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권 11편 성찬 2 · 바른 시행 · 미사 비판
제4권 17장 35-50절 + 18장 1-20절 (생명의말씀사 세계기독교고전 『기독교강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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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한눈에
앞 편에서 칼빈은 성찬에서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설명했다. 이 편에서는 그 원리를 실제 예배에 적용한다. 먼저 떡을 경배하는 관행을 말씀 밖의 우상숭배로 물리치고, 성찬의 둘째 용도(공개 고백)와 셋째 용도(서로 사랑)를 정리한다. 이어서 네 가지를 주장한다. 성찬에는 반드시 말씀이 함께해야 한다. '합당함'은 완벽함이 아니라 믿음과 사랑이다. 성찬은 적어도 매주처럼 자주 해야 한다. 잔은 모든 신자에게 주어야 한다. 18장에서는 미사를 '죄를 없애는 제사'로 보는 가르침이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과 단번에 드린 십자가 제사를 무너뜨린다는 것을 다섯 가지로 밝힌다. 그리고 '제사'라는 말을 속죄 제사와 감사 제사로 나누어 정리한 뒤, 하나님이 세우신 성례는 세례와 성찬 둘뿐이라는 결론으로 17-18장을 맺는다.
📜절별 정리
성찬물 숭배 행위에 대한 논의. 35-37
📜17.35. 성찬물 숭배 행위를 배격함
앞 편의 내용, 곧 그리스도의 몸은 하늘에 있고 성령이 우리를 그분과 이어 준다는 것을 알면, 떡과 잔을 경배하자는 주장에 흔들리지 않는다. 반대편의 논리는 이렇다. 떡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그분의 영혼과 신성도 몸에서 떨어질 수 없으니 함께 있다(병존설). 그러니 떡 앞에서 그리스도를 경배해야 한다. 칼빈은 먼저 이 전제가 성경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논리를 이어 붙인 것일 뿐이라고 답한다. 주님은 어떤 방식으로 계시는지 말씀하지 않으셨고, 오히려 몸과 피를 따로 나누어 말씀하셨다. 다음으로, 말씀에 근거하지 않은 예배는 양심이 흔들릴 때 붙잡을 데가 없다. 주님의 명령은 “받아서 먹으라, 마시라”였다. 사도들은 엎드리지 않고 상에 기대어 앉아 먹었고, 초대교회는 떡을 '떼었다'. 명령대로 먹고 마시는 사람만이 '하나님 뜻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확신을 얻는다.
- 병존설은 성경이 아니라 논리 조합이다
- 주님은 몸과 피를 나누어 말씀하셨다
- 명령은 '경배하라'가 아니라 '먹고 마시라'
- 사도들은 엎드리지 않고 앉아서 먹었다
- 말씀대로 할 때 양심이 확신을 얻는다
📜17.36. 성찬물 숭배 행위는 미신이며 우상숭배임
칼빈이 이 문제를 길게 다루는 이유가 있다. 말씀을 떠나 상상으로 하나님을 대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 보여 주려는 것이다. 성찬은 약한 우리 마음을 하늘로 끌어올리려고 주신 것이다. 그러니 눈앞의 떡에 머물러 엎드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찾는 바른 길에서 벗어난 미신이다. 칼빈은 니케아 공의회가 상징물 앞에 몸을 굽히지 못하게 한 것도, 고대 예배에서 성찬 전에 “마음을 높이 들라”고 외친 관례도 같은 뜻이었다고 본다. 성경도 승천을 기록해 그리스도의 몸이 우리 눈앞에서 떠났음을 알리고, 하늘 아버지 오른편에 계신 그분을 찾으라고 한다. 선물을 주신 분 대신 선물을 경배하는 것은 두 겹의 죄다. 하나님의 영광을 피조물에게 넘기는 죄, 그리고 하나님의 선물을 우상으로 만들어 더럽히는 죄다. 그래서 칼빈은 '성령의 학교'에서 성경이 가르치는 데까지만 배우고, 가르치지 않는 것은 기꺼이 모르자고 권한다.
- 성찬은 마음을 하늘로 끌어올리는 도구
- 표징에 머물러 엎드리면 미신이 된다
- 경배는 하늘의 그리스도께 영으로 드린다
- 선물을 경배하면 주신 분을 버리는 것
- 성경이 멈추는 곳에서 우리도 멈춘다
📜17.37. 성찬물 숭배와 관련된 미신적인 예식들의 허구성
미신은 한번 선을 넘으면 계속 커진다. 떡을 축성해 '성체'라 부르고, 행렬을 지어 들고 다니며 경배하게 하는 예식까지 생겼다. 그들은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말씀을 근거로 든다. 칼빈은 같은 자리에서 주님이 “받아서 먹으라”고도 하셨다고 맞선다. 명령에 약속이 붙어 있으면, 그 약속은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만 해당된다. '나를 부르라'와 '건지리라'가 한 묶음이듯(시편 50:15), 베드로나 바울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 약속을 기대할 수는 없다. 이어 칼빈은 성찬의 둘째 용도를 정리한다. 첫째 용도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 믿음을 돕는 것이라면(앞 편), 둘째는 사람들 앞에서 하는 공개 고백이다. 우리의 생명과 구원이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에 달려 있다고 한 목소리로 고백하고, 그 모범으로 다른 사람들도 그분을 높이게 하는 것이다.
- 성체 행렬은 말씀에 없는 예식이다
- 약속과 명령은 떼어 낼 수 없다
- 반쪽 약속만 붙들면 약속이 아니다
- 둘째 용도: 주의 죽음을 공개 고백함
신자 간의 사랑, 말씀 선포, 합당한 참여, 성찬 시행의 적절한 형식과 횟수 등, 성찬과 관련하여 특별히 강조할 문제들, 38-46
📜17.38. 성찬과 신자 상호 간의 사랑
성찬의 셋째 용도는 우리를 깨끗한 삶과 사랑과 화목으로 이끄는 '권면'이다. 칼빈은 다른 어떤 수단보다 성찬이 이 일을 강하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뿐이고, 우리 모두가 그 한 몸에 참여한다. 그러니 우리도 한 몸이 되어야 한다. 성찬의 떡이 바로 이것을 보여 준다. 수많은 낟알이 섞여 구별할 수 없는 한 덩이가 되듯, 우리도 갈라짐 없이 하나로 엮여야 한다. 그러므로 형제를 해치거나 무시하면 그리스도를 해치는 것이다. 형제 안에서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사랑할 수 없다. 내 몸 한 곳이 아프면 온몸이 아프듯 형제의 고통에 마음 아파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찬을 “사랑의 끈”이라 부른 이유가 여기 있다.
