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면서도 불안하고 의심이 드는데, 이런 나도 진짜 믿는 사람일까?
칼빈은 앞(3권 2장 7절)에서 믿음을 이렇게 정의했다. 믿음은 하나님이 나에게 호의를 품고 계심을 확실히 아는 것이다. 이 앎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에 근거하고, 성령께서 마음에 보여 주시고 새겨 주신다. 이 편은 그 정의를 한 마디씩 풀어 간다. 먼저 '확실하다'가 '의심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 아님을 밝힌다. 신자는 평생 불신앙과 싸우지만 그 싸움에서 끝내 지지 않는다(16-28절). 이어서 믿음이 서는 땅은 내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거저 주신 약속이고(29-32절), 그 약속을 머리와 마음에 심으시는 분은 성령이라고 말한다(33-37절). 그다음 "은혜는 짐작만 할 수 있다", "끝까지 견딜지는 모른다"는 스콜라 신학의 주장을 반박한다(38-40절). 마지막으로 믿음이 사랑과 소망을 낳고 소망이 믿음을 지탱한다는 관계로 마무리한다(41-43절).
1. 절별 정리
믿음의 확실성과 두려움. 16-28
16. 믿음의 확실성
믿음의 핵심은 하나님의 긍휼의 약속을 '남의 이야기'로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여기서 확신이 생긴다. 바울은 이 확신, 또는 확신에서 나오는 상태를 '화평'이라 부른다. 확신은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양심을 잠잠하게 한다. 확신이 없으면 양심은 두려움에 찢기거나, 잠시 하나님을 잊고 잠든 것처럼 지내다가 곧 심판의 기억에 다시 찔린다. 그래서 칼빈은 참 신자를 이렇게 그린다. 하나님을 자비로운 아버지로 굳게 믿고, 그분의 약속에 기대어 구원을 의심 없이 기대하는 사람이다. 칼빈은 히브리서·로마서·에베소서가 모두 이 확신 없이는 소망도 깨달음도 없다고 가르친다는 점을 근거로 든다.
- 믿음은 약속을 '내 것'으로 받는 것
- 확신은 하나님 앞에 선 양심의 평화
- 확신이 없으면 공포 아니면 마비
- 신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는다
- 확신이 마귀와 죽음을 이기게 한다
17. 믿음: 시험과 싸워 이김
칼빈은 먼저 예상되는 반론을 소개한다. 신자들도 실제로는 자주 불안하고 공포에 눌리는데, '확실한 믿음'은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빈의 답은 이렇다. 자신이 말하는 확실성은 의심이 한 점도 없는 상태가 아니다. 신자는 오히려 자기 안의 불신앙과 끊임없이 싸운다. 다만 어떤 환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긍휼에서 얻은 확신을 내던지지는 않는다. 대표적인 예가 다윗이다. 시편에서 그는 낙심한 자기 영혼을 꾸짖고, 주 앞에서 끊어졌다고 말하고, 하나님이 영원히 버리셨느냐고 묻는다. 그래도 그때마다 하나님께로 다시 올라간다. 반대로 아하스 왕은 선지자의 약속을 듣고도 숲이 바람에 흔들리듯 떨기만 했고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았다. 칼빈이 보는 차이는 '흔들렸느냐'가 아니라 '흔들리면서도 하나님께 나아갔느냐'다.
- 확실한 믿음 ≠ 의심 없는 믿음
- 신자는 자기 불신앙과 계속 싸운다
- 다윗도 '버림받았다'고 탄식했다
- 아하스는 약속을 듣고도 떨기만 했다
- 흔들리며 하나님께 가면 이미 반은 승리
18. 신자의 마음속에 있는 갈등
이 싸움을 이해하려면 앞에서 다룬 '육체와 영'의 구분으로 돌아가야 한다. 경건한 사람의 마음 한쪽은 하나님의 선하심에 기뻐하고, 다른 쪽은 자기의 비참함에 아파한다. 약속을 의지하면서도 죄의 증거 앞에서 떨고, 생명을 기대하면서도 죽음 앞에서 전율한다. 칼빈은 이 현상의 원인을 이렇게 설명한다. 이 땅에서는 믿음이 결코 완전해지지 않고, 육체의 잔재 속에 남은 불신앙이 올라와 믿음을 공격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확신과 의심이 섞인 믿음은 결국 희미한 지식으로 되돌아가는가? 칼빈은 아니라고 답한다. 흔들리고 넘어져도 자리에서 쫓겨나지 않으며, 싸움의 끝은 언제나 믿음의 승리다.
- 신자 안에 '육체'와 '영'이 함께 있다
- 기쁨과 두려움이 한 마음에 공존
- 이 땅의 믿음은 늘 불완전하다
- 흔들려도 믿음과 결별하지 않는다
- 싸움의 끝은 믿음의 승리
19. 연약한 믿음이라도 참 믿음임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마음에 들어오면 그때부터 하나님의 평화로운 얼굴을 보기 시작한다. 멀리서 보지만 분명히 보기 때문에 착각이 아니다. 믿음이 자랄수록 하나님을 더 가까이, 더 친밀하게 보게 되고 처음의 무지는 점점 걷힌다. 아직 모르는 부분이 남아 있어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 데는 지장이 없다. 그것이 믿음의 첫째 부분이기 때문이다. 칼빈은 감옥 비유를 든다. 좁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만 받아도 그것은 진짜 햇빛이고 유익하다. 몸에 매여 어둠에 둘러싸인 우리에게도 확신을 얻기에 필요한 만큼은 은혜의 빛이 비친다.
