사실, 경건의 경험 같은 선험적 원리에서 진리를 끌어내면 사변이다. 교의신학은 계시에서 자료를 모으는 실증적 학문이다.
  • 조화되지 않는 진리들 사이에서 하나를 희생해야 한다면 체계를 포기해야 한다. 진리가 체계보다 앞선다.
  • 그런 딜레마는 신학자가 유한하기 때문에 생긴다. 하나님 안에는 갈등이 없고 하나님의 생각들은 유기적 통일체다.
  • 신학자의 임무: 하나님의 생각을 하나님을 따라 생각하는 것. 이는 종의 임무이며 겸손을 요구한다. 그의 자신감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확신에서 나오고, 그의 자리는 신앙 공동체 안이다.
  • 신학의 최종 목적은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 신학은 주님을 위해 존재한다.

(3) 교의학과 윤리학 원서 43쪽

  • 신학의 진리는 두 방향으로 뻗는다. 반대자에 맞서 변호(변증학), 제자의 삶에 적용(윤리학).
  • 우리는 생명과 구원에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지만 언제나 책임 있는 행위자다. 그래서 윤리학은 교의학과 분리될 수 없다.

교의신학 하나님 지식의 체계

  •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우리 안에 행하신 일을 서술
  • 신조와 가깝다

신학적 윤리학 하나님 섬김의 체계

  • 그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행해야 할 일을 설명
  • 하나님의 교훈과 계명을 다룬다
순서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먼저, 우리가 행할 일은 그다음이다.

4. 성경과 교회 전통, 주관으로의 전환 원서 43–47쪽

(1) 교의학의 재료와 주교 권위 원서 43–44쪽

  • 요점: 성경은 처음부터 신앙의 척도(regula fidei)였으나 주교의 가르침이 점차 이를 가렸다.
  • 교의신학의 재료: 성경, 교회의 가르침, 그리스도인의 경험.
  1. 처음구약과 사도들의 글이 권위 있는 지식의 원천. 사도의 증언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판별하는 기준이 되어 정경을 형성했다.
  2. 사도 이후세례 의식, 신앙 진술, 목회 지침이 발전하며 속사도 문헌이 신앙 규범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3. 확장과 이단교회가 퍼지고 분파·이단에 맞서야 했다.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해 주교들이 사도적 가르침의 수호자가 되었다.
  4. 결과주교가 사도의 합법적 계승자로 “진리의 은혜”를 받았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주교의 가르침이 “진리의 규범”이 되고 성경의 권위는 희미해졌다.

(2) 성경과 교회 전통 원서 44쪽

  • 성경의 평가절하에 대한 저항은 중세에 시작되어 종교개혁에서 꽃피었다. 개신교는 교회를 다시 성경에 닻 내리게 하려 했다.
  • ‘스콜라’ 신학에 반대해 단순하고 성경적인 기독교를 호소하는 의도는 칭찬할 만하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성경신학’ 열정이 경건주의·이성주의 아래 신앙고백에 반대하는 구호로 변질되기도 했다.

오류 1 로마 가톨릭

전통을 성경보다 높이는 것.

오류 2 반전통주의

교회 전통을 폄하·무시하려고 성경을 끌어다 쓰는 것.

바른 자리 좋은 전통

좋은 교회 전통 = 교회의 성경 이해. 성경과 교회 가르침을 대립시키는 것은 마음과 생각, 감정과 지식을 쪼개는 것만큼 잘못이다.

교의신학의 유일한 목적은 성경에 담긴 하나님의 생각을 진술하는 것이다.

(3) 주관적 경험으로의 전환 원서 45쪽

  • 요점: 경건주의와 근대철학은 신학의 토대를 주관적 경험으로 옮기고 계시를 배제했다.
  • ‘성경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모두 사도적 전통에 충실한 것은 아니다. 경건주의는 교리의 진리를 도외시하고 주관적 경험으로 관심을 돌려, 근대철학의 주관적 전환에 길을 열었다.
인물신학의 기초를 어디에 두었나
칸트, 리츨도덕
슐라이어마허절대 의존 감정
헤겔세계정신의 전개
데카르트·칸트·헤겔(철학자), 슐라이어마허·리츨(신학자)에게 지식이 아니라 주관적 경험이 신학의 토대가 되었다.
  • 그 뒤 객관성을 지키려고 종교·종교사·심리학 연구가 강조되었다. 기독교도 다른 종교처럼 역사적·비평적 검토 대상이 되었고, 우월성의 근거는 실증적·역사적이어야 했다.
  • 신적 계시에 호소하는 것은 전혀 허용되지 않았다. 바빙크는 바로 여기서 계시에 묶인 교의신학으로 되돌아간다.