- 셋째 용도: 사랑과 화목으로의 권면
- 한 떡에 참여하니 우리는 한 몸이다
- 형제를 해치면 그리스도를 해치는 것
- 형제의 아픔을 내 몸의 아픔처럼
- 성찬은 “사랑의 끈”(아우구스티누스)
📜17.39. 성찬에는 반드시 말씀이 있어야 함
말씀이 없으면 성례를 바로 시행할 수 없다. 믿음을 세우는 일, 고백하는 일, 사랑의 의무로 감동받는 일 모두 말씀 선포가 있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교황 체제에서는 성찬이 말 없는 의식으로 바뀌었다. 축성의 효력이 사제의 '의도'에 달린 것처럼 만들어서 일반 신자는 상관없는 사람이 되었다. 또 다른 오류는 약속이 떡과 잔에게 주어진 것처럼 여긴 것이다. 주님은 떡을 향해 “네가 내 몸이 되리라” 하지 않으셨다. 제자들에게 먹으라 명하시고, 그들이 몸과 피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셨다. 그러니 성찬의 말씀은 떡에 대고 중얼거리는 주문이 아니라, 듣는 사람의 마음에 박혀 믿음을 세우는 살아 있는 설교여야 한다. 병자를 위해 성찬물을 미리 보관해 두자는 주장도 무익하다. 병자가 말씀을 듣지 못한 채 받기 때문이다. 목사가 병자 곁에서 직접 성찬의 뜻을 설명하고 나누어야 한다. 고대 교회에 그런 전례가 있었음은 칼빈도 인정하지만, 중대한 일일수록 진리 자체를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하다고 답한다.
- 말씀 없는 성찬은 성찬이 아니다
- 약속은 떡이 아니라 받는 사람에게
- 성찬의 말씀은 주문이 아니라 설교
- 보관한 성찬물보다 말씀과 함께 나눔
- 오래된 관례보다 진리가 안전하다
📜17.40. 합당하지 못한 자들이 성찬에 참여하는 문제
성찬의 떡은 경건한 사람에게 달고 유익한 양식이다. 그러나 믿음도 감사도 사랑도 없는 사람에게는 독이 된다. 좋은 음식도 병든 위에 들어가면 해가 되듯, 영의 양식도 썩은 마음에 들어가면 더 큰 멸망을 부른다. 양식 탓이 아니라 더러운 자에게는 깨끗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말한 '합당하지 않게' 먹는 자는, 믿음과 사랑이 조금도 없이 그냥 집어 먹는 사람이다. 이들은 입으로는 '구원은 그리스도께만 있다'고 고백하면서 실제로는 믿지 않으니, 스스로 자기 죄를 증언하는 셈이 된다. 또 형제와 갈라진 채 몸의 상징을 받으니 그리스도의 몸을 찢는 셈이다. 그래서 바울은 먹기 전에 자신을 살피라고 한다. 칼빈이 꼽는 점검 질문은 이렇다. 그리스도의 구원을 의지하는가, 입으로 고백하는가, 그분을 닮기 원하는가, 형제를 내 몸의 지체로 여기고 섬기기 원하는가. 이것이 지금 완전할 수는 없다. 다만 온 마음으로 그 목표를 향해 자라 가야 한다.
- 같은 떡이 믿는 자엔 양식, 불신자엔 독
- '합당하지 않게' = 믿음·사랑 없이 먹음
- 형제와 갈라진 채 받으면 몸을 찢는 것
- 먹기 전에 믿음과 사랑을 점검한다
- 완전이 아니라 향해 가는 방향이 중요
📜17.41. 과연 누가 성찬에 합당한가?
성찬을 바로 받게 한다면서 오히려 약한 양심을 괴롭힌 가르침이 흔했다. 그들은 '은혜의 상태'에 있는 사람만 합당하다고 하고, 그것을 '모든 죄에서 깨끗한 상태'로 풀었다. 그렇다면 지금껏 살았던 사람 누구도 성찬을 받을 수 없다. 이 고통을 풀어 준다며 내놓은 방법이 자기 점검과 통회·고백·보속이었다. 칼빈은 이 문제를 3권(회개와 고해·보속 비판 부분)에서 이미 다루었다고 말한다. 여기서 칼빈의 답은 이것이다. 이런 처방은 죄 때문에 두려워하는 양심에게 아무 힘이 없다. '최선을 다했다'는 확신을 언제, 무슨 근거로 가질 수 있는가? 결국 그 기준대로라면 “합당하지 않게 먹으면 심판을 먹는다”는 말씀 앞에서 성찬의 문은 늘 잠겨 있게 된다.
- '죄 없는 상태'를 요구하면 아무도 못 온다
- 통회·고백·보속은 양심을 못 살린다
- '최선을 다했다'는 확신은 불가능하다
- 잘못된 기준은 성찬의 문을 잠근다
📜17.42. 믿음과 사랑이 합당함의 요건임
그 가르침은 두려워 떠는 죄인에게서 성찬의 위로를 빼앗는다. 칼빈은 마귀가 사람을 망하게 하는 가장 빠른 길이 하나님이 먹이려는 양식을 못 먹게 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억할 것은 이것이다. 이 잔치는 병든 자의 약이고, 죄인의 위로이며, 가난한 자에게 주는 구제다. 스스로 건강하고 의롭고 부유하다고 여기는 사람에게는 쓸모가 없다.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합당함'은 우리의 합당하지 못함을 그리스도께 가져가 그분이 우리를 합당하게 해 주시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는 가난하니 베푸시는 분께, 병들었으니 의사께, 죽었으니 생명 주시는 분께 간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합당함은 둘이다. 하나는 믿음, 곧 나에게 아무것도 기대지 않고 그리스도께 다 기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사랑, 곧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도록 드리는 사랑이다. 완전한 믿음과 사랑을 기준으로 삼는 사람들도 결국 모두를 막는다. 성찬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약한 사람을 일으키려고 세우신 것이다.
- 성찬은 병자의 약, 죄인의 위로
- 합당함 = 내 부족을 그리스도께 가져감
- 요건 1: 나 말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믿음
- 요건 2: 불완전해도 드리는 사랑
- 성찬은 약한 자를 위해 세워졌다
📜17.43. 성찬의 적절한 시행
겉모양의 세부 사항은 중요하지 않다. 떡을 각자 떼든 받아먹든, 잔을 집사에게 돌려주든 옆 사람에게 넘기든 상관없다. 누룩 있는 떡이든 없는 떡이든, 붉은 포도주든 흰 포도주든 교회가 판단할 일이다. 다만 칼빈은 고대 교회가 떡을 손으로 받았고, 주님도 “너희끼리 나누라” 하셨다고 덧붙인다. 또 칼빈은 로마 감독 알렉산더(재위 2세기 초 무렵) 이전에는 누룩 있는 떡을 썼다고 전한다. 성찬의 목적은 구경거리가 아니라 바른 가르침이다. 감각을 홀리는 연극적 장치는 미신으로 끌고 갈 뿐이다. 오래된 관습이라는 변명도 통하지 않는다. 세례 때 기름을 부어 마귀를 쫓는 의식도 오래되었지만, 사도 시대 직후부터 성찬은 이미 얼룩지기 시작했다. 칼빈이 제안하는 바른 순서는 이렇다. 최소 매주 시행한다. 공중 기도와 설교 뒤에 떡과 잔을 상에 놓는다. 제정의 말씀과 약속을 읽고, 주님이 금하신 사람은 참여하지 못하게 한다. 합당하게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한 뒤, 시편 찬송이나 성경 낭독 속에 나눈다. 마치면 믿음과 사랑과 바른 삶을 권면하고, 감사와 찬송 뒤 평안히 흩어진다.