- 작은 믿음도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
- 멀리서 봐도 착각이 아니다
- 믿음은 자라며 더 가까이 본다
- 모르는 게 있어도 그 사랑은 안다
- 감옥 창틈의 햇빛도 진짜 햇빛
20. 믿음의 불완전함과 확실함
바울은 두 가지를 함께 가르친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우리가 부분적으로, 거울로 보듯 희미하게 안다고 말한다. 이 땅의 지식은 작아서 늘 배워야 하고, 무한하신 하나님을 다 담지 못한다. 이것은 개인만이 아니라 교회 전체에 해당한다. 동시에 고린도후서 3장에서는 가리지 않은 얼굴로 주의 영광을 보며 변화된다고 말한다. 아주 작은 믿음이 맛보는 것도 확실하고 참되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의심과 공포가 큰 까닭은 우리 마음이 본래 불신앙으로 기울고 시험이 쉬지 않고 공격하기 때문이다. 특히 죄로 무거워진 양심이 고난에서 하나님의 진노를 읽어 내거나 자기 안에서 진노의 증거를 찾으면, 불신앙은 그것을 무기 삼아 "하나님은 네 원수다, 도움을 바라지 마라"고 몰아간다.
- 지금 우리의 앎은 부분적이고 희미하다
- 그래도 작은 믿음이 보는 것은 참이다
- 마음은 본래 불신앙으로 기운다
- 죄책감이 불신앙의 무기가 된다
- 노림수: 하나님을 원수로 여기게 함
21. 시련을 이기는 믿음의 역사
믿음은 말씀으로 무장해 이 공격을 막는다. "하나님은 네 원수다"라는 시험에는, 하나님은 고난 중에도 긍휼하시며 그 채찍은 진노보다 사랑에서 나온다고 답한다. "하나님은 죄를 갚으신다"는 생각에는, 긍휼에 자기를 맡기는 죄인을 언제든 용서하신다고 답한다. 그 증거로 칼빈은 성도들이 하나님이 안 들으시는 것 같을 때도 부르짖는다는 사실을 든다. 도움을 기대하지 않는 사람은 부르짖지도 않는다. 예수님도 '믿음이 작다'고 책망하신 제자들을 내쫓지 않으셨다. 칼빈의 결론은 이렇다. 불신앙은 신자 안에서 다스리지 못하고 바깥에서 공격할 뿐이다. 믿음은 방패여서 흠집은 나도 꿰뚫리지는 않는다. 그래서 요한일서가 말하는 '세상을 이기는 믿음'은 한두 번이 아니라 수천 번의 공격을 이긴다는 뜻이다(칼빈은 아우구스티누스도 같은 취지로 말했다고 덧붙인다).
- 믿음은 말씀으로 시험에 답한다
- 하나님의 채찍은 사랑에서 나온다
- 부르짖는 것 자체가 믿음의 증거
- 불신앙은 안이 아니라 밖에서 공격
- 방패는 긁혀도 뚫리지 않는다
22. 정당한 두려움
그런데 확신을 흐리지 않고 오히려 굳게 세우는 '두려움과 떨림'도 있다. 불경건한 자에게 내린 진노를 보고 같은 죄를 짓지 않으려 조심할 때, 또는 하나님 없이는 바람보다 덧없는 자신을 보고 하나님께만 기대려 할 때 이 두려움이 생긴다. 바울이 이스라엘이 받은 징벌을 예로 들어 고린도 교인들을 경계한 것도 확신을 깎으려는 것이 아니다. 믿음을 망가뜨리는 육체의 게으름을 깨우려는 것이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말도 우리의 서 있음이 불확실하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 힘을 믿는 교만을 막으려는 말이다. 또 로마서 11장에서 바울은 개인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을 집단으로 비교하며, 이방인 가운데 겉모양만 신자인 위선자도 염두에 두고 있다. 이 경고를 참 신자에게 적용해도 실망할 이유는 없다. 교만을 누르는 일과 양심을 겁주어 긍휼을 믿지 못하게 하는 일은 전혀 다르기 때문이다.
- 확신을 세우는 건강한 두려움이 있다
- 경고는 게으름을 깨우려는 것
- '넘어질까 조심'은 교만을 막는 말
- 로마서 11장은 집단 비교다
- 교만 누르기 ≠ 확신 무너뜨리기
23. "두려움과 떨림"
빌립보서의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자신을 낮추고 주님의 능력을 높이는 습관을 들이라는 뜻이다. 내가 나를 믿지 못하고 내 처지가 위태로움을 깨닫는 것만큼 우리를 주님께 기대게 하는 것은 없다. 시편 5:7은 긍휼을 믿는 담대함과 하나님의 위엄 앞에서 갖는 경외를 한데 묶는다. 잠언 28:14가 늘 경외하는 사람을 복되다고 할 때, 그 두려움도 사람을 무너뜨리는 공포가 아니라 조심하게 하는 두려움이다. 그러면 두려움과 믿음이 어떻게 한 마음에 있을 수 있나? 칼빈은 거꾸로 불경건한 사람을 보라고 한다. 그들은 하나님 생각을 지우고 무감각하게 살려 하지만, 심판이 압박해 오기에 불안도 함께 품고 산다. 마찬가지로 신자 안에도 두려움과 믿음이 함께 있을 수 있다. 빌립보서 2:13이 말하듯, 하나님은 그 두려움을 통해 뜻을 품게 하시고 그것을 행할 힘을 주신다.