(4) 종교학적 방법의 한계 원서 46–47쪽

  • 요점: 경험적 종교 연구는 유익하나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에는 답할 수 없다.
  • 회심·기도·명상 같은 현상 연구에서 교의신학도 배울 점이 많다. 교리 문헌에 교회 고백과 시대 문화가 스며 있음도 부정할 수 없다.
  • 문제는 이를 과장해 신학을 종교사·종교심리학 같은 서술 작업으로만 축소하는 것이다.
왜 종교학만으로는 안 되는가
전제 없는 학문은 없다순수 객관성은 자연과학에서도 불가능하다. 영혼의 갈망을 다루는 종교 연구는 더욱 그렇다.
감수성 없는 연구자음을 구별 못 하는 음악평론가와 같다.
기준이 필요하다어떤 종교가 참되고 좋은지 기준을 세우려면 신적 계시가 필요하다. 누구도 완전히 중립적일 수 없다.
실재 물음은 남는다신 신앙의 보편성을 증명해도 “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이빨 요정 믿음과 다른가는 답하지 못한다.
결론하나님이 계시고 자신을 알리셨다는 확신을 다른 근원에서 먼저 가진 사람만이 종교철학에 이른다. 그래서 신학자는 신앙의 사람이어야 하고, 그 첫걸음은 계시를 인정하는 것이다. 다만 경험에 뿌리내린 신학이라는 목표 자체는 칭찬할 만하다.

5. 종교적 확실성과 계시의 자리 원서 48–53쪽

(1) 확실성의 문제: 교회와 성경 원서 48–50쪽

  • 요점: 종교적 확실성은 고유하며 신적 권위, 곧 계시에 기초한다.
  • 교의신학의 방법은 “종교가 자연과학과 다른 자기만의 확실성의 길을 가지는가”에 달려 있다.
확실성의 종류예
관찰직접 보고 만져서 얻는 확실성
직관직선이 최단 거리다, 외부 세계가 실재한다
증언믿을 만한 사람의 증언. 일상·역사 지식의 대부분
추론·증거논증으로 얻는 확실성. 그러나 연인은 약혼 전에 수학적 증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모든 학문에 똑같은 종류의 확실성을 요구할 수 없다.
  • 종교의 확실성은 감각이나 연역으로 축소될 수 없다. 참 하나님은 우리의 감각과 추론으로 담을 수 없는 분이다. 우리가 불러내고 통제할 수 있는 신은 하나님이 아니다.
  • 단순한 사람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 가까워지는 능력이 지적 추론 능력에 좌우될 수 없다.
  • 신앙이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권위에서 오는 말씀에 기초해야 한다. 신적 권위가 종교의 토대이자 신학의 원천이다.

객관적 측면

하나님은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특히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계시하셨다.

주관적 측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져 타락 후에도 그 기원을 지울 수 없다. 그러나 자연인은 성령의 일을 알 수 없으므로 거듭나야 한다(고전 2:14).

갈림길기독교를 여러 종교 중 하나로 보고 길이 다양하다고 믿을 수도 있고,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이 보편적 신앙을 요구하신다고 믿을 수도 있다. 전자를 택한 사람은 기독교 신학을 쓸 자격이 없다. 교의신학자의 작업은 신앙의 영역 안에 머물 때만 참되다.

(2) 계시의 자리와 자율 비판 원서 51–53쪽

  • 요점: 신학은 계시에 묶여 있고, 인간은 결코 자율적이지 않다.
  • 신학이 참 지식이 되려면 하나님이 ① 알려질 수 있고 ② 자신을 알리셨고 ③ 인간에게 알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신학자는 신앙의 영역 안에 서고, 계시에 묶이며, 신앙을 자기 것으로 소유한다.
  • 이것은 사람을 자유하게 하는 실재다. 루터가 교회의 잘못된 가르침에 맞설 수 있었던 힘도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데서 나왔다.
입장신학 내용을 어디서 끌어내나
종교개혁성경만을 유일한 토대로
로마 가톨릭성경 옆에 전통을 둔다
이성주의자·신비주의자종교적 주체에서
슐라이어마허 이후정통 신학자까지 상당 부분 의식(종교적 자의식)의 신학으로
  • 교리를 “머리 지식”이라 부르며 “예수와의 개인적 관계”만 강조하는 흐름은 절반의 진실이다. 좋은 신학이 인격적이어야 함은 자명하고, 객관적 계시는 성령의 주관적 조명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 그러나 인격적이라는 말이 객관적 통제에서 벗어난다는 뜻은 아니다. 교의학은 다른 학문이 대상에 묶이듯 계시에 전적으로 묶여 있다.
  • 지성·감정, 이성·양심은 진리의 원천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기관이다.