- 떡·잔의 세부 방식은 교회 재량
- 성찬은 쇼가 아니라 가르침이다
- '오래된 관습'은 정당화가 못 된다
- 최소 매주, 기도·설교·제정사·권면 순서
- 마지막은 감사와 찬송, 평안한 해산
📜17.44. 성찬은 자주 시행하여야 함
성찬은 일 년에 한 번, 형식적으로 하라고 세우신 것이 아니다. 자주 해야 할 이유는 이렇다. 그리스도의 고난을 자주 기념하고, 믿음을 지키고 굳게 하며, 감사와 찬양이 일어나게 한다. 또 서로의 사랑을 키우고, 형제를 해치지 않으며, 도울 수 있을 때 돕도록 서로 묶는다. 사도행전 2:42은 초대교회가 말씀과 교제와 떡 뗌과 기도에 힘썼다고 전한다. 이후 교회는 모일 때마다 말씀, 기도, 성찬, 구제 헌금을 하는 것을 규칙으로 삼았고, 고린도 교회도 그러했다. 고대 교회법들도 같은 방향이었다. 아나클레투스와 칼릭스투스가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법령, '사도의 법령', 안디옥 공의회(341년으로 알려짐), 제1차 톨레도 공의회(400년으로 알려짐)는 모두 설교만 듣고 성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경고하거나 내보내라고 했다.
- 성찬은 연례 행사가 아니라 자주 할 일
- 자주 할수록 믿음·감사·사랑이 자란다
- 초대교회는 모일 때마다 떡을 떼었다
- 고대 교회법도 불참을 엄하게 다뤘다
📜17.45. 성찬 참여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와 크리소스톰의 증언
옛 교회 지도자들이 이런 법을 만든 이유는 성찬이 유익하지만, 소홀히 하면 점점 사라질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시대에 어떤 곳은 매일, 어떤 곳은 토요일과 일요일, 어떤 곳은 일요일에만 성찬을 했다고 증언한다. 성도들이 느슨해지면 지도자들은 날카롭게 책망했다. 크리소스톰은 에베소서 설교에서 혼인 잔치 비유를 든다. 주인은 예복 없는 손님에게 “왜 앉았느냐”가 아니라 “왜 들어왔느냐”고 묻는다. 잔치에 와서 손 씻고 앉아 있다가 아무것도 안 먹으면 주인을 모욕하는 것이다. “나는 합당하지 않다”고 말한다면, 성찬을 준비하는 기도의 자리에도 합당하지 않은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 고대 교회는 매일~매주 성찬을 했다
- 지도자들은 불참을 날카롭게 책망했다
- 잔치에 와서 안 먹으면 주인을 모욕함
- '나는 자격 없다'는 핑계도 통하지 않음
📜17.46. 매년 한 차례 성찬을 시행하는 관례를 배격함
일 년에 한 번만 성찬을 받으면 된다는 관례는 마귀가 만든 것이라고 칼빈은 강하게 말한다. 사람들은 로마 감독 제피리누스(재위 3세기 초 무렵)가 이 법을 만들었다고 하지만, 칼빈은 지금 같은 형태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본다. 그때는 모일 때마다 성찬을 했다. 다만 우상을 섬기는 이웃 속에 사는 신자들이 믿음을 드러낼 필요가 있어서, 모두가 함께 참여할 날을 하나 정한 것이었다. 후대가 이것을 '일 년에 한 번이면 의무 끝'이라는 법으로 비틀었다. 칼빈의 대안은 최소 매주 성찬을 베푸는 것이다. 누구에게도 억지로 시키지는 않는다. 그러나 모두를 간절히 권하고, 게으른 사람은 꾸짖어야 한다. 크리소스톰 시대에도 깨끗할 때는 안 받다가 부활절에만 받는 악습이 있었다. 크리소스톰은 “오, 관습이여!” 하고 탄식했으니, 이 관습을 인정한 것이 결코 아니다.
- 연 1회 관례는 신자를 게으르게 만든다
- 제피리누스의 본래 뜻은 왜곡되었다
- 대안은 최소 매주 시행
- 강요는 말고, 강권하고 책망한다
- 크리소스톰도 이 악습을 탄식했다
평민에게 잔을 금하는 행위에 대한 반박. 47-50
📜17.47. 평민에게 잔을 금하는 폐단
같은 무리가 하나님 백성에게서 성찬의 절반을 빼앗았다. 잔(피의 상징)은 성직자만 마시고 일반 신자에게는 금한 것이다. 칼빈은 아이러니를 짚는다. 그들은 신자를 '속된 사람들'이라 부르며 자기들만 '하나님의 몫'인 것처럼 하지만, 베드로는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하나님의 몫(기업)으로 불렀다. 주님의 명령은 “다 마시라”였다. 그들은 잔을 모두에게 주면 위험하다고 하는데, 마치 하나님이 그런 위험을 내다보지 못하신 것처럼 말하는 셈이다. 또 병존설을 들어 '몸 안에 피도 들어 있으니 떡 하나로 충분하다'고 한다. 칼빈의 답은 이렇다. 주님은 떡을 몸, 잔을 피라고 말과 표징으로 나누셨다. 자기 전체를 뜻하셨다면 늘 하시던 대로 “나다”라고 하셨을 것이다. 떡과 잔을 따로 주신 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양식이자 음료로 넉넉하심을 보여 약한 믿음을 도우려는 것이다. 하나를 빼면 절반의 양분만 남는다. 병존설이 맞다 해도 그리스도가 주신 '이중의 보증'을 빼앗는 것은 여전하다.
- 잔을 금한 것은 성찬 절반을 빼앗은 것
- 주님 명령은 “너희가 다 마시라”
- 떡과 잔을 따로 주신 데는 이유가 있다
- 그리스도는 양식이자 음료로 충분하시다
- 병존설로도 '이중 보증'은 대체 못 함
📜17.48. 잔을 금하는 논리에 대한 반론
반론 하나. '한 번 있었던 일로 영원한 법을 만들 수 없다.' 칼빈은 이것이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명령이라고 답한다. 주님은 “다 마시라”고 명하셨고, 바울은 그것을 지켜야 할 규례로 전했다. 반론 둘. '잔은 제사 드리는 자로 세움받은 사도들에게만 주신 것이다.' 칼빈은 다섯 질문으로 답한다. 첫째 질문은, 어느 말씀이 그렇게 가르치느냐는 것이다. 성경은 식탁에 앉은 열두 사람을 기록할 뿐 그들을 '제사 드리는 자'라고 부르지 않는다. 설령 열둘에게만 주셨다 해도 그들끼리 나누라고 하셨다. 둘째 질문은, 사도 이후 천 년 동안 모든 신자가 예외 없이 떡과 잔을 다 받은 것은 무엇 때문이냐는 것이다. 테르툴리아누스, 암브로시우스(테오도시우스 황제에게 한 말), 히에로니무스, 크리소스톰, 아우구스티누스가 모두 이를 증언한다. 특히 크리소스톰은 옛 율법처럼 제사장과 백성이 나눠 먹지 않고 '한 몸과 한 잔을 모두에게' 준다고 말했다.
- 잔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명령이다
- 성경은 열둘을 '제사장'이라 안 부른다
- 열둘에게도 '서로 나누라' 하셨다
- 천 년간 모든 신자가 잔을 받았다
- 교부들의 증언이 이를 뒷받침한다
📜17.49. 잔을 모두에게 분배한 교회사의 실례
둘째 질문의 증거는 더 있다. 칼빈이 '로마의 마지막 감독'이라 부르는 그레고리우스(대 그레고리우스) 때에도 신자들이 잔을 마셨다. 그는 “어린양의 피를 들음이 아니라 마심으로 배웠다”고 했다. 그가 죽은 지 사백 년 뒤에도 이것은 관례를 넘어 바뀔 수 없는 법이었다. 주께서 묶으신 것을 나누는 것은 불경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로마 감독 겔라시우스는 미신 때문에 잔을 거부하는 사람은 성찬 전체를 받든지 아예 빠지든지 하라고 했다. 키프리아누스는 박해 앞에서 그리스도의 잔을 금하면서 어떻게 순교의 잔을 마시라고 하겠느냐고 물었다. 교회법 학자들이 겔라시우스의 명령을 사제에게만 해당한다고 좁힌 것을 칼빈은 유치한 궤변이라고 본다.