- 두려움과 떨림 = 나를 낮추는 습관
- 내 약함을 알수록 주님을 의지한다
- 담대함과 경외는 한 쌍이다
- 조심하게 하는 두려움은 복이다
-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우리를 훈련하신다
24. 소망과 두려움에 관한 거짓된 사상
칼빈은 '유사 교황주의자'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이론을 거부한다. 이들은 스콜라 신학의 노골적인 의심론을 그대로 변호하기 어려워지자 '불신앙이 섞인 확신'이라는 새 이론을 내놓는다. 그리스도를 보면 소망이 생기지만 그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는 나를 보면 두려워지니, 양심은 소망과 두려움 사이를 시계추처럼 오가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이것을 더 교묘해진 사탄의 전략으로 본다. 늘 절망으로 되돌아가는 확신이 무슨 확신이냐는 것이다. 또 이 이론은 그리스도를 우리 밖 먼 곳에 계신 분으로 만든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우리를 자기 몸에 접붙여 그분의 은혜뿐 아니라 그분 자신에게 참여하게 하신다. 그래서 칼빈은 그들의 말을 뒤집는다. 나만 보면 정죄뿐인 것은 맞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자기 것을 다 우리 것으로 주셨으니 그분의 의가 우리 죄를 압도하고 그분의 구원이 정죄를 삼킨다. 그렇다고 시험의 어둠 속에서 믿음이 가려질 때가 있다는 앞의 말을 취소하는 것은 아니다.
- '그리스도 보면 소망, 나 보면 공포' 거부
- 그리스도는 멀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
- 우리는 그분 몸에 접붙여진 지체
- 그분의 의가 우리 죄를 압도한다
- 그리스도와 나를 떼어 생각하지 말 것
25. 믿음의 두 가지 면에 대한 베르나르의 논지
칼빈은 앞 절과 같은 생각을 담은 글로 클레르보의 베르나르(12세기 수도원 지도자)의 설교(교회당 봉헌 때의 다섯 번째 설교)를 길게 인용한다. 베르나르는 영혼을 두 면으로 본다. 영혼 그 자체로 보면 죄와 어둠과 정욕으로 가득해 '무(無)'에 가깝고, 의로운 행위조차 더러운 옷 같다. 그러나 하나님이 마음을 쏟으시는 존재가 어떻게 완전히 '무'일 수 있는가. 우리 자신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의 마음속에는 '보물'로 들어 있다. 하나님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부르시는 분이고, 그것은 우리 행위 덕분이 아니라 부르시는 분 덕분이다. 그래서 이 두 생각을 함께 가지면 자기 자랑은 꺾이고 주님을 자랑하는 마음은 오히려 커진다.
- 나 자체로는 '무'에 가깝다
- 그러나 하나님 마음속엔 보물이다
- 없는 것을 있게 부르시는 하나님
- 내 행위가 아니라 부르심 덕분
- 자랑은 내가 아니라 주님께
26.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하나님을 공경함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함'을 지혜의 근본, 또는 지혜 그 자체라고 부른다. 칼빈은 이 경외가 하나이지만 두 겹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면서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말라기 1:6에서 하나님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드리는 '공경'과 종이 주인에게 드리는 '두려움'을 구분하시면서도 둘을 함께 요구하신다. 그러므로 경외는 공경과 두려움이 하나로 뭉친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아버지신지 아는 사람은 지옥이 없다 해도 그분을 거스르는 것을 죽음보다 싫어한다. 그러나 우리 육체는 거리낌 없이 죄짓고 싶어 하므로, 불의를 미워하시고 벌하시는 주님 아래 산다는 생각도 함께 필요하다.
- 경외는 지혜의 출발점
- 하나님은 아버지이자 주인이시다
- 아들의 공경 + 종의 두려움
- 지옥이 없어도 실망시키기 싫은 마음
- 육체를 막으려면 심판의 두려움도 필요
27. 신자들의 두려움과 불신자들의 두려움
요한일서 4:18은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고 말한다. 칼빈은 이 말씀이 신자의 경외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답한다. 요한이 말하는 두려움은 불신앙에서 나오는 전혀 다른 두려움이기 때문이다. 악인은 하나님을 불쾌하시게 할까 봐서가 아니라 벌을 받을까 봐 떤다. 벌만 없다면 하나님의 마음은 상관하지 않는다. 신자는 벌보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 자체를 두려워한다. 벌이 목을 조르듯 무서워하지는 않지만, 오히려 벌받을 일을 더 조심한다. 에베소서 5:6에서 바울도 신자를 위협하지 않고, 불순종하는 자에게 임하는 진노를 보고 조심하라고 할 뿐이다. 악인은 경고로는 깨지 않다가 매를 맞고서야 억지로 두려워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노예의 두려움'이라 부르며 자녀의 자발적인 두려움과 대조하고, 어떤 이들은 둘 사이에 '중간 두려움'을 두기도 한다(칼빈은 소개만 한다).
- 요한일서 4:18의 두려움은 다른 것
- 악인은 벌이 무서워 떤다
- 신자는 하나님을 거스름이 두렵다
- 경고는 위협이 아니라 조심시킴
- 노예의 두려움 vs 자녀의 두려움
28.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보장함
믿음은 하나님의 자비를 바라보며, 거기에는 구원과 영생을 얻는 것이 포함된다. 하나님이 우리와 화목하셨다면 위험은 이미 지나갔고 모든 좋은 것이 온다. 그러나 '좋은 것'이 무엇인지는 말씀이 정한다. 믿음은 장수나 명예나 부를 약속하지 않는다. 아무리 초라해도 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확신으로 만족한다. 믿음의 주된 확신은 장차 올 삶에 있다. 그래서 모든 일이 원하는 대로 되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하면 그 행복은 저주받은 행복이다. 반대로 하나님이 아버지로 얼굴을 비추시면 불행도 구원에 유익하니 복이 된다. 바울이 고난의 목록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음을 자랑하고, 다윗이 어두운 골짜기에서 '주께서 함께하심'으로 두려움에 맞선 것이 그 예다.