극단적 자율 → 이신론

신이 세상에 개입하지 않는다는 입장으로 가서 이성주의에 빠진다.

극단적 자율 → 범신론

신과 세계를 하나로 보는 입장으로 가서 신비주의를 조장한다.

신앙은 샘이 아니라 수로다둘 다 객관적 진리를 무너뜨린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에게서 온 객관적 말씀을 가리킨다(신 4:1; 사 8:20; 요 5:39; 딤후 3:15; 벧후 1:19). 신앙은 다른 근원의 물을 나르는 수로다.

6. 성경, 유일한 외적 토대 원서 53–58쪽

(1) 성경적 신학과 교회 전통 원서 53–55쪽

  • 요점: 성경은 교회 안에서, 그리고 학문적 형태로 설명되어야 한다.
  • 교회를 건너뛰고 성경만 요약하는 ‘성경적 신학’은 방법론적 자각이 없다. 선입견 없이 성경을 완벽히 재생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 모든 신자는 신앙 공동체에서 확신을 물려받고 자기 교회가 준 안경을 끼고 성경을 본다(개혁파·루터파·로마 가톨릭 모두).
  • 전통을 넘어서려 한 신학자들은 더 객관적이지도 오래가지도 못한 자기만의 새 전통을 만들었다. 역설적으로 교회 전통이 성경에 더 충실했다.

성경은 이런 책이 아니다

  • 질문이 있을 때 조항을 찾아보는 법률문서
  • 구절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라고 준 책

성경은 이런 책이다

  • 여러 저자가 여러 시대에 쓴 살아 있는 유기적 전체
  •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려고 주어졌다
  • 이 벅찬 과제는 혼자 감당할 수 없다. 성령이 모든 진리로 인도하신다는 약속을 받은 교회에 맡겨졌다. 교회와 교리의 역사 전체에서 자신을 끊는 사람은 나무에서 잘린 가지처럼 마른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성도의 교제 안에서만 이해된다(엡 3:18).
  • “성경신학은 성경 내용을, 교의신학은 교회 교리를 재현한다”는 분리는 잘못이다. 교의신학의 사명도 성경 속 하나님의 생각을 설명하는 것이며, 다만 학문적 양식·형태·방법으로 한다.
  • 과거 개혁파는 교리문답과 구별되는 스콜라적(학문적 체계를 갖춘) 신학을 변호했다. 교회와 학교, 신앙과 신학의 유대를 지키며 학문성도 고수하려 한 것이다.

(2) 교회적 신앙과 회의 원서 55–56쪽

  • 요점: 신념은 환경에서 오지만, 회의주의에 빠지면 신학은 불가능하다.
  • 좋은 방법은 편파성을 막기 위해 성경·교회·경험을 모두 고려한다.
  • 교파를 옮겨도(침례교→오순절, 루터교→개혁파) 삶을 떠받치는 확립된 교리는 남는다. 그래서 특정 교회가 인정하는 대로 하나님의 진리를 서술하는 교의신학은 가능하다.
  • 의심이 깊어 회의주의·불가지론에 이르면 신앙도, 신앙고백도, 교의신학도 불가능하다.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과는 대화가 성립하지 않는다.
  • 그때에도 종교적 신앙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상을 바꾸어 철학 사조나 사회 운동 같은 새 교의에서 확실성을 찾을 뿐이다.

(3) 성경, 신학의 유일한 토대 원서 56–58쪽

  • 요점: 교육상 교회가 앞서지만 논리상 성경만이 유일한 외적 토대다.
  • 기독교 신학은 특정 교회와 신앙의 교제를 나누는 사람에게만 가능하다. 교회는 종교와 신학의 자연적 토양이며, 신학은 온 세대가 하나님께 올린 송영의 일부여야 한다.