- 그레고리우스 때도 신자가 잔을 마셨다
- 수백 년간 바꿀 수 없는 법이었다
- 겔라시우스: 다 받든지, 빠지든지
- 키프리아누스: 잔 없이 순교의 잔을?
📜17.50. 성찬 제정 시의 말씀에 나타난 증거
셋째 질문. 주님은 왜 떡에는 그냥 “먹으라” 하시고, 잔에는 굳이 “너희가 다” 마시라고 하셨는가? 마치 훗날 잔을 빼앗을 사탄의 술수를 미리 막으신 것 같다고 칼빈은 말한다. 넷째 질문. 정말 주님이 사제만 높이셨다면, 무슨 근거로 일반 신자에게 떡이라도 주는가? 명령도 본보기도 없다면 떡도 주면 안 된다. 다섯째 질문. 바울은 주께 받은 것을 전했다고 했고, 그가 전한 내용은 모두가 차별 없이 떡과 잔을 다 받는 것이었다. 하나님께는 '예'와 '아니오'가 뒤섞이지 않는다. 그러니 신자 대부분을 잔에서 빼는 사람들은 그것을 누구에게서 받았는지 따져야 한다. 이것을 '교회'의 이름으로 덮는 것은 더 터무니없다. 그 논리대로라면 그리스도의 규례를 무너뜨린 자기들은 교회이고, 사도들의 교회는 교회가 아니라는 말이 된다.
- 떡엔 '먹으라', 잔엔 '다 마시라'
- 사제만의 것이라면 떡도 줄 근거가 없다
- 바울은 주께 받은 그대로 전했다
- 하나님 말씀은 이랬다저랬다 하지 않는다
- '교회' 이름으로 말씀을 뒤집을 수 없다
미사는 주의 성찬을 무효화시키는 불경한 것임. 1-7
📜18.1. 로마 교회의 가르침
18장의 제목은 '교황제의 미사는 성찬을 더럽힐 뿐 아니라 없애 버린다'이다. 사탄은 여러 술수로 성찬을 흐려 왔지만, 그 절정은 미사가 죄 사함을 얻는 희생 제사라는 믿음을 퍼뜨린 것이다. 칼빈은 스콜라 신학자들의 미묘한 논증과 씨름하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가 겨냥하는 것은 로마 교회가 널리 퍼뜨린 생각이다. 미사는 사제와 참여자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는 수단이고, 산 자와 죽은 자의 죄를 갚는 화목 제사라는 생각이다. 이 생각은 뿌리 깊고, 겉모습이 아름답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내세운다. 많은 사람이 '미사' 한 단어에 신앙 전체가 들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칼빈은 말씀으로 증명하겠다고 한다. 미사는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십자가를 묻고, 그분의 죽음을 잊게 하고, 그 죽음의 은혜를 없애고, 성찬을 무너뜨린다. 그렇다면 아무리 뿌리가 깊어도 말씀이라는 도끼로 찍어 내야 한다. 이 다섯 가지가 2-7절의 뼈대다.
- 핵심 오류: 미사가 죄 사함을 얻는 제사
- 스콜라 논증보다 퍼진 생각을 겨냥
- 뿌리 깊고 아름다워도 말씀이 기준
- 다섯 고발: 모욕·은폐·망각·은혜 제거·파괴
📜18.2. 미사는 그리스도에 대한 모독임
첫째 고발. 미사는 그리스도의 영원한 제사장직을 빼앗는다. 구약 제사장은 죽기 때문에 후계자가 필요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리스도를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르는 '영원한' 제사장으로 세우셨다. 성경이 멜기세덱을 한 번 소개하고 끝을 말하지 않는 것이 이 끝없는 제사장직을 미리 보여 준다. 날마다 제사를 드리려면 그리스도를 대신할 사제가 필요하니, 결국 그분을 아버지 오른편에서 끌어내리는 셈이다. 그들은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돕는 부사제'라고 하지만, 히브리서는 죽음 때문에 제사장이 여럿이었다고 하니 죽지 않는 그리스도께는 도우미가 필요 없다. 그들은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드렸다'며 미사의 예표라고 주장한다. 칼빈은 그것이 싸움에 지친 아브라함 일행을 먹인 친절이었다고 답한다. 멜기세덱의 제사장 직무는 '축복'이었고, 히브리서도 이 축복으로 그의 높음을 말한다. 떡과 포도주가 미사의 예표였다면 꼼꼼한 히브리서 기자가 그것을 빠뜨렸을 리 없다.
- 그리스도는 영원한 유일의 제사장
- 죽지 않는 분께 후계자·도우미는 없다
- 날마다 제사하면 그분을 끌어내리는 것
- 멜기세덱의 떡·포도주는 지친 이를 먹인 것
- 그의 제사장 직무는 '축복'이었다
📜18.3.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은폐함
둘째 고발. 제단이 세워지면 십자가가 무너진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다면, 그 효력은 끝없이 계속된다. 구약 짐승 제사는 계속 반복되었는데, 그 반복 자체가 효력이 약했다는 증거다. 그러니 둘 중 하나다. 그리스도의 제사도 부족하다고 하든지,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고 고백하든지. 히브리서는 그분이 자기를 '단번에' 드려 죄를 없이 하셨고,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으며, 이제 더 드릴 제사가 없다고 말한다. 주님도 숨지기 전에 “다 이루었다” 하셨다. 그들은 '다른 제사가 아니라 같은 제사를 반복할 뿐'이라거나 '반복이 아니라 적용'이라고 빠져나간다. 칼빈의 답은 이렇다. 히브리서는 반복 자체를 부정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정하신 '적용'의 길은 새 제사가 아니라 복음 선포와 성찬이다. 바울이 '우리 유월절 양 그리스도가 희생되셨으니 명절을 지키자'고 한 것처럼 말이다.
- 반복되는 제사는 약하다는 증거다
- 그리스도는 단번에, 영원히 드리셨다
- “다 이루었다” — 구원은 완성되었다
- '반복'도 '적용'이라는 말도 핑계다
- 적용의 길은 복음 선포와 성찬이다
📜18.4. 말라기 1:11의 근거에 대한 반박
그들은 말라기의 예언을 미사의 근거로 든다.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해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라.' 칼빈은 선지자들이 미래의 영적 예배를 자기 시대의 익숙한 그림으로 그렸다고 답한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을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로, 경배를 '예물 드림'으로, 더 깊은 지식을 '꿈과 환상'으로 그렸다. 말라기도 이사야가 앗수르·애굽·유다에 제단이 세워진다고 한 예언과 같은 종류다. 칼빈은 묻는다. 이 예언이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그 세 제단은 어디 있으며 언제 세워졌는가? 세 나라에 예루살렘 같은 성전이 있었는가? 이렇게 따지면 말라기가 온 세상에 퍼질 영적 예배를 말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신자들은 실제로 깨끗한 제물을 드리고 있는데(16절에서 다룸), 미사 외에는 제사가 없다고 하니 그들이 속고 있는 것이다.