- 하나님과의 화목 = 구원의 총체
- '좋은 것'의 기준은 말씀
- 믿음은 장수·부귀를 약속하지 않는다
- 주된 확신은 장차 올 삶에 있다
- 은혜 없는 성공은 저주받은 행복
믿음의 기초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에 대한 값없는 약속임. 29-32
29.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약속이 믿음을 지탱함
믿음의 기반은 값없이 주신 약속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명령하시든 금하시든 경고하시든 그분이 진실하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명령에 순종하고 경고를 마음에 새긴다. 그러나 믿음은 약속에서 시작해 약속 위에 서고 약속에서 완성된다. 생명은 명령이나 형벌 선언이 아니라 긍휼의 약속, 그것도 값없는 약속에서만 찾을 수 있다. 조건이 붙은 약속은 결국 '네가 지켰느냐'를 물으며 우리를 우리 행위로 돌려보내므로 확신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믿음의 말씀'이라 부르고, 복음이 '화목하게 하는 직분'이기에 믿음과 복음을 늘 연결한다. 이것은 신자가 말씀 전체를 받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믿음이 고유하게 향하는 과녁이 긍휼의 약속이라는 뜻이다.
- 믿음의 기반 = 값없는 약속
- 명령·경고도 믿지만 생명은 약속에
- 조건적 약속은 행위로 되돌려 보낸다
- 복음은 믿음의 말씀, 화목의 직분
- 하나님은 심판자이자 자비로우신 분
30.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에 근거함
칼빈과 논쟁한 로마 가톨릭 신학자 피기우스 같은 이들은, 믿음을 약속에만 묶는 것은 믿음을 조각내는 일이라고 공격한다. 칼빈은 그들의 전제 일부를 인정한다. 하나님이 경고하시든 약속하시든 그분의 진실하심이 믿음의 공통 대상이라는 점이다. 노아가 아직 보이지 않던 심판을 두려워한 것도 믿음에서 나왔다. 그러나 칼빈은 말씀 전체를 믿는다는 것을 부인한 적이 없다며, 두 가지를 분명히 한다. 첫째, 값없는 약속에 이르기 전에는 믿음이 굳게 서지 못한다. 둘째, 믿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지 않으면 하나님과 화목할 길이 없다. 명령이 의롭고 경고가 참되다고 믿는다고 신자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가 찾는 것은 신자와 불신자를 가르는 '구원 얻는 믿음'이기 때문이다.
- 말씀 전체가 믿음의 대상인 건 맞다
- 노아의 두려움도 믿음에서 나왔다
- 구원하는 믿음은 약속 위에 선다
- 믿음은 그리스도와 연합시킨다
- 경고만 믿는 건 신자의 표지가 아니다
31. 믿음과 하나님의 말씀
뿌리가 있어야 열매가 있듯, 말씀이 있어야 믿음이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사람의 상상에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이 스스로 선하심을 증언하실 때 생긴다. 또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약속하신 분이 그것을 이루실 능력도 있다고 확신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무엇이든 하실 수 있다고 고백하면서도 작은 시험에 무너지는데, 이는 사탄의 위협을 더 믿는다는 증거다. 그래서 이사야는 죄 사함을 말하면서 창조와 섭리의 능력을 길게 노래하고, 시편 기자는 과거에 베푸신 일을 기억하며 믿음을 다잡는다. 끝으로 칼빈은 사라(하갈을 남편에게 줌), 리브가(속임수로 야곱이 축복받게 함), 이삭(에서에게 기운 마음)의 예를 든다. 이들의 행동은 말씀의 선을 넘은 잘못이었지만 그 밑에 믿음이 없지는 않았다. 믿음에도 오류가 섞일 수 있으나 참 믿음은 결국 이기며, 이 사례들은 말씀의 뒷받침이 없으면 믿음이 길을 잃는다는 경고이기도 하다.