교육적 순서 교회 → 성경

모든 학문은 권위자에게 초기 지식을 배운다. 전통이 학문에 앞선다. 그러나 전통이 지식의 원천은 아니다. 점성술이 천문학 전통의 일부라도 천문학을 배우려 점성술을 찾지는 않는다.

논리적 순서 성경만

성경만이 교회와 신학의 유일한 토대다. 충돌하면 교회와 신앙고백이 성경에 굴복해야 한다. 성경만이 자증하고 스스로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로마 가톨릭과 갈라진다.

  • 자연신학: 벨기에 신앙고백서 2조는 하나님이 자연과 성경 두 수단으로 알려진다고 고백한다. 개혁파는 그 가치를 인정하되 자연을 독립 원천으로 보지 않는다. 칼뱅의 말처럼 성경은 자연 속 하나님을 보게 하는 안경이다.
  • 그러므로 교의신학의 외적 토대(principium externum)는 성경 하나뿐이다.
  • 바빙크는 기계적 관계를 떠올리는 ‘원천’(fons)보다 유기적 관계를 담은 ‘토대’(principium)라는 말을 선호한다.
  • 성경에는 완성된 교리가 아니라 교리의 재료가 있다. 교의신학은 신학자의 사고하는 의식에 흡수되어 재진술된 성경의 진리다.

7. 인격적 신앙과 종합적-발생적 방법 원서 59–62쪽

(1) 신앙과 신학 방법: 신학의 구조 원서 59–61쪽

  • 요점: 신학은 인격적이되, 신앙은 원천이 아니라 수용 기관이다.
  • 인격성을 객관성과 맞세우는 것은 잘못이다. 대상이 실재할 때에만 신학은 인격적일 수 있다. 모든 학문은 자기 대상에 매여 있다.
  • 신학에서는 인격적 동의가 훨씬 중요하다. 계시가 신앙을 길러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두려고, 곧 생생한 신앙의 지식을 주려고 고안되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인격적 신앙을 지식의 원천으로 삼으면 하나님의 실재를 주관적 의식과 혼동한다. 이것이 의식의 신학과 갈라지는 지점이다.
  1. 성령이 성경을 주심객관적 계시
  2. 성령의 증거같은 성령이 신자의 마음에서 성경을 증언
  3. 외적 말씀 → 내적 말씀신앙을 통해
  4. 교회의 최고 교사(Doctor ecclesiae) 성령이 신자를 성경으로 이끄심
  • 신자마다 성향·양육, 신앙의 강도, 추론 능력이 다르고 지성에 죄의 영향이 남아 있다. 그래서 교의신학은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
  • 예언자와 사도들도 같은 진리를 다른 관점에서 보았다. 하나님은 바로 이 다양성을 통해 교회를 일치로 이끄신다.

(2) 종합적-발생적 방법 원서 61–62쪽

  • 요점: 교회에서 배우되 성경 전체에서 출발해 교리를 전개한다.

역사적-분석적 방법 강 → 원천

  • 교회의 가르침을 먼저 요약하고 그 성경적 뿌리를 거슬러 찾는다.
  • 몇몇 교리에는 유익하고 부당하게 저평가되었다.
  • 그러나 이질적 교리들에 압도되어 통일된 체계를 세울 수 없다.

종합적-발생적 방법 원천 → 강

  • 신학의 토대(principium theologiae)인 성경 자체에 서서 교리를 발전시킨다.
  • 교회가 역사 속에서 한 지성적 수고를 다시 밟는다.
  • 토대는 개별 구절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성경. 교의는 성경 전체에서 유기적으로 자란다.
  • 이 방법은 교육상 교회가 성경에 앞선다는 사실을 무시하지 않는다. 논리적 순서와 교육적 순서가 다를 뿐이다.
  • 성경은 우리가 설명해야 할 ‘사실들의 창고’가 아니라, 그 사실들을 스스로 해석하는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자 성령의 증언이다. 편집자 주: 여기서 바빙크는 하지(C. Hodge)의 경험적-귀납적 방법과 갈라진다.
  • 성경은 동의를 구하지 않고 믿음·신뢰·순종을 요구한다. 메시지가 유기적 통일체이므로 교의도 하나의 체계를 이룬다.
  • 교의신학자는 교의를 발생적·체계적으로 전개하며 탈선을 지적하고 빈틈을 메워 교의의 미래 발전에 기여한다.