- 선지자는 미래 예배를 옛 그림으로 그렸다
- 말라기는 이방의 영적 예배 예언이다
- 이사야의 세 제단도 문자 그대로가 아님
- 깨끗한 제물은 신자의 감사 제사다
📜18.5.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망각하게 함
셋째 고발. 미사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죽음을 지운다. 유언은 유언한 사람이 죽어야 효력이 생긴다. 그리스도도 죄 사함과 의를 약속하신 유언을 자기 죽음으로 확정하셨다. 그런데 미사는 할 때마다 새로운 죄 사함과 의를 약속하니, 매번 새 유언을 만드는 셈이다. 그렇다면 그 유언을 확정하려고 그리스도가 다시, 아니 수없이 죽으셔야 한다. 히브리서도 그분이 자주 드려져야 했다면 창세 이후 여러 번 고난받으셔야 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는 그리스도를 죽이려는 생각이 없다, 모함이다'라고 반박한다. 칼빈은 그들의 의도가 아니라 그 가르침이 낳는 결론을 문제 삼는다고 답한다. '피 없는 제사'라고 백 번 외쳐도 소용없다. 피 흘림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다.
- 유언은 유언자의 죽음으로 확정된다
- 매번 새 죄 사함 = 매번 새 유언
-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또 죽으셔야 한다
- 문제는 의도가 아니라 가르침의 결과
- 피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
📜18.6.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은택을 제거함
넷째 고발. 미사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주는 은혜를 빼앗는다. 미사에서 새 구속과 새 용서를 본 사람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내가 이미 구속받았다'고 믿을 수 없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죽음으로 죄 사함을 사 두셨고, 미사에서 그것을 받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칼빈은 이것이 '우리가 우리를 구속하는 조건으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말과 같다고 본다. 그 결과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가 스스로 구속하는 법을 보여 주는 본보기' 정도로 줄어든다. 성찬은 우리를 그 자리에 머물게 하지 않고, 단번에 드려진 그 한 제사를 바라보게 한다. 그리스도가 유일한 제물이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직 한 번의 제사만 있다는 것까지 믿어야 우리 믿음이 십자가를 붙든다.
- 새 구속을 보면 옛 구속을 못 믿는다
- '사 두고 미사에서 받는다'도 같은 오류
- 그러면 십자가는 본보기로 전락한다
- '유일한 제물'에 '단 한 번'이 붙어야 한다
📜18.7. 미사는 성찬을 무효화시킴
다섯째 고발. 미사는 성찬 자체를 없앤다. 성찬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라 감사로 받는 것이다. 미사의 제사는 하나님께 값을 치르고 하나님이 그것을 받아 주셔야 하는 것이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이 다르듯 둘은 정반대다. 은혜에 감사해야 할 사람이 하나님을 빚진 분으로 만드니 이보다 큰 배은망덕은 없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우리가 이미 생명을 얻었고 계속 살아간다고 약속한다. 미사는 그리스도가 날마다 드려져야 유익하다고 노래한다. 성찬은 우리가 하나로 묶였음을 보여 주려고 공적 모임에서 나누는 것이다. 미사는 백성 대신 제사할 사제가 있다는 생각을 퍼뜨려 '사적 미사'를 낳았다. 사제가 혼자 먹으니 교제를 세우기는커녕 깨뜨린다. 칼빈은 많은 사람이 참석해도 모든 신자가 함께 받지 않으면 사적 미사라고 정의한다.
- 성찬은 선물, 미사는 값 치르기
- 주는 것과 받는 것만큼 다르다
- 하나님을 빚진 자로 만드는 배은망덕
- 성찬은 연합, 사적 미사는 분열
- 모두가 함께 받지 않으면 사적 미사
초기의 관례와 오류의 발생. 8-11
📜18.8. 사적인 미사는 하나 된 교제를 부인하는 것임
'미사'라는 말이 드려진 예물에서 왔다는 설이 있지만 칼빈은 확실하지 않다고 본다. 말의 기원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사적 미사는 그리스도의 제정과 정면으로 어긋난다. 주님은 받아서 서로 나누라고 하셨고, 바울은 떡을 떼는 것을 몸에 참여하는 것이라 했다. 혼자 받는 것은 이와 맞지 않는다. 그들은 '한 사람이 교회 전체의 이름으로 먹는다'고 답한다. 칼빈은 그런 명령이 어디 있느냐고 묻는다. 함께 해야 할 일을 혼자 하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다. 그러니 교제를 위해 떡을 떼지 않으면 주의 성찬이 아니라 가짜 흉내다. 하나의 오류는 다른 오류를 낳는다. 교회 곳곳에서 수많은 미사가 생겼고, 떡을 진열해 경배하는 우상숭배도 생겼다. 그리스도의 임재 약속은 아무나 원할 때 그분의 몸을 '만들어 내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명령대로 성찬을 지키는 신자가 그분께 참여하게 하려고 주신 것이다.
- '미사' 어원은 불확실하다
- 성찬은 '나누라'는 명령이다
- '교회 이름으로 혼자 먹음'은 근거 없다
- 교제 없는 떡은 성찬의 가짜 흉내
- 임재 약속은 순종하는 신자에게 주심
📜18.9. 미사는 고대 교회에도 그 전례가 없었음
교회가 더 순수했던 때에는 이런 왜곡이 없었다. 고대 저술가들을 잘 읽어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칼빈은 미사를 옹호하는 학자들에게 묻는다.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신다. 그렇다면 명령도 없고 성경에 한 획의 증거도 없는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어떻게 믿는가? 또 히브리서는 아론처럼 부르심을 받지 않으면 누구도 제사장의 영광을 스스로 취할 수 없다고 한다. 그리스도조차 아버지의 부르심으로 그 직분을 받으셨다. 그들의 사제직은 하나님이 세우셨다는 성경 근거가 없다. 사제 없이는 드릴 수 없다는 그들의 제사도 함께 무너진다.
- 순수했던 고대 교회엔 미사 제사 없었다
- 하나님은 제사보다 순종을 원하신다
- 명령 없는 제사를 기뻐하실 리 없다
- 제사장직은 부르심 없이 취할 수 없다
📜18.10. 교부들의 증거에 근거한 논리를 반박함
누군가 고대 교부들의 글에서 '제사'라는 단어를 뽑아 미사를 변호할 수 있다. 칼빈의 답은 간단하다. 교부들이 '제사'라는 말을 쓴 것은 맞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유일한 제사장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단번에 드린 참 제사를 '기념'하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히브리인은 짐승 제사로 장차 올 그리스도의 제사를 예언했고, 그리스도인은 이미 드려진 제사를 기념한다고 했다. 칼빈이 저자 미상이라고 한 『베드로 집사에게 보내는 신앙론』도 지금의 떡과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고 감사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삼위일체론』에서 제사의 네 요소, 곧 누구에게·누가·무엇을·누구를 위해 드리느냐를 말한다. 그리고 그리스도 한 분이 그 모두라고 결론짓는다. 그는 받으시는 하나님과 하나이시고, 우리와 하나가 되셨으며, 드리는 분이자 드려진 제물이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감독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라고 하는 것은 적그리스도의 목소리라고까지 말했다.