- 말씀 없이는 믿음도 없다
-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한다
- 과거의 은혜를 기억하며 다잡는다
- 사라·리브가: 믿음에도 오류가 섞인다
- 말씀 밖의 열심은 믿음을 흔든다
32.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 포함됨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 담겨 있다. 하나님의 약속은 모두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기 때문이다. 약속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보여 주는 증거다. 악인은 받은 은혜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알아보지 못해 오히려 더 무거운 심판을 쌓지만, 약속의 본질은 사람의 불신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도 하나님께 사랑받지 못한다. 그리스도는 사랑하시는 아들이시고,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을 통해 우리에게 흘러온다. 그러니 어떤 약속을 받든 눈을 그리스도께 돌려야 한다. 예상되는 반론도 있다. 나아만, 고넬료, 에티오피아 내시는 그리스도를 거의 몰랐는데도 경건을 인정받지 않았는가? 칼빈은 그들의 믿음이 부분적으로 어두웠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를 희미하게라도 배웠을 것이라고 답한다. 율법대로 드린 제사의 목적 자체가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
- 약속은 하나님 사랑의 증거
- 그리스도 밖에서는 사랑받지 못한다
- 약속 앞에서 눈을 그리스도께
- 나아만·고넬료도 희미하게는 알았다
성령께서 믿음을 우리 마음속에 드러내심. 33-37
33. 성령의 역사하심과 믿음
우리 마음이 어둡고 악하지 않았다면 말씀이라는 바깥 증거만으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나 마음은 헛된 것에 끌리고 진리 앞에서 눈멀어 있다. 그래서 성령께서 비추시지 않으면 말씀은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믿음은 사람의 이해를 넘어서며, 성령께서 마음을 비추시는 동시에 굳세게 하셔야 한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믿음을 지식에 대한 '동의'로만 보고 마음의 신뢰와 확신을 빼 버려 길을 잃었다. 믿음은 두 겹의 선물이다. 마음을 깨끗하게 해 진리를 맛보게 하고, 그 진리 위에 굳게 세운다. 갈라디아서 3:2('들은 믿음으로 성령을 받음')는 성령이 믿음의 원인이라는 말과 부딪치는 것 같다. 칼빈은 성령의 은사가 여럿이고, 믿음이 그 뒤의 은사들을 받도록 준비시키므로 모순이 아니라고 답한다.
- 말씀만으로 부족한 건 우리의 눈멂 탓
- 성령은 비추시고 굳세게 하신다
- 믿음은 단순한 동의가 아니다
- 성령은 믿음을 시작하고 키우신다
- 갈라디아서 3:2는 다른 은사 이야기
34. 성령의 역사하심의 필수성
사람의 속은 그 사람의 영만 안다면, 하나님의 뜻은 누가 확실히 알겠는가. 눈에 보이는 일에서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못 믿는 우리가,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약속을 굳게 믿을 수는 없다. 그래서 주님의 학교에서 첫 과정은 인간의 분별력을 내려놓는 것이다. 그것이 수건처럼 우리를 덮어, 어린아이들에게 보이시는 하나님의 비밀에 이르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고백도 혈육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알게 하신 것이고, 육에 속한 사람은 성령의 일을 어리석게 여긴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 아시며, 아버지께서 이끄셔야 그리스도께 올 수 있다. 엠마오 길의 제자들은 그리스도가 마음을 여시자 성경을 깨달았고, 사도들도 진리의 영이 오셔서야 들었던 가르침이 마음에 새겨졌다. 말씀은 해처럼 모두에게 비치지만, 본래 눈먼 우리에게는 성령이 마음속 스승이 되셔야 들어온다.
- 하나님의 뜻은 성령만 아신다
- 인간 분별력을 내려놓는 게 첫걸음
- 아버지가 이끄셔야 그리스도께 간다
- 성령이 새 눈을 주신다
- 성령은 마음 안의 스승
35. 성령이 없이는 믿음이 불가능함
믿음이 사람의 본성에 얼마나 맞지 않는지는 인간 본성의 부패를 다룬 앞부분(2권)에서 자세히 말했으므로 칼빈은 반복하지 않는다. 여기서는 몇 가지만 짚는다. 바울은 성령이 주시는 믿음을 '믿음의 마음'이라 부르고, 믿음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역사'라 부른다. 고린도전서 2:4-5의 '성령의 능력'은 직접적으로는 기적을 가리킨다. 그러나 악인은 기적을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므로, 칼빈은 여기에 성령의 내적 인침도 들어 있다고 본다. 하나님은 이 선물을 모두에게 똑같이가 아니라 원하시는 사람에게 특별히 주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같은 말씀을 듣고 한 사람은 멸시하고 한 사람은 일어서는데, 멸시한 사람은 자기 탓이고 일어선 사람은 자기 공으로 여기면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왜 그런지는 헤아릴 수 없는 깊은 신비라고 고백했다. 칼빈의 정리는 이렇다.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우리를 비춰 믿게 하시고, 자기 몸에 접붙여 모든 복에 참여하게 하신다.
- 믿음은 본성으로 가질 수 없다
- 믿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이루는 일
- 성령의 내적 인침이 필요하다
- 하나님은 원하시는 자에게 믿음을 주신다
- 멸시는 내 탓, 믿음은 내 공이 아님
36. 믿음은 마음에 뿌리를 내림
다음 단계는 머리(지성)가 받아들인 것을 마음 깊이 부어 넣는 일이다. 말씀이 머리 위에서만 맴돌면 믿음으로 받은 것이 아니다. 말씀이 마음에 뿌리내려야 시험을 막는 무너지지 않는 성벽이 된다. 머리를 깨우치는 것도 성령의 일이지만, 마음에 확신을 심는 데서 성령의 능력이 더 분명히 드러난다. 마음의 불신이 머리의 어둠보다 더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은 도장처럼 약속을 마음에 찍으시고, 보증인처럼 그 약속을 확증하신다. 바울은 성령을 '약속의 성령', 우리 기업의 '보증'이라 부르고,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성령을 보증으로 주셨다고 말한다.
- 머리로 아는 데서 그치면 믿음 아님
- 마음에 뿌리내려야 성벽이 된다
- 마음의 불신이 머리의 어둠보다 크다
- 성령은 도장이자 보증인
37. 믿음이 의심을 이김
앞서 말했듯 신자의 마음은 의심에 시달려 늘 평온하지는 않다. 그러나 무엇이 흔들어도 신자는 결국 시험의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오거나 자기 자리를 지킨다. 시편 46편은 땅과 산이 흔들려도 하나님이 피난처이시니 두렵지 않다고 노래한다. 시편 3편의 다윗은 하나님이 붙드시니 누워 자고 깬다고 고백한다. 다윗이 늘 평온했던 것은 아니지만, 믿음의 분량만큼 은혜를 맛보며 평안을 깨는 것들을 담대하게 무시했다. 그래서 성경은 믿음을 북돋우려고 '잠잠하라', '참고 기다리라', '인내가 필요하다'고 명한다.