8. 교의학 구성의 역사와 하나님 중심 구성 원서 63–71쪽

(1) 고대·중세·종교개혁·17세기의 체계들 원서 63–65쪽

  • 요점: 보나벤투라가 형식상 정점이다. 종교개혁 교의학은 하나님에서 출발했고, 인간중심 구성은 부적절하다. 출발점은 유익도 언약도 아닌 하나님이다.

평가 기준은 저자의 명성이 아니라 자료 전체를 하나로 꿰는 구분 원리가 있는가이다.

  1. 고대 · 오리게네스 『원리에 관하여』처음으로 질서를 부여. 하나님·세계·자유·계시 네 부분.
  2. 고대 · 아우구스티누스 『편람』믿음·소망·사랑 세 덕목 아래 교의학과 윤리학을 함께.
  3. 중세 · 롬바르두스 『명제집』계시 내용 전체를 사물(res)과 표지(signa)로. 네 권: 삼위일체 / 창조와 타락 / 성육신과 윤리 / 성례와 종말. 주제 경계가 뚜렷해지고 윤리학이 들어온 진전. 그러나 성경·교회·구원론은 거의 다루지 않음.
  4. 중세 · 보나벤투라 『개요』 형식상 최고견고한 방법, 선명한 구분. 하나님이 창조의 작용인·모범인, 구속의 회복 원리, 보응의 완성 원리. 그래서 일곱 주제가 단일 학문으로 묶인다. 바빙크 자신의 구성으로 이어진다.
  5. 중세 · 아퀴나스 『신학대전』1부 하나님과 죄 이전의 피조물, 2부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 3부 그리스도와 성례(부록 연옥). 질문 → 반론 → 권위 → 답변 → 반론 반박. 치밀하나 구분 수준은 보나벤투라에 못 미친다.
  6. 1521 · 멜란히톤 『보편논제』로마서 강의에 기초. 죄와 은혜, 율법과 복음 같은 인간론·구원론 주제만. 이후 판에서 하나님에서 시작하는 종합적 체계로 확장.
  7. 1559 · 칼뱅 『기독교강요』 최종판네 권: 창조주 하나님 / 그리스도 안의 구속주 하나님 / 성령의 내적 사역 / 성령의 외적 사역. 엄격한 삼위일체 구조가 아니라 사도신경에서 왔다. 출발점은 신학적이되, 추상적 신 개념이 아니라 자연과 성경으로 알려진 하나님.
  8. 17세기 · 실천적 신학스콜라적 처리에 대한 반작용. 인간의 구원과 행복이 중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는가”.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의 “이것이 당신에게 어떤 유익을 줍니까”. 부적절 관심이 하나님의 객관적 실재에서 인간으로 옮겨진다.
  9. 17세기 · 콕세이우스 언약신학모든 자료를 언약으로 분류. 언약 시대를 너무 날카롭게 나눠 은혜언약사를 연속된 철폐로 다루고 통일성을 잃었다. 근본 문제는 출발점이 하나님이 아니라 언약이라는 것. 신론·인간론이 서론으로 전락한다.

(2) 근대철학과 서론의 팽창 원서 66쪽

  • 요점: 근대철학 아래 이성이 계시의 재판관이 되고 서론이 본론을 삼켰다.
  • 내용은 줄고 방법 논의는 늘었다. ‘어떻게 아는가’(인식론)가 ‘무엇이 있는가’(형이상학)를 밀어냈다.
  • 칸트가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선언한 뒤 계시의 자리를 이성과 자연신학이 차지했고, 출발점은 도덕과 종교 감정이 되었다. 종교철학을 다루는 서론이 비약적으로 커졌다.

종교개혁 시대와 그 이전

성경의 진리와 권위를 기정사실로 두고 개별 교의를 놓고 논쟁했다.

근대

이성이 역사비평과 손잡고 교회의 교의 자체에 도전했다. 처음엔 계시 옆의 자기 영역에 그쳤으나 결국 계시가 참인지 판단하는 특권을 가졌다. 이성은 겸손한 종이기를 그만두고 통제하는 목소리가 되려 했다.