- 교부의 '제사'는 기념과 감사의 뜻
- 아우구스티누스: 히브리인은 예언, 우리는 기념
- 그리스도는 드리는 분이자 제물이다
- 사제를 중보자라 하는 것은 거부된다
📜18.11. 성찬과 관련한 고대 교부들의 오류
칼빈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제사가 우리 눈앞에 펼쳐지듯 보인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 눈앞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힌 모습이 밝히 보였다고 한 것과 같다. 그러나 고대 교부들도 주님의 제정과 맞지 않게 이 기념을 오해한 면이 있다. 그들의 성찬에는 제사를 반복하거나 새롭게 하는 듯한 모습이 어느 정도 보인다. 칼빈은 그들이 성찬 전체에 대해 경건하고 바른 생각을 가졌고 그리스도의 유일한 제사를 깎아내릴 뜻이 없었으니, 그들을 불경하다고 정죄하지는 않겠다고 한다. 하지만 복음이 허락하는 것보다 유대인의 제사 관념에 지나치게 기운 것은 비판받을 만하다. 그러니 가장 안전한 길은 하나님의 단순한 명령에 기대는 것이다.
- 성찬은 십자가를 눈앞에 보여 준다
- 교부들도 제사 관념에 지나치게 기울었다
- 그들의 의도는 정통적이었다
- 그래서 정죄하지 않고 비판만 한다
- 가장 안전한 길은 단순한 명령이다
성찬을 제사와 연관짓는 사고와 "제사"의 성경적 용례, 미사는 참람한 것임. 12-18
📜18.12. 구약의 제사와 신약의 성찬의 차이
모세의 제사와 주님이 세우신 성찬은 다르다. 모세의 제사도 지금의 성찬처럼 그리스도의 죽음의 효력을 보여 주었지만 방식이 달랐다. 레위인 제사장들이 그리스도의 제사를 미리 보여 주도록 세워졌고, 그리스도 대신 짐승을 바쳤으며, 제단이 있었다. 모두 장차 드려질 속죄 제사를 미리 보여 주는 그림이었다. 그리스도의 제사가 이루어진 뒤 주님은 다른 방법을 세우셨다. 제물 바치는 제단 대신 함께 먹는 식탁을 주셨다. 제사 드리는 제사장 대신 잔치를 나누어 줄 사역자를 세우셨다. 신비가 높을수록 더 경건하게 대해야 하고, 그러려면 사람의 상상을 버리고 성경만 붙들어야 한다. 바울도 고린도 교회의 혼란을 바로잡을 때 주님의 제정으로 곧장 돌아갔다.
- 구약 제사는 장차 올 제사의 그림
- 신약은 제단이 아니라 식탁이다
- 제사장이 아니라 나누는 사역자다
- 성찬은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다
- 혼란이 생기면 제정의 말씀으로 돌아간다
📜18.13. "제사"의 의미와 그 두 가지 종류
칼빈은 '제사'와 '제사장'이라는 말로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뜻을 정리한다. 모든 예식과 종교 행위를 다 '제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지만 근거가 없다. 성경에서 '제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것 전반을 가리키므로 구분이 필요하다. 모세 율법의 제사를 기준으로 보면 두 종류로 나뉜다. 하나는 죄책을 하나님 앞에서 갚는 '속죄 제사'다. 다른 하나는 간구·감사·경건의 표현으로 드리는 예배 제사다(번제, 전제, 예물, 첫 열매, 화목제). 칼빈은 앞의 것을 '속죄와 화목의 제사', 뒤의 것을 '찬양과 경외의 제사' 또는 '감사의 제사'라 부르기로 한다. 구약의 속죄 제물은 그 자체에 힘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참 제사를 미리 보여 주었기에 그렇게 불렸다. 그 참 제사는 단 한 번 드려졌고 효력이 영원하다. 그리스도의 “다 이루었다”는 아버지의 사랑 회복, 죄 사함, 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이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니 또 다른 속죄 제물이 설 자리는 없다.
- '제사'를 모든 예식으로 넓힐 근거 없다
- 두 종류: 속죄 제사와 감사 제사
- 구약 속죄 제물은 그리스도의 그림자
- 참 속죄 제사는 단 한 번, 영원한 효력
- 이제 다른 속죄 제물이 설 자리는 없다
📜18.14. 미사를 파는 불경한 자들
제사를 다시 드려 죄 사함과 의를 얻으려는 생각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십자가를 대적하는 가장 큰 모독이다. 미사는 바로 '새로 드린 제사의 공로로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한 걸음 더 나가 그 제사를 특정인에게, 돈을 내는 사람에게 적용할 수 있다고 한다. 칼빈은 이들을 유다에 빗댄다. 유다는 그리스도를 은 삼십에 팔았고, 이들은 프랑스 돈으로 동전 삼십에 판다. 게다가 유다는 한 번 팔았지만 이들은 살 사람이 나올 때마다 판다. 칼빈은 그들을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속죄를 얻는 제사장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신약은 그리스도가 유일한 제사장이며 모든 제사장직이 그분께 넘어가 끝났다고 말한다. 설령 그 말이 없다 해도, 부르심 없이는 누구도 그 영광을 취할 수 없다는 원리는 여전히 서 있다.
- 다시 드려 죄 사함을 얻으려는 것은 모독
- 돈 받고 미사를 적용하는 것은 장사
- 유다는 한 번, 이들은 살 사람마다 판다
- 제사장직은 그리스도께서 끝내셨다
- 부르심 없이 제사장이 될 수 없다
📜18.15. 제사의 허구성에 대한 플라톤의 진술
플라톤은 『국가』 2권에서 속죄 제사로 신들 앞에서 잘못을 가리고, 그 뒤에도 마음대로 죄를 짓는 사람들의 어리석은 안심을 비웃는다. 칼빈은 미사로 속죄한다는 생각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고 본다.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고, 가난한 사람을 짓누르고, 속임수로 남의 재산을 빼앗는 것이 악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이 이런 일을 반복하며 용서받을 것처럼 안심한다. 칼빈은 미사로 하나님께 값을 치러 드린다는 생각, 미사가 하나님과의 문제를 손쉽게 정리해 준다는 생각이 그들을 부추긴다고 진단한다. 플라톤은 제사가 지하 세계의 형벌을 대신 갚아 준다고 믿는 사람들도 비웃었다. 오늘날 해마다 드리는 기념 미사와 많은 미사의 목적이 연옥 불을 피하려는 값 치르기와 무엇이 다르냐고 칼빈은 묻는다.
- 이교 철학자도 '제사로 죄 덮기'를 비웃었다
- 미사가 '죄의 면허증'이 되었다
- 악행 반복 후 미사로 정산하려는 심리
- 연옥을 피하려는 값 치르기와 같다
📜18.16. "감사의 제사"
두 번째 종류인 감사의 제사에는 모든 사랑의 의무가 들어간다. 형제를 사랑으로 섬기면 그 지체를 통해 주님을 높이는 것이다. 기도와 찬송과 감사, 곧 예배하며 하는 모든 일도 여기 속한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몸과 영혼을 거룩한 성전으로 드리는 더 큰 제사에 달려 있다. 겉 행동만이 아니라 먼저 우리 자신을, 그다음 우리의 모든 것을 드려야 한다. 이 제사는 진노를 누그러뜨리거나 죄 사함과 의를 얻는 것과는 상관이 없다. 오직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다. 이미 다른 길(그리스도)로 화목되고 죄 씻음 받은 사람이 드릴 때에만 하나님이 기뻐 받으신다. 이 제사는 교회에 꼭 필요하고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한 계속된다. 말라기 1:11도 이런 뜻이다. 바울은 몸을 산 제물로 드리라고 하며 이것이 '영적 예배'라고 한다. 짐승을 바친 율법의 제사와 대비하는 말이다. 선을 행하고 나누는 것, 빌립보 교인들이 보낸 후원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다.