- 신자도 늘 평온하지는 않다
- 그래도 결국 자리를 지킨다
- 하나님이 피난처이시기 때문이다
- 성경은 잠잠히 기다리라고 명한다
이에 대한 스콜라 신학자들의 반론을 반박함. 38-40
38. 믿음에 관한 스콜라 신학자들의 오류
스콜라 신학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덕적 추측'으로만 알 수 있다고 가르쳤다. 자기 삶을 보고 은혜받기에 부족하지 않다고 짐작하는 방식이다. 칼빈은 하나님의 마음을 내 행위로 판단해야 한다면 자신은 짐작으로 결코 은혜에 이를 수 없다고 말한다. 믿음은 값없는 약속에 맞추어져 있으므로 의심이 끼어들 틈이 없다. 삶이 깨끗해야 사랑받는다는 논리로는 어떤 확신도 생기지 않는다(자세한 논의는 3권 15장으로 미룬다). 그들이 즐겨 인용하는 전도서 9:1('사랑받을지 미움받을지 모른다')도 뜻이 다르다. 칼빈은 불가타 번역의 문제는 지나가며 언급만 하고, 핵심을 이렇게 짚는다. 이 구절은 겉으로 일어나는 일만 보고는 누가 하나님께 사랑받는지 판단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은 일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 구절을 은혜의 확실성을 부정하는 데 쓴다면, 사람과 짐승이 같은 일을 당한다는 구절을 근거로 영혼 불멸도 짐작일 뿐이라고 해야 하는데, 그것은 터무니없다.
- 스콜라: 은혜는 '도덕적 추측'으로만
- 내 행위로 판단하면 확신은 불가능
- 믿음은 값없는 약속에 맞춰져 있다
- 전도서 9:1은 겉사정으로 판단 말라는 뜻
- 같은 논리면 영혼 불멸도 의심해야
39.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거하심을 확신함
반대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의심 없이 안다는 것은 성급한 가정이라고 한다. 칼빈은 하나님의 헤아릴 수 없는 계획을 우리 머리로 재단한다는 뜻이라면 그 비판이 옳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을 안다는 바울의 말을 그대로 할 뿐이다.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성령의 계시를 불확실하다고 모욕하는 일이다. 바울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성령이 우리 영과 함께 우리가 자녀임을 증언하시며,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고, 내주하시는 성령이 부활 소망의 근거라고 가르친다. "겸손해서 성령의 내주를 확신하지 않는다"는 반론에 칼빈은 고린도후서 13:5와 요한일서 3:24를 든다. 성경은 오히려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신 줄 알라고 요구한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를 고백하는 것을 교만이라 비난하는 것은 기초에 대한 무지이며, 이 고백 없이는 기독교가 성립하지 않는다.
- 하나님의 계획을 재단하는 건 금물
- 그러나 성령은 은혜를 알게 하신다
- 성령이 자녀 됨을 증언하신다
- 성령의 내주 확신은 교만이 아니다
- 이 확신 없이는 기독교도 없다
40. 믿음과 성도의 견인
반대자들의 두 번째 공격은 이렇다. 지금 은혜 안에 있다고는 '추측'할 수 있어도, 끝까지 견딜지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칼빈은 현재 일도 장래 일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는 로마서 8:38-39의 고백으로 답한다. 그들은 "바울은 특별 계시로 알았다"며 빠져나가려 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만의 체험이 아니라 모든 신자가 믿음으로 받는 유익을 말하고 있다. 바울이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경고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두려움은 혼란에 빠뜨리는 두려움이 아니라, 베드로의 말처럼 하나님의 능한 손 아래 겸손히 서게 하는 두려움이다. 믿음은 본래 이 삶 너머의 영원을 바라보는 것이므로 그 확실성을 '지금 이 순간'에 가두는 것은 어리석다. 이 확신을 고백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오히려 부끄러워 숨기는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을 억누르는 배은망덕이다.