(3) 19세기 토대의 위기 원서 67쪽

  • 요점: 19세기는 개별 교리가 아니라 교의학의 가능성 자체를 공격했다.
  • 이성 위에 세운 토대는 칸트의 도전 앞에 무너졌다. 슐라이어마허는 신앙과 교리를 구출하려고 ‘절대 의존 감정’과 그 묘사에 한정했다.
  • 역사비평이 성경에서 신적 권위를 제거하자 종교적 삶도 생명력을 잃었다. 비평과 의심이 우위를 차지하고 “내가 믿나이다”라는 어린아이 같고 영웅적인 고백이 드물어졌다.
“사람들이 여전히 자신들의 신앙고백을 믿고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더 이상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지는 않았다.” — 바빙크

(4) 서론의 자리와 구성 원리 원서 68–70쪽

  • 요점: 서론은 신앙에서 출발해야 하며 외부 원리로 체계를 짜서는 안 된다.
  • 아이러니: 슐라이어마허 등은 신학을 형이상학에서 해방하려다 철학에 더 의존하게 만들었다. 방법·변증이 신학을 지배하면 성경과 전통의 구속력이 느슨해지고 시대 철학에 기댄다.
  • 개혁파 신학자들도 자연적 하나님 지식과 이성적·역사적 증거를 신론의 서론으로 삼아 신앙에서 출발하기를 포기했다. 편집자 주: 이 점에서 바빙크는 워필드와 크게 달랐다. 믿음의 이유는 신앙 자체에서 나와야 한다.
  • 그래도 서론 자체는 유익하다. 다만 신학적 성격을 잃거나 철학에 종속되지 않아야 한다.
신앙의 토대 = 신앙의 조항신앙의 토대들(principia fidei)은 그 자체로 신앙의 조항들(articuli fidei)이다. 토대는 인간의 논증이 아니라 신적 권위에 선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는 것은 신앙의 행위이자 열매다. 토대는 이중적이다: 외적·객관적 계시와 내적·형식적 신앙. 이 둘이 신학서론의 고유한 주제다.
구성 원리내용바빙크의 평가
삼위일체적 구성사도신경을 따라 성부·창조 / 성자·구속 / 성령·성화거부할 것은 아니나 불만족. 삼위일체 교리 자체를 둘 자리가 없어 앞에서 가설처럼 다뤄야 한다. 바깥 사역을 위격별로 과도하게 나눠 한 분 하나님의 공동 사역을 놓치고, 경륜적 삼위일체만 보고 존재론적 성격을 놓칠 위험.
기독론적 구성그리스도의 위격을 인식의 원천으로더 부적절 우리는 그리스도를 성경을 통해서만 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의 존재를 전제한다. 성경 전체가 하나님의 말씀이다.
덕·언약·하나님 나라특정 주제에 따른 분류교리문답에는 유익하나 중심적이지도 포괄적이지도 않다.

(5) 종합적 방법과 송영 원서 70–71쪽

  • 요점: 교의학은 하나님에서 시작해 하나님께 돌아가는 송영이다.
  • 신자는 모든 것을 영원의 관점(sub specie aeternitatis)에서 본다. 교의신학에서 말하는 이는 언제나 신자이고, 추상적 신 개념에서 사변하지 않고 그리스도 안에 계시된 하나님을 서술한다. 그래서 모든 교리에 종교의 심장이 뛴다.
  • 신앙의 내용은 믿는 주체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 지배한다. 그러므로 배열 원리도 대상 자체에서 끌어내야 한다.
  • 적합한 방법은 역사적-발생적 또는 종합적 방법: 하나님에게서 나와 그분의 사역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하나님께 올라가 하나님 안에서 마친다(롬 11:36).
  • 기독교의 본질: 성부가 창조하셨으나 죄로 파괴된 것이 아들의 죽음으로 회복되고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 나라로 재창조되는 것.
  • 교의신학은 자충족적이신 하나님이 피조물 가운데 자신을 영화롭게 하시고, 분열된 피조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연합하시는 것을 보여 준다(엡 1:10). 그래서 메마른 학문이 아니라 신정론이자 하나님의 모든 덕에 대한 송영, 곧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눅 2:14)이다.

구조도

하나님 시작이고 중간이고 끝 창조 (성부) 작용인·모범인 구속 (성자) 죄로 파괴된 것의 회복 완성 (성령) 하나님 나라로 재창조 주에게서 주에게로 (송영) 롬 11:36 성경 = 유일한 외적 토대 신앙 = 받아들이는 수로
교의학은 하나님에서 나와 그분의 사역을 거쳐 하나님께 돌아간다
  1. 용어와 교의하나님 권위 + 교회 고백
  2. 진리의 물음종교학 축소 거부
  3. 계시와 확실성신적 권위가 토대
  4. 유일한 토대성경만 외적 토대
  5. 신앙의 자리기관이지 원천 아님
  6. 방법종합적-발생적
  7. 구성 비판삼위·기독론·실천 구성 부족
  8. 송영하나님에서 하나님께