- 감사 제사 = 사랑·기도·찬송·감사
- 바탕은 나 자신을 드리는 것
- 죄 사함을 얻는 제사가 아니다
- 이미 화목된 사람이 드려야 받으신다
- 선행과 나눔도 영적 제사다
📜18.17. "감사의 제사"에 대한 성경적 증거
이 표현은 성경에 아주 많다. 율법 아래 있던 때에도 선지자들은 짐승 제사 속에 교회와 유대인 모두에게 해당하는 진리가 있다고 밝혔다. 다윗은 기도가 향처럼 올라가기를 구했다. 호세아는 감사를 '입술의 열매'라 불렀다. 다윗은 그것을 '감사의 제사'라 했고, 히브리서는 '찬송의 제사,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했다. 성찬에는 이 제사가 빠질 수 없다. 우리는 성찬에서 주의 죽음을 선포하고 감사하는데, 그것이 곧 찬송의 제사다. 이 제사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이 '왕 같은 제사장'이라 불린다. 다만 우리는 중보자 없이 하나님 앞에 서지 않는다. 그리스도가 하늘 성소에 들어가 길을 여신 대제사장이시고, 우리 예물을 올려놓는 제단이시다. 우리를 아버지 앞에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도 그리스도다.
- 기도·감사는 구약부터 '제사'로 불렸다
- 성찬 자체가 찬송의 제사를 포함한다
- 모든 신자가 '왕 같은 제사장'이다
- 그러나 늘 중보자 그리스도를 통해서다
- 그리스도가 우리 예물의 제단이시다
📜18.18. 미사 그 자체가 불경임
칼빈은 미사의 가증함은 눈먼 사람도 보고 어린아이도 알 만하다고 말한다. 미사는 금잔에 담아 왕과 백성을 모두 취하게 했고, 그들은 구원의 배를 죽음의 소용돌이로 몰아갔다. 사탄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무너뜨리려고 쓴 무기 중 이보다 강한 것은 없었다. 칼빈은 미사를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된 '헬레네'에 빗댄다. 진리의 원수들이 미사를 지키려고 그토록 맹렬하게 싸운다는 뜻이다. 칼빈은 미사로 돈 버는 일, 탐욕, 성직자의 부패 같은 부수적인 악은 일부러 다루지 않겠다고 한다. 그런 것을 다 걷어 내고 가장 깨끗한 모습의 미사만 놓고 봐도 그 안에 불경과 신성모독과 우상숭배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 미사는 사탄의 가장 강한 무기였다
- '헬레네': 목숨 걸고 지키는 대상
- 돈·부패 같은 부수 문제는 논외
- 가장 깨끗한 미사도 본질이 문제다
17, 18장의 결론: 성례는 세례와 성찬밖에 없음. 19-20
📜18.19. 세례와 성찬만이 성례임
이제 두 성례에 대해 알아야 할 거의 모든 것을 정리했다. 세례는 교회에 들어가는 입문이고, 성찬은 그리스도가 자기 가족을 계속 먹이시는 양식이다. 하나님도 믿음도 그리스도도 교회도 하나이듯 세례도 하나이므로 반복하지 않는다. 성찬은 반복해서 나누며,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계속 그리스도로 양식을 얻는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하나님이 세우신 성례는 이 둘뿐이고, 사람은 새 성례를 만들 수 없다.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과 선한 뜻을 증언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조언자가 되어 그분의 뜻을 대신 약속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구원의 약속이 없는 성례는 있을 수 없고, 모든 사람이 모여도 구원을 약속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람이 성례를 만들 수는 없다.
- 세례는 입문, 성찬은 계속되는 양식
- 세례는 한 번, 성찬은 반복한다
- 성례는 하나님의 약속을 증언하는 것
- 하나님만 약속할 수 있으니 하나님만 세운다
- 그래서 사람이 성례를 만들 수 없다
📜18.20. 두 가지 성례 외에는 성례가 없음
그러므로 교회는 두 성례로 만족해야 하고, 셋째 성례를 받아들이지 말며, 세상 끝날까지 다른 성례를 기대하지도 말아야 한다. 유대인에게는 형편에 따라 만나, 반석의 물, 놋뱀 같은 특별한 성례들이 주어졌다. 그것들은 이 지나가는 그림에 머물지 말고 더 나은 것을 기다리라는 표시였다. 우리는 다르다. 그리스도가 이미 오셨고, 그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있다. 여기에 무언가를 더 바라는 것은 하나님을 노엽게 하는 일이다. 그래서 성경은 지금을 '마지막 때'라 부르며, 새로운 계시를 기다리다 속지 않게 한다. 사람이 새 성례를 만들 수 없듯이, 하나님의 성례에 사람의 요소를 섞어서도 안 된다. 포도주에 물을 타면 묽어지고 반죽에 누룩이 조금만 들어가도 전체가 시어지듯 말이다. 그런데 지금 성례들은 행렬과 의식과 연극으로 덮이고, 정작 말씀은 빠졌다. 세례는 세례 자체가 잘 보이지 않고, 성찬은 미사로 바뀌어 일 년에 한 번 그것도 찢긴 모습으로만 남았다.