- 반론: 끝까지 갈지는 모른다
- 로마서 8장은 모든 신자의 고백
- 경고는 겸손하게 하려는 것
- 믿음은 본래 영원을 바라본다
- 확신을 숨기는 게 배은망덕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상호 관계. 41-43
41. 히 11:1에 나타난 믿음의 정의
믿음의 본질은 그 기초인 약속으로 재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약속을 빼면 믿음은 무너진다. 칼빈은 자신의 정의가 히브리서 11:1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실상'으로 번역된 헬라어 '휘포스타시스'는 경건한 마음이 기대는 버팀대라는 뜻이다. 칼빈은 이 뜻을 택하되, '신뢰'로 읽어도 괜찮다고 한다. 구원의 일은 마지막 날까지 우리 감각을 넘어서 있어서 우리 자신을 뛰어넘어야만 붙잡을 수 있다. 그래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 소망 중에 있는 것에 대한 확신이다. '증거'로 번역된 '엘렝코스'(아우구스티누스는 자주 '확신'으로 옮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한다는 뜻이며, 이것은 오직 말씀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의지할 때 가능하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사람에게서는 사랑이 저절로 일어나므로, 사랑이 믿음과 소망보다 앞선다는 신학자들의 주장은 틀렸다. 사랑을 처음 일으키는 것은 믿음이다. 칼빈은 이보다 베르나르의 말이 더 바르다며 인용한다. 죄 사함도, 선행도, 영생도 모두 하나님께 달렸음을 믿는 것이 시작이고, 성령의 증언으로 그것이 '나를 위한' 것임을 믿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 믿음은 약속으로 재야 한다
- 휘포스타시스 = 마음이 기대는 버팀대
- 엘렝코스 =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함
- 믿음이 사랑을 낳는다
- 베르나르: '나를 위한' 은혜를 믿기
42. 믿음과 소망의 관계
믿음은 어디서든 소망을 떼어 놓을 수 없는 짝으로 데리고 다닌다. 아니, 믿음이 스스로 소망을 낳는다. 하나님의 진리가 속이지 않는다고 확신한 사람은 당연히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망은 믿음이 참되다고 받아들인 것을 기다리는 것이다. 믿음은 하나님이 아버지이심을 믿고, 소망은 그분이 아버지로 드러나시기를 기다린다. 믿음은 소망의 기초이고, 소망은 믿음을 자라게 하고 지탱한다. 소망은 성급한 믿음을 진정시키고, 지친 믿음을 새롭게 해 끝까지 가게 한다. 소망이 특히 필요한 때는 세 가지다. 하나님이 약속 이루기를 늦추실 때, 진노를 드러내며 얼굴을 숨기시는 것 같을 때, 조롱하는 사람들과 내 육체와 세상이 "약속이 어디 있냐"고 속삭일 때다. 그때 소망은 천 년을 하루처럼 여기며 영원을 바라보게 한다.
- 믿음은 소망을 낳는다
- 믿음은 믿고, 소망은 기다린다
- 소망은 믿음을 지탱하고 진정시킨다
- 지연·침묵·조롱의 때에 소망이 필요
- 천 년을 하루처럼 보는 눈
43. 믿음과 소망의 밀접한 연관성
둘이 이렇게 닮고 얽혀 있어서 성경은 '믿음'과 '소망'을 바꿔 쓰기도 한다. 베드로전서 1:5의 '믿음'에는 소망의 뜻이 들어 있다. 같은 편지에서 베드로는 둘을 나란히 묶는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소망에서 '간절한 기대'를 끌어내고, 갈라디아서에서는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말한다. 칼빈은 이를 근거로 롬바르드(12세기 신학자, 『명제집』의 저자로 알려짐)를 반박한다. 롬바르드는 소망의 기초를 하나님의 은혜와 행위의 공로 두 가지로 보았고, 자격 없는 사람의 소망은 '뻔뻔함'이라고 했다. 칼빈은 소망의 과녁은 믿음의 과녁과 같으며,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이라고 답한다. 하나님이 친히 소망을 품으라고 명하셨으니, 죄인으로서 행위를 버리고 긍휼만 의지해 담대히 소망하는 것은 뻔뻔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참되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 성경은 믿음과 소망을 섞어 쓴다
- 소망의 과녁 = 믿음의 과녁 = 긍휼
- 롬바르드의 '은혜+공로' 기초를 거부
- 자격 없는 소망 = 하나님 말씀 신뢰
- "믿음대로 되라" 하신 분은 속이지 않음
2. 오해와 반론
| 입장 | 주장 | 칼빈의 답 | 근거 구절 |
|---|---|---|---|
| 경험에서 나온 반론(17절) | 신자도 불안과 공포에 눌리니 '확실한 믿음'은 비현실적이다 | 확실성은 의심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싸우면서도 확신을 놓지 않는 것이다 | 시편 42:5, 마태복음 8:25-26 시편 42: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마태복음 8:25-26 25그 제자들이 나아와 깨우며 이르되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 26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시니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 |
| 요한일서 4:18을 근거로 한 반론(27절) |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으니 신자의 두려움은 잘못이다 | 요한이 말한 두려움은 형벌만 무서워하는 불신자의 두려움이며, 신자의 경외와 다르다 | 요한일서 4:18, 말라기 1:6 요한일서 4:18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말라기 1:6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 나 만군의 여호와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들은 그 아버지를, 종은 그 주인을 공경하나니 내가 아버지일진대 나를 공경함이 어디 있느냐 내가 주인일진대 나를 두려워함이 어디 있느냐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나이까 하는도다 |
| 유사 교황주의자(24절) | 그리스도를 보면 소망, 나를 보면 두려움이니 둘 사이를 오가야 한다 | 그리스도는 우리 밖이 아니라 안에 계시며, 연합 때문에 정죄가 구원에 삼켜진다 | 로마서 8:10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것이나 영은 의로 말미암아 살아 있는 것이니라 |
| 피기우스 등(30절) | 믿음의 대상은 말씀 전체인데 약속에만 묶으면 믿음을 쪼개는 것이다 | 말씀 전체를 믿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구원하는 믿음은 값없는 약속 위에 서고 그리스도와 연합시킨다 | 히브리서 11:7, 로마서 10:8 히브리서 11:7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상속자가 되었느니라 로마서 10: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