다른 입장과 바빙크

입장그 입장의 주장바빙크의 답
로마 가톨릭교의의 권위는 교회 교도직에 있고 전통은 성경과 나란하다교회의 권세는 말씀을 섬기는 권세다. 갈등이 생기면 교회와 고백이 성경에 굴복해야 한다.
슐라이어마허교리는 종교 감정을 말로 옮긴 것이다감정은 진리를 받는 기관이지 원천이 아니다. 감정으로 급선회하면 참·거짓의 물음이 사라진다.
트뢸치·종교학신학은 종교 현상의 역사적·심리학적 기술이어야 한다유익하나 하나님이 정말 계신가에는 답하지 못한다. 전제 없는 학문은 없다.
신앙지식론하나님 지식은 머리가 아닌 인격적 관계의 문제다이성주의 비판은 옳지만 지식을 감정으로 바꾸면 범주 혼동이다. 신앙은 기능이지 원천이 아니다.
성경신학·경건주의전통을 버리고 성경만 요약하면 더 순수하다누구나 교회의 안경을 쓰고 읽는다. 전통을 넘으려는 이들은 더 짧은 새 전통을 만들 뿐이다.
콕세이우스교의학은 언약 사상으로 분류해야 한다출발점이 하나님이 아닌 언약이 되고, 언약을 철폐의 연속으로 다뤄 통일성을 잃는다.

오해와 바른 이해

✕ 오해

  • 교리보다 체험이 중요하다. 교의는 필요 없다.
  • 교의는 교회가 인정해야 비로소 참이 된다.
  • 하나님은 알 수 없고 믿을 수 있을 뿐이다(칸트).
  • 신학자는 중립적이어야 학문적이다. 중립적 종교 연구로 충분하다.
  • 전통은 버리고 성경만 순수하게 읽으면 된다.
  • 성경은 질문마다 찾아보는 법률문서다.
  • 체계는 성경을 억누르니 버려야 한다.

✓ 바른 이해

  • 교의 없는 신앙은 착각이다. 교의 거부도 교의적이다. 문제는 어떤 교의를 긍정하느냐다.
  • 하나님의 권위로 그 자체로 참이며, 인정받도록 의도되었을 뿐이다.
  • 하나님이 말씀으로 자신을 알리셨기에 참 지식이 가능하다.
  • 초연한 객관성은 신화다. 묘사만으론 ‘하나님이 계신가’에 답 못 한다. 신학자는 신자로서 일한다.
  • 누구나 안경을 끼고 읽는다. 교회 전통이 오히려 성경에 더 충실했다.
  • 성경은 유기적 전체이며 하나님의 방식으로 생각하게 하려고 주어졌다.
  • 남용이 사용을 무효화하지 않는다. 조화 못 할 땐 체계가 양보한다.

핵심 용어

로키 (loci)
성경 진술을 찾아볼 ‘자리’. 멜란히톤 이후 신학 주제를 가리킨 옛말(수사학의 토포이에서 옴).
교의 (dogma)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하고 교회가 고백하는, 반드시 믿어야 할 신앙 조항. ‘도케인’에서 왔으나 뜻은 확고히 결정된 것.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Deus dixit)
개혁파가 모든 교의를 도출하는 원리.
신앙지식
하나님 지식을 지성적 지식과 전혀 다른 인격적 관계로만 보려는 입장의 용어.
신앙의 척도 (regula fidei)
교회의 신앙고백과 교리를 지배하는 기준으로서의 성경.
외적 토대 (principium externum)
교의신학의 유일한 객관적 토대, 곧 성경.
토대 (principium) / 원천 (fons)
기계적 관계를 떠올리는 ‘원천’보다 유기적 관계를 담은 ‘토대’를 선호한다.
자증 (αὐτόπιστος)
성경이 다른 보증 없이 스스로 믿을 만함을 증언하고 스스로를 해석함.
교회의 최고 교사 (Doctor ecclesiae)
신자를 성경으로 이끄시고 마음속에서 성경을 증언하시는 성령.
역사적-분석적 방법
교회 교리에서 출발해 성경 근거를 거슬러 찾는 방법(강 → 원천).
종합적-발생적 방법
성경 전체라는 토대에서 출발해 교리를 발생 순서대로 전개하는 방법(원천 → 강).
신앙의 토대 / 신앙의 조항 (principia fidei / articuli fidei)
신앙의 토대는 그 자체로 신앙의 조항이다. 논증이 아니라 신적 권위에 선다.
영원의 관점 (sub specie aeternitatis)
신자가 모든 것을 하나님의 빛 안에서 보는 시각.
송영 (doxology)
하나님의 덕을 찬양함. 교의신학의 최종 성격.