- 교회는 두 성례로 만족한다
- 구약의 특별 성례는 앞을 가리키는 그림
- 그리스도 안에 모든 보화가 있다
- 지금은 '마지막 때', 새 계시는 없다
- 하나님 성례에 사람의 것을 섞지 않는다
⚖️오해와 반론
| 입장 | 주장 | 칼빈의 답 | 근거 구절 |
|---|---|---|---|
| 로마 교회(병존설, 토마스 아퀴나스로 알려짐) | 떡이 몸이면 영혼과 신성도 함께 있으니 떡 앞에서 경배해야 한다 | 성경에 경배 명령이 없다. 명령은 '먹고 마시라'다. 하늘의 그리스도를 영으로 경배하라 | 마태복음 26:26-27, 골로새서 3:1-2 마태복음 26:26-27 26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27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골로새서 3:1-2 1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2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
| 로마 교회(성체 행렬) | “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약속이 근거다 | 약속은 '먹으라'는 명령과 한 묶음이다. 명령을 버리면 약속도 없다 | 시편 50:15, 마태복음 26:26 시편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마태복음 26: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
| 로마 교회(사제의 의도·축성 공식) | 사제가 의도하고 축성하면 효력이 생긴다 | 약속은 떡이 아니라 받는 사람에게 주신 것이다. 성찬의 말씀은 주문이 아니라 설교다 | 마태복음 26:26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받아서 먹으라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
| 병자용 성찬물 보관 지지자 | 고대 교회도 보관해 병자에게 주었다 | 말씀 없이 받으면 무익하다. 목사가 직접 설명하고 나누어야 한다. 관습보다 진리가 안전하다 | (장절 미상) |
| 로마 교회('은혜의 상태' 교리) | 죄 없이 깨끗해야 합당하고, 통회·고백·보속으로 그 상태에 이른다 | 그 기준이면 아무도 못 온다. 두려운 양심에 아무 위로가 없다 | 고린도전서 11:29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
| 완전주의 기준 | 합당함은 믿음과 사랑이지만 완전해야 한다 | 성찬은 약한 자를 일으키려고 세운 것이다. 불완전해도 향해 가는 믿음과 사랑이면 된다 | 고린도전서 11:28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
| 연 1회 성찬 관례 | 일 년에 한 번 받으면 의무를 다한 것이다 | 신자를 게으르게 만든다. 최소 매주 시행하고, 강요 대신 강권하라 | 사도행전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
| 로마 교회(평신도 잔 금지) | 쏟을 위험이 있고, 병존설로 떡에 피도 있다 | 주님은 '다 마시라' 명하셨다. 떡과 잔의 이중 보증을 빼앗지 말라 | 마태복음 26:27, 고린도전서 11:25 마태복음 26:27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고린도전서 11:25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
| 로마 교회(잔은 사제에게만) | 한 번의 행동일 뿐이고, 잔은 사제인 사도에게만 주셨다 | 명령이다. 성경은 열둘을 제사장이라 하지 않았고, 천 년간 모두가 받았다. 바울도 모두에게 전했다 | 마태복음 26:20, 마가복음 14:23, 고린도전서 11:23, 고린도전서 11:26 마태복음 26:20 저물 때에 예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앉으셨더니 마가복음 14:23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 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고린도전서 11:23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고린도전서 11:26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
| 로마 교회(미사 = 속죄 제사) | 미사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죄를 갚는 화목 제사다 | 그리스도는 단번에 영원한 제사를 드리셨다. 더 드릴 제사는 없다 | 히브리서 9:26, 히브리서 10:14, 히브리서 10:18 히브리서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브리서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히브리서 10:18 이것들을 사하셨은즉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 드릴 것이 없느니라 |
| 로마 교회(사제 = 그리스도의 보좌) | 사제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지 않고 돕는다 | 죽음 때문에 제사장이 여럿이었다. 죽지 않는 분께 도우미는 필요 없다 | 히브리서 7:23 제사장 된 그들의 수효가 많은 것은 죽음으로 말미암아 항상 있지 못함이로되 |
| 로마 교회(멜기세덱 예표) | 멜기세덱의 떡·포도주가 미사의 예표다 | 지친 아브라함을 먹인 것이다. 제사장 직무는 축복이었다 | 창세기 14:18-19, 히브리서 7:7 창세기 14:18-19 18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히브리서 7:7 논란의 여지 없이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서 축복을 받느니라 |
| 로마 교회(반복·적용 논리) | 다른 제사가 아니라 같은 제사의 반복, 혹은 적용이다 | 히브리서는 반복을 부정한다. 적용은 복음 선포와 성찬으로 한다 | 히브리서 10:14, 고린도전서 5:7-8 히브리서 10:14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5:7-8 7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8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
| 로마 교회(말라기 예언) | 각처의 깨끗한 제물 = 미사 | 선지자는 미래의 영적 예배를 옛 그림으로 그렸다. 깨끗한 제물은 감사 제사다 | 말라기 1:11, 이사야 19:19-24 말라기 1:1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 이사야 19:19-24 19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20이것이 애굽 땅에서 만군의 여호와를 위하여 징조와 증거가 되리니 이는 그들이 그 압박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부르짖겠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한 구원자이자 보호자를 보내사 그들을 건지실 것임이라 21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 날에 애굽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22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지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이므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들의 간구함을 들으시고 그들을 고쳐 주시리라 23그 날에 애굽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대로가 있어 앗수르 사람은 애굽으로 가겠고 애굽 사람은 앗수르로 갈 것이며 애굽 사람이 앗수르 사람과 함께 경배하리라 24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 및 앗수르와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
| 로마 교회('피 없는 제사') | 미사는 피 없이 드리니 그리스도를 다시 죽이는 것이 아니다 | 의도가 아니라 결론이 문제다. 피 흘림 없이는 죄 사함이 없다 | 히브리서 9:22, 히브리서 9:25-26 히브리서 9:22 율법을 따라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하게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9:25-26 25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26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
| 로마 교회(사적 미사) | 사제 한 사람이 교회 전체의 이름으로 먹는다 | 그런 명령이 없다. 함께 나누지 않으면 성찬이 아니라 흉내다 | 누가복음 22:17, 고린도전서 10:16 누가복음 22:17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 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갖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고린도전서 10: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
| 교부 인용 옹호론 | 교부들도 성찬을 '제사'라 불렀다 | 교부들의 '제사'는 단번의 제사를 기념하고 감사하는 뜻이다. 그들의 지나친 제사 관념은 비판받을 만하다 | 갈라디아서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
| 일곱 성례론(로마 교회) | 세례·성찬 외에도 성례가 있다 | 성례는 하나님만 약속하실 수 있으니 하나님만 세우신다. 하나님이 세우신 것은 둘이다 | 이사야 40:13, 로마서 11:34, 골로새서 2:3 이사야 40:13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로마서 11:34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골로새서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 |
📖용어
💬청년의 삶으로
- 지난주에 지은 죄가 걸려서 성찬 때 손이 안 나가요. → 성찬은 병자의 약이고 죄인의 위로다. 합당함은 완벽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믿음이다(42절).
- 교회 안에 껄끄러운 사람이 있는데 성찬 받아도 될까요? → 한 떡을 먹는 우리는 한 몸이다. 성찬은 미움을 그대로 두라는 허락이 아니라 화해로 가라는 부름이다. 먹기 전에 자신을 살펴라(38·40절).
- 헌금이나 봉사로 하나님께 '점수'를 따려는 마음이 들어요. → 죄 사함은 그리스도가 단번에 끝내셨다. 우리가 드리는 것은 값 치르기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 제사다(18장 7·16절).
- 회사에서 동료를 돕는 일도 신앙과 관련이 있나요? → 선을 행하고 나누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다. 예배당 밖의 사랑도 '영적 예배'다(18장 16절, 히브리서 13:16).
- 성찬이 일 년에 몇 번 안 되니 그냥 행사 같아요. → 칼빈은 성찬을 자주 받아야 믿음과 감사와 사랑이 자란다고 보았다. 연례 행사로 의무를 채웠다고 여기는 태도를 경계했다(44·46절).
✅이 편의 결론
- 성찬은 경배할 물건이 아니라 '받아서 먹고 마시라'는 명령과 약속이다.
- 성찬의 세 가지 용도는 믿음을 세우고, 공개적으로 고백하고, 서로 사랑하게 하는 것이다. 이 모두에 말씀이 꼭 필요하다.
- 성찬의 '합당함'은 완벽함이 아니라 그리스도만 의지하는 믿음과 자라 가는 사랑이다. 그래서 자주, 모두가, 떡과 잔을 다 받아야 한다.
- 그리스도는 단번에 영원한 속죄 제사를 드리셨다. 우리가 드리는 것은 감사의 제사뿐이다.
- 하나님이 세우신 성례는 세례와 성찬 둘뿐이고, 사람이 성례를 만들거나 섞어서는 안 된다.
빛다방 학습 노트 · 존 칼빈 『기독교강요』(생명의말씀사)의 논증 구조를 우리 말로 정리한 것입니다(원문 미전재). 성경 장절은 개역개정 기준입니다. youtube.com/@빛다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