| 예상 반론: 나아만·고넬료·내시(32절) | 그리스도를 몰라도 믿음이 인정되지 않았나 | 그들의 앎은 희미했지만 그리스도를 어느 정도 배웠고, 율법의 제사가 가리킨 목적이 그리스도였다 | 열왕기하 5:17-19, 사도행전 10:31, 사도행전 8:27 열왕기하 5:17-19 17나아만이 이르되 그러면 청하건대 노새 두 마리에 실을 흙을 당신의 종에게 주소서 이제부터는 종이 번제물과 다른 희생제사를 여호와 외 다른 신에게는 드리지 아니하고 다만 여호와께 드리겠나이다 18오직 한 가지 일이 있사오니 여호와께서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곧 내 주인께서 림몬의 신당에 들어가 거기서 경배하며 그가 내 손을 의지하시매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히오니 내가 림몬의 신당에서 몸을 굽힐 때에 여호와께서 이 일에 대하여 당신의 종을 용서하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 19엘리사가 이르되 너는 평안히 가라 하니라 그가 엘리사를 떠나 조금 가니라 사도행전 10: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사도행전 8:27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
| 스콜라 신학(33절) | 믿음은 지식에 대한 동의다 | 믿음은 마음의 신뢰이며, 성령이 비추고 인치시는 선물이다 | 에베소서 1:13-14, 고린도후서 1:21-22 에베소서 1:13-14 13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14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1:21-22 21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 |
| 스콜라 신학(38절) | 은혜는 도덕적 추측으로만 알 수 있다(전도서 9:1) | 믿음은 행위가 아닌 약속에 선다. 전도서는 겉사정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 전도서 9:1-2 1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 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2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
| 스콜라 신학(39절) | 성령을 소유했다고 확신하는 것은 무모하고 교만하다 | 성경이 성령의 증언과 내주를 알라고 요구한다 | 로마서 8:16, 고린도후서 13:5, 요한일서 3:24 로마서 8:16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 고린도후서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요한일서 3:24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는 주 안에 거하고 주는 그의 안에 거하시나니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느니라 |
| 스콜라 신학(40절) | 지금은 몰라도 끝까지 견딜지는 모른다. 바울은 특별 계시를 받았다 | 로마서 8장은 모든 신자의 고백이고,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경고는 겸손을 위한 것이다 | 로마서 8:38-39, 베드로전서 5:6 로마서 8:38-39 38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39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베드로전서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
| 중세 신학자들(41절) | 사랑이 믿음과 소망보다 앞선다 | 사랑을 처음 일으키는 것은 믿음이다(베르나르의 말이 더 바르다) | (이 대목에는 직접 인용 구절 없음) |
| 롬바르드(43절) | 소망의 기초는 은혜와 공로이며, 자격 없는 자의 소망은 뻔뻔함이다 | 소망의 과녁은 믿음의 과녁과 같은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하나님이 소망을 명하셨다 | 갈라디아서 5:5, 마태복음 9:29 갈라디아서 5: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마태복음 9:29 이에 예수께서 그들의 눈을 만지시며 이르시되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시니 |
3. 용어
- 확신
- 하나님의 약속이 바로 '나'를 향한 것임을 믿고 마음으로 기대는 신뢰. 기분이 아니라 약속에 근거한다.
- 육체와 영
- 몸과 정신이 아니라, 신자 안에 남아 있는 죄의 성향(육체)과 성령이 새롭게 하신 부분(영)을 가리킨다.
- 경외
- 하나님을 아버지로 공경하는 마음과 주인으로 두려워하는 마음이 합쳐진 태도.
- 값없는 약속 / 조건적 약속
- 아무 자격 없이 은혜로 주시는 약속 / '네가 지키면 주겠다'는 조건이 붙은 약속.
- 조명
- 성령이 마음의 눈을 밝혀 말씀을 깨닫게 하시는 일.
- 인침과 보증
- 도장을 찍듯 약속을 마음에 확증하시는 일, 그리고 그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담보.
- 스콜라 신학
- 중세 대학(학교)에서 발달한, 논리적 구분을 중시한 신학 전통.
- 도덕적 추측
- 자기 삶을 살펴보고 '아마 은혜 안에 있겠지' 하고 짐작하는 방식.
- 견인(堅忍)
- 참 신자가 하나님의 지키심으로 끝까지 믿음에 머문다는 가르침.
- 휘포스타시스 / 엘렝코스
- 히브리서 11:1의 헬라어. '실상'(마음이 기대는 버팀대) / '증거'(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하는 확신).
4. 청년의 삶으로
칼빈: 의심과 싸우면서도 하나님께 다시 부르짖는다면, 그것이 믿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17·21절).
칼빈: 나만 보면 정죄뿐인 게 맞다. 그러나 나는 그리스도와 한 몸이니 그분의 의가 내 죄를 압도한다(24절).
칼빈: 믿음은 장수나 부귀를 약속하지 않는다. 아무리 초라해도 버리지 않으신다는 약속으로 만족한다(28절).
칼빈: 벌이 무서운 노예의 두려움이 아니라, 사랑하는 아버지를 실망시키기 싫은 자녀의 두려움이다(26·27절).
칼빈: 믿음은 믿고 소망은 기다린다. 더뎌도 기다리라는 말씀대로 소망이 지친 믿음을 붙든다(42절).
5. 이 편의 결론
- 믿음의 '확실함'은 의심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불신앙과 싸우면서도 하나님의 긍휼을 놓지 않는 것이다.
- 건강한 두려움(교만을 누르는 경외)은 확신을 무너뜨리지 않고 오히려 세운다.
- 믿음은 내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 위에 서며, 나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킨다.
- 그 약속을 머리에서 마음으로 새기시는 분은 성령이다. 그러므로 확신을 고백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 믿음은 사랑을 낳고 소망과 함께 간다. 소망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믿음을 끝까지 지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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