성경 근거

구절이 장에서의 쓰임
고전 2:14자연인은 성령의 일을 알 수 없다. 계시를 알려면 거듭나야 한다.
신 4:1진리 지식은 하나님이 주신 객관적 말씀에서 온다.
사 8:20사람이 아니라 율법과 증거의 말씀(객관적 계시)이 기준이다.
요 5:39성경이 진리를 아는 길을 가리킨다.
딤후 3:15성경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 객관적 말씀이 근원이다.
벧후 1:19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 객관적 말씀이 근원이다.
엡 3:18그리스도의 사랑은 모든 성도와 함께, 곧 성도의 교제 안에서 깨닫는다.
롬 11:36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나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교의학 구성의 근거.
엡 1:10분열된 피조물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연합된다.
눅 2:14교의신학의 끝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송영이다.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로마서 11:36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린도전서 2:14

복습 문제

교의가 ‘교의’가 되는 근거는 무엇이며, 교회는 교의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교회가 인정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권위에 기초하기 때문에 교의가 된다(Deus dixit). 그러나 교의는 늘 신적 권위와 교회 고백의 결합이며, 교회는 교의를 보존·설명·변호할 책임을 진다. 교회의 권세는 주권적·법정적이 아니라 말씀에 봉사하는 권세이고, 교회의 가르침을 신적 진리 자체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신학을 종교학으로 바꾸는 흐름(슐라이어마허·리츨·트뢸치)에 대한 바빙크의 비판은?
종교 연구 자체는 정당하지만, 그것만이 정당하다는 주장은 진리 물음을 회피하는 것이다. 묘사는 무엇이 참인지 말하지 않는다. 전제 없는 학문은 없고, 경험 연구는 “신이 정말 존재하는가”에 답할 수 없다. 기독교는 하나님 지식이 참이냐에 따라 서거나 넘어진다.
“신앙은 샘이 아니라 수로다”라는 말의 뜻은?
신앙(지성·감정·이성·양심도)은 하나님 지식의 원천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기관(기능)이다. 지식의 내용은 객관적 계시에서 온다. 인간은 결코 자율적이지 않으며, 극단적 자율은 이신론(이성주의)이나 범신론(신비주의)으로 빠진다.
교회와 성경의 순서를 ‘교육적 순서’와 ‘논리적 순서’로 구분해 설명하라.
교육적으로는 누구나 교회에서 먼저 신앙 내용을 배우므로 교회가 성경에 앞선다. 그러나 논리적으로는 성경만이 교회와 신학의 유일한 외적 토대이며, 충돌하면 교회와 신앙고백이 성경에 굴복해야 한다. 성경만이 자증하고 스스로를 해석하기 때문이다.
역사적-분석적 방법과 종합적-발생적 방법의 차이와 바빙크의 선택은?
역사적-분석적 방법은 교회 교리에서 출발해 성경 근거를 거슬러 찾는다(강 → 원천). 일부 교리에는 유익하지만 이질적 교리들에 압도되어 통일된 체계를 세울 수 없다. 종합적-발생적 방법은 전체로서의 성경에서 출발해 교리를 전개한다(원천 → 강). 바빙크는 후자를 택한다.
삼위일체적·기독론적·언약적 구성이 부족한 이유와 바빙크가 제시하는 구성은?
삼위일체적 구성은 삼위일체 교리 자체를 둘 자리가 없고 공동 사역·존재론적 삼위일체를 놓친다. 기독론적 구성은 그리스도를 인식의 원천으로 삼지만 우리는 그리스도를 성경을 통해서만 안다. 언약·덕·나라 구성은 중심적이지도 포괄적이지도 않다(콕세이우스는 출발점이 하나님이 아닌 언약). 바빙크는 하나님에서 시작해 창조·구속·완성의 사역을 거쳐 하나님께 돌아가는 구성을 제시한다(롬 11:36).
한 줄“교의신학은 계시에 묶인 하나님 지식의 체계이며 결국 찬양이다.”

책의 저작권은 저자와 출판사에 있습니다. 빛다방 학습·심화 노트를 바탕으로 한 개인 학습용 정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